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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pr 16. 2021

미셀 푸코-<감시와 처벌-감옥의 역사>

책 리뷰

<감시와 처벌 - 감옥의 역사>

미셀 푸코 저, 오생근 역. 나남. 2014/06/05 재판21쇄. 472쪽


리뷰중에 인용된 쪽수는 위의 책에 의한 것입니다.

<감시와 처벌>에서 저자 미셀 푸코가 인용한 책들은 원전을 밝히고 재인용이라 표했습니다.


“감시”라는 단어를 끌어다 쓰기는 좀 꺼려지지만, 현재 시대가 감시의 시대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감시”를 “노출”로 대치한다고해도 그 내용은 다르지 않다. 우리가 숨어들 공간은 없다. 우리가 비껴갈 시간도 없다. 노출은 비단 물리적인 육체뿐만이 아니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정신도 마음도 다 까발려진 채 어느 곳에서나 누구에게나 다 드러나는 현실이다. 나는 숨기고싶은데 남들이 파헤치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오히려 내 스스로가 남들 앞에 다 드러내놓는 형국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의 “빅 브라더”는 소설 밖으로 나와 현존하는 “빅 브라더”가 되었다. <트루먼 쇼>의 주인공은 배우 짐 캐리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이 모두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되었다. 더욱 무서운 것은 나의 현재만 감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도 추적할 수 있고, 놀랍게도 미래까지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자신이 아니라 남들이 나를 그렇게 짯짯이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유발 하라리가 “신흥종교”라고 칭하는 “데이터”가 나의 미래를 미리 끌어다 눈앞에 내놓으니 놀랍지 않은가! 철학자 제러미 벤덤이 일찍이 ‘판옵티콘’을 제시하지 않았던가. 감시당하는 것은 이미 오랜 역사가 되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해서 감시당하고 그 결과로 처벌을 받기까지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감시에는 분명히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처벌의 종류와 감시방법, 감옥의 탄생 과정을 깊이 있게 다뤘다. 책의 시작부터 근대의 처벌방식을 기록하므로써 오늘날 처벌제도의 형식이 된 근대를 파헤쳐보는 것이다. 과거를 분석해보는 것이 왜 필요할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수시로 깨닫는 것은 현재(과거에는미래였던)가 근대(과거에는 현재였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보자.


1부 신체형

<감시와 처벌>은 끔찍한 처벌로 시작한다. ‘감시’에 대한 것을 슬슬 이야기하다가‘처벌’은 좀 늦게 나와도 되는 것 아닌가. 첫 문단부터 이게 뭐야, 아니 이렇게 글펀치를 쎄게 날리다니, 이 정도면 KO패다. 책을 계속 읽을 동력을 잃을 정도로 끔찍하다.


“손에 2파운드 무게의 뜨거운 밀랍으로 만든 횃불을 들고, 속옷 차림으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문 앞에 사형수 호송차로 실려 와, 공개적으로 사죄할 것.” 다음으로 “상기한 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은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린다.” 21쪽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엥에 대해서 행해진 소송의 서류 원본 및 기록> 1757년, 제3권 372-374면 재인용)


이 끔찍한 첫 문단은 저자의 글은 아니다.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엥에 대해서 행해진 소송의 서류 원본 및 기록(1757년)>에서 저자가 인용한 글이다. 1757년 3월2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15세를 살해하려다가 실패하고 체포되어 대역죄로 극형을 받은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엥의 신체형 장면이다.

미셀 푸코는 왜 이 끔찍한 극형 장면을 책의 첫머리에 끌어다 놨을까. 그는 소설가가 아니다. 철학자다. 철학에 대해 생각해보자. 철학자들은 숭고한 이상을 제시하고, 논하고, 선도했다. 인권이나 도덕에 대해 철학자들은 계몽주의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향’일 뿐이었다. 그 이상향을 실현하는 것은 ‘권력자’였다. 철학자가 제시한 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권력자의 힘대로 실현되었다.

