책 리뷰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Edward W. Said지음 박홍규 옮김.
읽은 책은 “교보문고. 2013/01/30 개정증보판6쇄 736쪽”으로 리뷰에 인용된 문장들은 이 책의 쪽수와 같다.
리뷰에 앞서 부끄러운 고백을 하고 시작한다.
책을 구매하기 전에는 <오리엔탈리즘>을 단순히 “동양적”으로 생각했었다. 구매하려고 여러 책 소개 글들을 살펴보며 “동양적”이라는 단편적인 해석만 알고 있는 내 자신에 많은 부끄러움을 안고 읽기 시작한 책이다.
이제 널리 알려진 책이니 지금 나의 <오리엔탈리즘> 리뷰를 읽는 독자들은 제목에 대한 오해는 없을 것이다.
작고한 작가의 책, 출간된 지 오래된 책, 읽은 지 여러 해 지난 책을 다시 봄은 많은 젊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어서다. 특히 중등교육 고등교육을 유럽에서 마친 나의 아들들에게 이 책을 다시 읽도록 권하고 싶은 마음이다.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적’인 것이 아닌 ‘서양의 동양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유럽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이다. 동양은 유럽에 단지 인접되어 있다는점만이 아니라, 유럽의 식민지 중에서도 가장 광대하고 풍요하며 오래된 식민지였던 토지였고, ~~~ 또 유럽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반복되어 나타난 타자 이미지이기도 했다. 15쪽.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시각을 중심으로 동양을 이야기했고, 그것이 “동양학”으로 굳어져 정당성을 획득했다.
유럽인들에게 “타자”인 동양을 사이드는 이렇게 논한다.
동양이 동양화되었다는 것은, 19세기의 평균적인 유럽인들에의해서, 동양이 모든 상식에 비추어 ‘동양적’이라고 인지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동양이 동양적인 것으로 날조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에는합의라고 하는 것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23쪽.
텍스트에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와 그의 저서인 이 책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국가평의회 의원을 지내기도 했고, 많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여했기 때문에 저서 <오리엔탈리즘>에 나오는 많은 사례들이 아랍인 , 이슬람교도들을 중심으로 한다.
에드워드라는 영국식 이름과 사이드라는 아랍식 성으로 조합된 그의 이름은 그가 어느 세계에도 온전하게 속하지 못한 경계인이자 망명자임을 알려준다. 사이드는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서구 중심적인 폭력과서구 지식체계와 담론의 관계를 <오리엔탈리즘>에서 날카롭게 파헤친다.
이제 본문을 읽어보자.
소위제3세계의 독자들에 대해서는, 서양의 정치와 그 정치 속에서 비서양세계의 지위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도리어 서양의 문화적 담론의 힘, 곧 단순히 장식적인 강대함이나 ‘상부구조’의 강대함이라고 자주 오해되고 있는 담론의 힘을 이해하기 위한 방책을 제공하고자 했다. 57쪽
아랍 팔레스타인인의 존재가 허용된다고해도 그것은 문제아인 동양으로서 이다. 아랍내지 이슬람교도를 억누르는 인종차별주의, 문화적 고정관념, 정치적 제국주의,반(反)인간적인 이데올로기의 그물망은 참으로 강력하다. 이러한 그물망이야말로 모든 팔레스타인인에게 특별히 가혹한 운명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60쪽
우리는사실 이슬람인들과 접해보지도 못한 채, 중동의 오랜 역사관에 대한 이해도 없이 이슬람과 아랍계 국가들을 판단한다. 단편적인 편견은 표면화된 테러 그 이면의 폭력이다.
기독교가 지은 반이슬람적인 저술들, <엘 시드의 노래> <롤랑의 노래> 세익스피어가 지은 <오셀로> 가운데 동양과 이슬람은 언제나 국외자로 표상되었고, 유럽의 내부에서는 특별한 역할만을 수행했다. 134쪽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으로 시작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기반으로 서양의 우월감과 동양의 열등감이라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동양은 오리엔탈리스트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졌다. 오리엔탈리스트들은 텍스트를 통하여 동양의 열등한 점들을 왜곡되게 편집했다. 동양은 단순한 신비나 공포를 넘어, 장악되고 지배되고 경영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텍스트가 단지 지식만이 아니라, 그 텍스트가 서술하고 있는듯이 보이는 그 현실 자체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이다.174쪽
쇄국정책을 편 동양의 왕들은 전체주의적 독재군주 이미지로 표면화됐고, 서양과의 불평등한 교역의 거부라는 이유는그 이면에 숨겨졌다.
오리엔탈리즘이 지금까지 옹호하여 온것은, 지적 및 예술적인 성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뒤에 발휘된 유효성, 유용성, 권위에 대한 것이었다.222쪽
1802년, 프랑스 학술원이 1789년이래의 인문, 자연과학의 현상과 발전에 관한 ‘일람표’의 작성을 나폴레옹으로부터 위탁받았을 때 사시도 그 집필자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227쪽
1822년에 아시아협회가 창설됐고 살베르트 드 사시가 초대 회장이 되었다.
실베르트 드 사시는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논문 속에서-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자신의 작업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방대한 양의 자료를 밝혀내고, 조명하여, 구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 때문인가? 학생 앞에 보이기 위해서였다. 229쪽
오리엔탈리즘의 학문적 체계화를 이룬 인물은 살베르트 드 사시와 에르네스트 르낭이었다.
