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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Jan 04. 2021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나이에 대한 소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나이에 대한 소회)


사람들은 태어난 이후로 한없이 많은 모든 것들을 교육 받는다. 그 연령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신분에 맞게 처신하는 법을 배운다. 처한 위치에 따른 인간의 도리, 나이의 변화에 따른 삶의 지혜 이런 것들을 윗대에서 배우기도하고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익히기도 한다.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운다고 할 정도로 배움에는 한도 끝도 없다. 그런데 그 많은 배움 중에서 늘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있다. <어른의 처신>이 바로 내가 늘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자식의 도리도 배웠고, 손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행할 예의도 배웠는데, 부모 노릇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른 노릇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별로 배운 게 없다. 그저 더듬어 나갈 뿐이다. 그래서 늘 시행착오에 후회가 쌓인다.
자식이 부모에게 어찌 해야 한다는 것을 실천은 못할 망정 그 이론은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부모로서 자식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는 잘 모른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지켜야 할 도리는 자라면서 계속 어른들에게서 들으며 컸지만, 어른이 되면 아랫사람에게 어떤 도리를 지켜야 하는지는 듣지 못하고 컸다. 그러니 나의 어른 노릇은 오죽할까. 어른 중심의 일방적인 처신일 때가 많을 것이다.


많은 어른들이 어른들의 처신에 대한 교육(피교육도 포함)을 등한시한다. 그저 아랫사람들에게 아랫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데 바쁠 뿐이다. 몇 살이라고 획을 그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아랫사람 가르치기를 멈추고 자신이 어른 교육을 받는데 힘을 써야 할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하기를 바람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이 제대로 된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세상에 어른만 못한 아이는 용서가 되지만, 아이만도 못한 어른은 용서 받기 어렵다. 어떤 사람이 제대로 된 어른일까………?
나이 한 살 더 먹는 즈음 내 생각은 <나이값>에 머물러있다. 어떡하면 더 젊어 보일까가 아니라, 어떡하면 제대로 된 어른이 될까, 이것이 더 중요하다.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진다. 나이 값을 해야할텐데...

어느 시점까지는 한살이라도 더 나이를 많게 보이는 것을 좋아하고, 그 시점이 넘으면 한 살이라도 적게 보이려고 한다. 그렇게 갈라지는 시점이 언제인지는 개인에 따라서 다 다르겠지만.
나이에 따라 그 나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아이는 아이로서, 어른은 어른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사람들은 다 누리고 싶어 한다. 나역시.
그런데 나이에는 특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책임도 있다. 나이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나이가 가지는 특권과 책임의 종류를 어떻게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있겠는가. 그 다양한 종류 중에서 우선 이런 것을 생각해본다. 나이 많은 사람이 자기보다 나이 적은 사람을 잘 이해해주고 잘 도와줘야되는 책임에 대해서. 내 나이 70이니 이 정도는 나이 값은 자각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 나이에는 그 나이로서 감당할만한 상황들만 겪고 잘 감당해내면 된다. 그러면 다음 나이엔 또 다음 나이대로 감당할 일이 생기고.... 이렇게 나이 먹어가고 있다.

어린 아이이든 젊은이든 노인이든 아직 때가 되지도 않은 책임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겪는 고통을 우리는 다 안다. 고통이란 것이 굳이 생활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의 고샅마다 복병들은 무기를 들고 숨어있다. 그 매복을 감당할 나이라면 기꺼이 싸워 볼만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데 만나는 복병은 힘에 부친다.

그래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 나이에 겪지 않아도 될 어려운 상황을 스스로 뚫고 나가야하고, 그 나이에 지지 않아도 될 짐을 무겁다는 내색도 하지 않고 잘 감당하며 살고 있다.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강하고 무겁고 힘든 문제들을 껴안고 산다.

나이보다 더 큰 짐! 그렇다면, 그 보다 더 나이먹은 사람들이 그 짐을 나누어 짐은 당연한 일이다.

큰 짐을 지지 않은 나이 많은 자가 나이보다 큰 짐을 진 나이 어린 자를 돕는 것이 바로 나이값이다.

약한 어린이가 힘에 부치는 무게의 가방을 짊어지고 가는 것을 보면 누구나 다 안쓰러워하고 빼앗아 대신 들어다주고싶은 마음이 생기는것이 우리네 심성이다.

저울로 달면 눈금을 넘어서 더 나갈 수 없는 정확한 나이의 무게가 있고, 자로 재면 더 늘어날 수 없이 정확난 나이의 길이가 있다. 그 기준 수치가 바로 나이 값이다.

누군가 더 큰 무게를, 더 큰 길이를 감당해야 한다면 나이의 무게가 무거운 사람, 나이의 길이가 긴 사람이 그들을 도와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이끄는 공동체가 제 갈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이 값을 하며 살고싶어 하는 나의 자기성찰이며 평균수명보다 많은 나이의 사람으로서의 진지하게 하는 나의 고백이다.

나같은 노인의 나이, 무엇이 어른들의 나이를 말해주나?

우선 가시적인 겉모양새를  생각해보자. 요즘은 이마에 새겨진 주름살이 인생의 깊이를 드러낸다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동안>에 대한 찬사나 감탄의 소리를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다.

외모로 보아 짐작하기 어려운 나이를 말과 행동으로 가늠해보자. 기준을 <꼰대>냐 아니냐로 선을 긋는다. 꼰대의 대표적인 언어를 <라떼(나 때)>로 표현한다. 세태가 이러하니 나이값의 기준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겠다.

나는 나이값을 하는 어른이고 싶은데...

아직 어린애로 생각하고있는 아이들이 제법 철든 소리를 해서 ', 철이 다 들었구나!'하고 안심을 하면 갑자기 엉뚱한 철부지 행동을 하고, 철딱서니없는 망아지라고 걱정을 하고 있으면 의젓한 언행으로 감동시키고 그런다.
이런 상황이 비단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건 아니다. 누가 봐도 나이 많은 사람인데  언행을 보면 어른답지 못한 못난이들도 많고, 바른 길을 제시하고 이끌어주는 어른들도 많다.

나는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3포, 5포 세대를 이해하고 따뜻한 품에 끌어안는 어른일까, 그들의 버릇없고 무기력함을 비난하기만 하는 꼰대일까?
아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성숙해가는 것이 느껴지는데 노인들은 더이상 자랄 생각을 않고 멈춰  있다. 위로 자랄 때가 아니라면 안으로 깊어지기라도 해야할텐데!

2021년!

이미 노인이지만 나도 자라고싶다. 큰 나무로 자라고싶다. 우뚝 솟고 잎새 무성한 나무가 되어 날개쭉지 처진 새들이 날아와 쉬는 큰 나무로 자라고싶다.

세상살이에 지친 새들이 깃드는 품넓은 나무로 자라고싶다.

2021년, 나이값을 하는 어른이 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발짝을 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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