철학자 푸코는 왜 이 책을 썼을까? 사람들에게 이상향을 만들어주겠다는 그럴듯한 이유로 저지른 권력자들의 만행을 고발하고자 함은 아닐까?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기관들 –감옥, 교화소, 구빈원 그리고 발전적인 미래를 제시하는 학교, 공장, 이러한 진보와 혁신의 실체를 파악해보라는 뜻으로 읽힌다. 저자는 끝내 내뱉지 않은 '저항하라'를 암시하는 책이다.


잘못한 사람, 죄지은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것을 일반인들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권력자들은 그 정당성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다. 여기에 ‘신체형’이 등장한다. 책 머리에 소개된 다미엥의 공개처형이 이런 이유이다.

형벌의 희생자들을 낙인찍고 처벌하는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조직된 의식이지, 자기가 세운 원칙을 잊고 무절제하게 표현되는 사법 권력의 분노는 아닌 것이다.69쪽

신체형은 법률적 및 정치적인 기능을 갖는다. 중요한 것은 상처받은 군주권을 회복시키기 위한 의식이다. 89쪽

민중은 관객으로서 호출된다.  ~~자기들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로 하여 두려움을 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들이 처벌의 보증인으로서 입회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103쪽


공개처형은 매우 중요하다. 권력의 힘을 과시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입회하여 그 힘을 보고 권력을 칭송하는 축제마당을 펼치는 것이다. 그러나 군중들이 모인다는 것은 권력이 통제할 수 없는 이변이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폭력이 순간적으로 가역적인 것이 될 수 있었던 분명치 않은 축제의 소동에서 더욱 강화될 우려가 있었던 것은 통치권력보다 오히려 그러한 민중의 연대의식이었다.  그래서 18세기와 19세기 개혁자들은 결국에는 처형이 단순히 민중을 위협하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된다. 개혁자들이 최초로 주창한 것들 중의 하나는 처형제도의 폐지에 대한 요청이었다.111쪽


2부 처벌

아무리 흉악한 살인자의 경우에도 그를 처벌할 때는 하나의 사실을 존중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성’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 범죄자 속에서 발견되는 이 ‘인간’이 바로 형벌 결정의 표적이 되고, 교정하고 변화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는 대상이 되고, 일련의 기묘한–‘행형’과 ‘범죄론’이라는-학문과 현실의 영역이 되는 시기가 도래한다. 125쪽


17-18세기에 사법개혁이 일어나는데 그 개혁도 결국은 권력자들을 위한 것이 된다. 민중의 인권을 위한 개혁이 아니다. 개혁의 가치가 인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개혁자들은 분노해야 할텐데 개혁자들이 비판하는 것은 그 방향이 달랐다.

개혁자들의 비판 속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권력의 원활하지 못한 운용성에 관한것이지 권력의 약점이나 잔혹성에 대해서가 아니다. ~~법관에 대해서도 ‘국왕의 측근들’에게는 과대한 권한이 부여되었다. ~~ 권력집중은 군주제의 ‘초권력’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만큼 처벌권은 통치자의 개인 권력과 동일시 되어있는 것이다. 133쪽


지금은 21세기. 왕정시대도 아니고 군주도 없다. 그런데 200년 300년 전 시대상을 들여다보면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바로 권력의 속성인 것 같다. 물론 많이 변했지만, 제도가 변했지 권력의 힘을 쫓는 야망은 변치 않았다.


19세기 프랑스 루이 필리프시대(1830~1848)에 신체형이 소멸되고 형벌은 점차 완화된다. 큰 변화는 처벌이 신체에서 정신으로 바뀐 것이다. 정신을 재판하고 처벌하기 위해 감시하고, 교화하고, 교정하기 시작했다. 벌의 강도가 약해진 것일까? 푸코는 그 변화의 목표를 이렇게 서술한다.