한편 에르네스트 르낭은 오리엔탈리즘의 제2세대 출신이다. 르낭의 작업은 오리엔탈리즘의 공적인 담론을 확고히 하고 그 통찰력을 체계화하여, 그 지적 및 세속적인 여러 제도들이 확립한 것이었다.234쪽
사시와 르낭, 유럽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동양관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고, 국민교육이나 대학교육을 통해서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르낭과 사시가 노력한 것은 동양을 일종의 인간적인 평범함으로 환원시키는 것이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동양의 여러 특징은 쉽게 조사되었으며, 동양이 갖는 복잡한 인간성은 박탈되었다. 265쪽
여기서 말하는 “동양의 여러 특징”이란 동양인들은 가부장적이고 노예근성이 있는 수동적인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동양은 유럽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이 만들어낸 ‘동양인’이 되었고, 그것이 그들에겐 지식이 되었고, 그 지식은 고착화되었다.
지식의 발달이란, 지식이 단순히 양적으로 부가되고 누적되는 과정이 아니라, 연구상의 합의라고 불려온 것의 내부에서 지식의 선택적인 누적, 배척, 말소, 재배치, 강조가 행해지는 과정이다. 309쪽
처음엔 동양에 대해 소수여행자 또는 거주자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왜곡된 증언들이 유럽에 소개됐다. 지금 우리 여행자들도 자신이 접한 방문지의 좁은 단면을 마치 전체인 것처럼 전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런것들이 모여서 텍스트가 되면 그 텍스트가 담론이 되는 것이다.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지적한 오리엔탈리스트들이 만들어낸 ‘동양인’이 바로 그렇게 인식된 것이다.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은 꾸준히 증식하고, ‘우리’와 ‘그들’이라는 대립적인 이원론으로 극대화된다.
자기동일성과 모순회피라는 원리가 오리엔탈리스트를 구속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오리엔탈리스트의 전문지식은 그러한 원리를 유린하고 있다. 그러한 전문지식의 근저에는 오리엔탈리스트가 철학적·수식적으로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 논박이 불가능한 집합적인 진리가 존재한다. 406쪽.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오리엔탈리즘의 학문적 담론은 우리들의 인식구조를 유럽중심주의로 돌려놓았다.
‘니그로 정신’이라든가 ‘유대인의인격’에 관하여 학술적인(또는 대중적인) 논문을 쓰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한 상황에 있는 반면, ‘이슬람 정신’이라든가 ‘아랍인의 성격’이라는 연구에 종사하는것은 완벽하게 가능하다. 450쪽
예컨대 미국에는 아랍과 이슬람 동양을 연구하기 위한 기관이 수없이 존재하나, 동양에는 그 지역에 대하여 최대의 경제적 및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 미국을 연구하는 기관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555쪽
사이드는 이런 현상을 ‘도그마’로 설명한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도그마인 것이다.
(참고. 도그마 ; 교의, 교조, 교리. 카톨릭교회에서 초자연적인 계시를 근거로 신앙의 진리를 정리한것. 도그마는 이성의 비판이 허용되지 않고, 신자는 무조건 믿어야 함.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신봉.)
이렇듯 오리엔탈리즘은 어떤 실증과는 거리가 멀다. 반복 재생되는 도그마에 가깝다. 우리가 잘 아는 마르크스도 이 도그마적인 발언을 했는데, 그는 “동양인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새로운 제국주의에 멋지게 적응하여 온 것이 실정이고, 그 중요한 패러다임은 아시아를 지배하고자 하는 제국적 기도에 항의하기는커녕도리어 그것을 강화하는 역할조차 수행하여 왔다. 552쪽
564 ~ 603쪽에는 1995년 후기, 603 쪽 ~ 621쪽에는 2003년 후기가 수록되어있다.
622 ~ 691쪽에는 역자의 <옮기면서>가 수록되어있다.
692 ~ 724쪽에 이르는 원주는 사이드가 이 책 <오리엔탈리즘> 저술에 얼마나 많은 자료들을 참고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제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리뷰의 결론에 이르렀다. 결론을 위하여 책 515쪽에 기술된 도그마를 정리한다.
1) 합리적으로 발전해온, 인도적이고 우월한 서양과, 탈선적이고 정체되어 있으며 열등한 동양사이에 절대적·체계적인 차이가 있다.
2) 동양에 관한 추상개념, 특히 ‘고전적’ 동양문명을 표상하는 여러 문헌에 근거한 추상개념이, 현대동양의 여러 현실로부터 직접 나오는 증거보다도 언제나 더욱 바람직한 것이다.
3) 동양이 영원히 획일적이고 자기를 정의할 수 없다고 하는 것, 따라서 서양의 관점에서 동양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고도로 일반적이고 체계적인 어휘가 불가결하며, 학문적으로 ‘객관적’이라는 주장이 생겨나게 된다.
4) 동양이 본질적으로 두려운것이라고 하는 것 또는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
유럽인들에게 정의된 ‘동양인’이 아닌 동양인으로서, 동양에 속한 한국인으로서 안타깝게도 빨간펜으로밑줄 근 인용문을 옮긴다.
동양인 학생들(그리고 동양인 교수들)은 지금 미국의 오리엔탈리스트에게 와서 그 무릎 아래에서 배우기를 희망하며, 그 뒤에는, 내가 오리엔탈리즘의 도그마라고 특징지어온 상투문자를 자국의 청중을 향하여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555쪽
오리엔탈리즘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 <오리엔탈리즘> 밖, 우리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이것에 대해 한번쯤은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권유하기 위해 나는 <오리엔탈리즘>의 리뷰를 썼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