범죄법의 개혁은 처벌권의 재조정을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재조정은 처벌권을 보다 규칙적이고, 보다 효과적이고, 보다 지속적이게 하며 또한 그 영향력이 보다 세밀하게 구석구석에까지 이르도록 하는 방식에 의존한다. 135쪽

징벌권의 새로운 ‘경제성’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처벌권의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논리를 이야기한다.  상품경제가 발달되면서 처벌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처벌과 조치가 단지 질책, 금지, 거부, 억제를 가능케 하는 ‘소극적’ 기능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며, ~~ 산업화 체계가 노동력의 자유시장을 필요로 함에 따라, 강제노동의 역할은 19세기의 처벌기구 안에서 감소하게 되고, 그 대신에 교정을 목적으로 하는 구류가 행해지게 된다. 55쪽


산업사회 이전에는 권력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신체형을 집행했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권력은 부를 추구하고, 신체형으로 노동력을 상실하는 것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신체를 이용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신체를 부리기 위해서는 정신을 지배하면 된다는 영리한 생각을 하게된다.

18세기 후반 인구도 증가하고 경제활동도 활발해졌다. 부르주아지가 토지의 소유권을 갖게 되었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불법행위를 단속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처벌은 보복에서 사회질서 수호로 변했고, 표면은 사회질서의 정당성을 내세워, 속마음은 사법을 장악하려는 의도로 처벌 규정이 점점 더 강화되었다.


요컨대, 형벌의 개혁은 군주의 초권력에 대항하는 싸움과 실행되고 묵인된 위법행위를 일삼는 하층권력에 대항하는 싸움의 접합점에서 태어난 것이다. 144쪽


법은 단순히 금지가 목표가 아니라 일상의 행동규범을 만들어 주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신체형이 감금으로 변하면서 감금된 범법자들은 재발방지를 위한 교정을 받게된다. 습관으로 길들이고, 규칙을 따르고,명령에 복종하는 교정이 새로운 처벌로 등장한다. 군주의 권력이 의회나 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가고 새로운 규범 속에서 하층민들의 신체는 경제적 활용과 연결된다. 규율에 따르게 하는 방법으로는 감금이 효율적이다. 형무소가 필요해진 것이다. 이 책의 부제인 “감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범죄자는 ‘장인이나 농부’가 아니고 ‘구걸을 일삼는 무위도식가들’ 191쪽 (<악인 교정 방법에 관한 의견서> 빌랑14세, 1773년, 64면재인용)

보편적인 노동교육을 전담할 시설의 필요성이 생겨난 것이다. ~~ 노동이 게으름보다 유익할 것이라는 이해 체계 속에 억지로라도 집어넣어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자는 일해야 한다”고 하는 격언이 명료해질 만큼 강제적이고, 단순하고, 축소된 작은 사회를 그의 주변에 만들어놓게 될 것이다. 195-196쪽


이러한 감금의 집단 생활은 감시체제를 강화하게 되었다.

그곳의 생활은 계속되는 감시아래 완전히 엄격한 시간표에 의해서 바둑판의 눈금처럼 구획 정리되어 있다. 하루의 모든 시간은 배분되고, 활동 내용은 명시되어 있으며, 그것에 의무와 금지의 여러 사항이 부과되어 있다. 199쪽

잔혹한 신체형을 폐지하고 개혁한 감금을 징벌의 완화로 느끼는 민중들은 그것이 진정 민중의 인권을 위함이 아님을 재빨리 눈치채지 못했다. 정신을 감시당하면서 신체까지 지배당하는 것을 쉽게 깨닫지 못했다.

감옥제도가 구상되는 계획 안에서, 처벌은 개인에 대한 강제권의 기술이다. 그 처벌은 행위 속에 습관이라는 형태로 남겨지는 흔적을 통해 –기호가 아닌- 신체의 훈련 방법을 이용하고 특수한 형벌 관리권의 설정을 전제로 한다. 209쪽


권력은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세세한 ‘규율’을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 정신의학, 광학기술 등의 각종 ‘기술’들이 엮이게 된다.


3부 규율

권력은 규율의 강제를 통해서 인간을 완전히 복종시킬 수 있었다. 정신과 신체를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 민중을 인격체로 여기지 않고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사용되는 도구로 여겼다. 규율은 결과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지배한다. 저자는 규율이 공간에 따른 개인의 분할을 시행한다고 한다. 분할된 개인들을 분류하여 특정 공간에 귀속시키면 지배자의 뜻대로 복종시키고 지배하는데 효율적이다. 분할된 집단들– 교화소, 병원, 구빈원, 학교, 군대, 공장 –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되고, 그 안에서 지켜야하는 규율은 순종하는 정신과 신체를 만든다.

규율 중심의 처벌은 비교, 서열화, 동질화, 구분, 분류, 처벌하고 감시한다. 규율의 기본 단위는 지배나 거주의 단위가 아니라 서열중심이다.

서열은 어떤 분류, 등급 속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위치이고, 가로줄과 세로줄이 만나는 시점이며, 차례차례로 둘러볼 만큼 차이를 둔 간격이다. 규율은 서열의 기술이고, 배열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술이다. 230쪽


 근대적인 권력에게 민중이란 훈련과 교련의 강제적인 규정을 통해서 생산에 이바지하는 기계적인 신체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푸코는 이렇게 적었다.

복종의 기술을 통해서 새로운 객체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서서히 그 객체는 기계적인 신체 –그 이미지가 규율, 훈련에 의한 인간 완성을 꿈꾸던 머릿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떠나지 않던, 굳건하고 활동적인 그러한 실체 -의 외양을 갖춘다. 244쪽


신체가 기계의 다양한 부품처럼 각 부분으로 조직되는 것이다. 신체뿐만 아니다. 시간조차도 조립된 기계의 한 부품처럼 취급된다.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서 각 신체의 시간들이 서로 맞도록 조정한다. 개인의 분업은 완성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과정을 지배한다는 말이다. 산업의 생산라인이 그 예가 된다. 부르주아지들은그 과정을 감시와 규율로 통제하고 지배하면서 그에 맞지않는 부품(신체)을 골라낸다. 솎아진 노동자들은 서열의 아래, 피라미드의 바닥이나 독방으로 보내진다. 산업혁명의 기계화 패러다임은 신체를 기계화하고 말았다. 위계, 서열, 계열, 총체, 도표화의 방법으로 한 인간이 공장의 자동기계가 되어 권력자의 명령체계대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푸코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부분이 <감시와 처벌>을 잘 설명해주는 것 같다.


그것은 (공간배분의 작용에 의해서) 독방 중심적이고, (활동의 규범화에 의해서) 유기적이며, (시간의 축적에 의해서는) 생성적이며, (여러가지 힘을 조립하는 점으로는) 결합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그 목적으로 규율은 네 가지 중요한 기술을 사용한다. 첫째 일람표를 작성하고, 둘째 작전을 세우고, 셋째 훈련을 시키며, 넷째 힘의 조합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전술’을 꾸민다. 263쪽


신체형은 법의 개혁을 거치고 산업화 시대를 맞아 처벌에서 교정의 목적이 더 두드러진다.

규율 중심적 체계가 특히 중시하는 것은 훈련 –강화되고 다양화되고 여러 차례 되풀이되는 습득 -의 차원에 속하는 처벌이다. ~~ 벌로 시키는 숙제는 모든 벌 중에서도 교사에게는 가장 온당하고, 부모에게는 아주 유익하고 만족스러운 벌이며, 그 덕분에 “아이들의 과오를 통해 결점을 고치며 발견할 수 있는 수단을 이끌어”내게된다. 예를 들면 “써야 할 모든 것을 쓰지 않았거나, 열심히 쓰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필기 혹은 암기숙제를 부과할 수있을 것이다.” 283쪽 (<기독교 학교의 운영> J.B. de la Sale, 1828, 204-205면 재인용)


푸코는 이것을 규율에서의 처벌이 규칙위반의 보복보다는 규칙준수의 반복과 배가된 강요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현실화시키는 방법이 바로 ‘시험’이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시험’의 개념을 푸코는 이렇게 설명한다.

시험은 규격화하는 시선이고, 자격을 부여하고 분류하고 처벌할 수 있는 감시이다. ~ 개개인을 분류할 수 있고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가시성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 시험에는 권력의 의식과 경험의 형식, 힘의 과시와 진실의 확립이 결합되어 있다. ~~ 권력의 관계와 지식의 관련이 중첩되는 현상은 시험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난다. 289쪽


푸코가 예로 든 것은 학교와 병원이다.

1661년에 파리 시립병원의 의사는 매일 1회 회진을 책임지게 되었고, 1771년에는 주재 의사가 지명되고, ‘간호원’이라는 직종이 생겨났다. 병원과 학교에 대한 푸코의 서술을 계속 살펴보자.

의학적인 규율은 본래적인 성격을 버리고, 결정적인 판정가들의 전통에 의존하여 관련된 사항을 이해하기 보다 환자를 끊임없이 검사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취할 수 있게 된다.291쪽


시험이란 것은 어떤 지식을 습득을 평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평가의 기본적인 요소로서 끊임없이 재가동되는 권력의 의식에 따라 권력의 기반이 된다. ~~

병원에서의 검사의 방식이 의학의 인식론적 해방을 가능하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시험 중심적인’ 학교의 시대는 학문으로서 기능하는 교육학의 발단을 의미하게 되었다. ~~

시험은 권력행사의 일정한 형태와 지식 형성의 일정한 형식을 연결짓는 구조를갖는다. 292쪽


오늘날 우리는 끝이 없는 ‘시험’과 강제적인 ‘객체화’의 시대에 살고있다. 피라미드 형태의 위아래로 나뉘어진 분류에서 내가 속하고자 하는 부분에 도달하려고 끊임없는 시험을 자처한다. 권력자는 민중을 시험에 초대하지 않는다. 장치만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민중 스스로가 시험에 덤벼든다. 그런데 시험은 기록과 서류보관의 쳬계속에 있다. 사람이 기록과 서류로 존재하게 되고 분류되어 보관된다.

기록된다는 것은, 과거에는 주목받고, 관찰되고, 상세하게 이야기되고, 보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명예였고 특권이었다.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규율’의 방식은 이러한 것을 뒤집어놨다. 훈련 성적과 시험점수 등 개인에 대한 기록이 통제수단이나 지배방법이 되었다.

조상과 혈통 중심적인 것이 규범적인 것으로 대체되고, 비교 측정이 지위 신분을 대신하며, 역사적으로 기억할만한 인간의 개인성 대신에 계량 가능한 인간의 개인성이 자리잡은 시기, 인간을 대상으로 한 과학이 존립 가능하게 된 시기, 이러한 시기가 바로 권력의 새로운 기술과 신체에 관한 또 다른 정치적 해부학이 적용된 시기이다. 301쪽


규율 체계가 이뤄진 이후 ‘감시’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때 <판옵티콘>이 등장한다. 감시사회가 된 것이다. 현대사회는 결국 감시사회이다. 판옵티콘은 그리스어 ‘pan 모두’와‘opticon 본다’의 합성어이다. 1791년 철학자 제러미 벤덤이 죄수를 감시하기 위해 설계한 감옥의 이름이다.

중앙의 감시탑은 어둡고,죄수들의 방은 밝게 해서 감시자는 죄수들을 볼 수 있으나 죄수들은 감시자를 볼 수 없는 구조다. 감시자를 볼 수 없다는 것은 감시자가 없을 때 없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여기고 행동하는데, 결국은 감시를 당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자신을 감시하는 상황에 이른다.


판옵티콘의 감시형태는 감옥 뿐이 아니다. 이 책에서 푸코가 예를 든 것은 17세기 페스트의 발생이다. 나병과 페스트에 대한 조치를 비교하는데 푸코는 나병이 낙인찍히는 것이라면 페스트는 분석되고  배치되는 것이라고 한다. 나병환자의 추방은 공동의 꿈이고, 페스트환자의 격리는 규율이 확립된 사회의 꿈이라는 것이다.

폐쇄되고, 세분되고, 모든 면에서 감시받는 이 공간에서 개인들은 고정된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아무리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통제되며, ~~ 개인은 줄곧 기록되고 검사되며, 생존자, 병자, 사망자로 구별된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규율장치의 충실한 모형을 이룬다. 페스트라는 전염병에 대응하는 방법이 질서이고, 질서는 모든 혼란을 정리해 주는 기능을 갖는다. 306쪽


모두가 추방과 격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푸코의 시선은 다른 곳에 머문다.

순수한 이론에 의거하여 법과 법률을 운용하기 위해서 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자연상태에 있다고 가정했던 반면, 통치자들은 완벽한 규율을 가동시키기 위하여 페스트의 상태를 꿈꾸어 보았다. 페스트라는 이미지는 모든 혼란과 무질서에 상응하는 것이다. 일체의 접촉을 끊어야 한다는 나병의 이미지가 추방의 도식에서 바탕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308쪽


판옵티콘의 ‘바라봄(감시함)’과 ‘보임(감시당함)’의 차이는 권력자들에게 중요한 장치이다. 감시자가 노출되지 않아 피감시자가 자기감시를 하게되는 판옵티콘은 19세기 권력을 위한 기술의 최고봉이었다.

죄수를 교화하는 효과뿐 아니라, 병자를 간호하고 학생을 교육하며, 광인을 가두고, 노동자를 감시하거나, 걸인이나 빈둥거리며 태만한 자를 일하게 만드는 효과를 거둔다. 318쪽

판옵티콘의 도식은 어떤 권력기관이라도 힘을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즉, 그 도식은 권력의 경제성(물적, 인적, 시간적)을 확보해준다. 또한 그것의 방어적 성격이나 지속적 기능, 그리고 자동적인 메커니즘에 의해서 권력의 효력을 확보해준다. ~ 그것은 권력을 획득하는 방식이고, “거대한 새로운 통치수단”이며, 그것의 탁월성은 적용되는 모든 제도에 큰 힘을 부여할 수 있는 데에 있다. 319쪽(<벤담 저작집> 65면 재인용) 


푸코는 정점에 이른 판옵티콘에 대해 경고를 한다. 일반인 누구나 다 판옵티콘 감옥에 수감된 죄수처럼 감시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광체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는 권력 대신에 권력이 적용되는 대상을 교묘한 방식으로 객체화하는 그러한 권력이 들어선 것이다.  338쪽


4부 감옥

우리들이 인식하는 감옥의 개념은 무엇인가? 단순하다. 잘못한 사람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벌주고 교화시키는 곳이다. <감시와 처벌>의 저자 미셀 푸코는 이 책의 부제를 ‘감옥의 역사”로 명시했다. 푸코는 ‘감옥’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조사하고 인용한다.


감옥은 수감자에 대해 거의 전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억압과 형벌의 내적 구조를 갖는다. 358쪽

법죄자를 “체념적이고 유익한 활동”에 맞도록 훈련하고, 그에게 ‘사교성의 습관’을 회복시켜 준다. 362쪽 (<감옥개혁에 관한 내무장관 앞으로의 보고서>de Gasparin 재인용)

범죄자를 감옥에 집어넣은후에 그의 상태를 회복시키도록 그를 붙잡아서, 타락의 마지막 단계에서 빠져들 수 있는 그 무위도식의 악습으로부터 그가 벗어날 때이다. 364쪽 (<범죄소송범전의 근거> G.A. Real 재인용)


푸코는 수감자들의 노동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데 그 ‘노동’이 감옥의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형벌로서의 노동은 수감자들을 하나의 부품으로 변모시키는 기계장치라고 한다.

감옥은 작업장이 아니라, 기계이며, 그 안에서 수감자 노동자는 톱니장치임과 동시에 생산물이 되어야 한다. ~~

노동은 근대적 민중들에 대한 신의 섭리이며, 그들에 대해 도덕의 역할을 하고, 신앙의 간격을 채우고 모든 선의 원리로 간주된다. 노동은 감옥의 종교여야 했다. 기계로서의 사회에서는 순수하게 기계적인 교정수단들이 필요했다. 368쪽 (<감옥의 개혁에 관해서>L. Faucher, 1838. 64면 재인용) 


이 책을 읽다보면 감옥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교정시설의 단순함을 넘어선다. 감시, 감시를 위한 건축과 광학의 방법, 의학적, 종교적으로 수감자의 신체와 정신까지 개입하는 모든 ‘통제의 기능’ 집합체이다.

법정과 감옥은 그 체계가 서로 다르다. 법정은 법을 위반한 범죄자에게 형량을 치르도록 하고 형량을 다 치르면 죗값을 다 치렀다고 한다. 정해진 형량 안에서 범죄자를 교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감옥은 비행의 교정을 통해서만 속죄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범죄자’와 ‘비행자’가 구별된다. 비행자들은 감옥 안에서 치료받게 된다. 그렇다면 감옥은 어떤 곳인가.

감옥, 사법기구 안에서 가장 어두운 그 세계는 더 이상 감히 드러내놓고 행사될 수 없는 처벌의 권력이 객관성의 영역 –거기에서는 형벌이 공공연하게 치료법으로 기능할 수 있고, 판결이 지식의 담론 속에 포함될 수 있는데 –을 은밀하게 조직하는 장소이다. 391쪽


우리 사회에서는 감옥이 필요하고 여러가지 많은 폐단 속에서도 감옥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가 존속하는 한 범죄는 꾸준히 발생하고, 범죄자를 심판하고 벌 줄 기구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범죄자는 어떻게 생기는가. 범죄자는 왜 범죄자가 되는가. 푸코는 타르제가 범죄자를 정의한 “타락한 종족”을 인용한다.

‘타락한 종족’, “역경을 타파하려는 어떤 고결한 의도에 대해서도 타파할 수 없는 장애가 되는 빈곤 때문에 타락한 그러한 계급”에 속해있다는 사실에서 범죄가 생겨난다. 420쪽 (<영국과 프랑스에서 노동자 계급의 빈곤에 관해서> E. Bure 1840, wp2권 391면 재인용)

흔히 가난한 계층들은 일차적 희생물인 폭력 범죄행위에 빠지기 마련이고, 어디에서건 경찰의 포위망에 둘러싸이고, 오랜 감옥형과 그후의 결정적으로 ‘특정화된 생활’, 즉 다른 세계의 비행에 노출되기 쉽다. 424쪽


그렇다면 교정기관인 감옥은 범죄자들을 교화했는가? 비행자들을 교정했는가?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감옥은 비행자들을 관리함과 동시에 불법을 경영하는 기관이 된다.

비행자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 –정보원, 밀고자, 선도자의 형태로 –은 19세기 이전부터 당연시 되어온 일이었다. ~대혁명 이후에는 그 관행이 전혀 다른 규모로 이뤄졌다. 이를테면 정당과 노동조합에 조직원의 침투, 동맹파업자들과 폭도들에 대항할 폭력배 모집, 경찰보조대의 조직화 등 권력의 모든 불법적 기능은 범죄자들로 구성된 기동부대, 말하자면 권력에 예속된 비밀경찰 겸 예비군에 의해 부분적으로 보장되어 있다.426쪽 (<루이 나폴레옹의 서리월 18일> K. Marx, 1969, 67-68면 재인용)


푸코는 감옥이 비행자들을 제조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범죄자와 감옥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며 <감시와 처벌>은 끝나게 된다. 

감옥이 비행에 제재를 가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비행은 본질적으로 감옥이 결국 이끌어가기 마련인 수감생활에 의해서, 수감생활 속에서 만들어진다. 456쪽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 -감옥의 역사>는 1975년에 초판 출간된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94년에 번역 출판되었다. 책 내용은 1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300여년의 시간을 분석했다. 300년이라면 여러 세대에 걸친 긴 시간인데 마치 오늘날의 시대상을 묘사한 듯 현대와 닮아있다.


리뷰 글 머리에 쓴 것처럼 현대인들은 거의 완벽한 판옵티콘의 감옥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저항을 제시했지만 이런 체계가 관성화된 사회에서 저항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저항은 커녕 이 책에서 언급한 “기계의 톱니바퀴”, “자동 인형”이 되고자 노력한다. 그 체계 속에 들지 못하면, 규율의 범주를 벗어나면 홀로 딴 세상에 내쳐지는 것 같은 불안을 느끼기까지 한다.


푸코는 <감시와처벌>에서 사회 구조를 분석하므로써  ‘저항’을 암시했지만 어떤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회상은 누가 제시할 것인가, 새로운 그 길을 누가 걷기 시작할 것인가? 이것은 푸코가 폭로한 <감시와 처벌-감옥의 역사>를 읽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푸코가 역설한 “영원히 계속되는 전투”인 권력과 역사를 세밀히 들여다보고 ‘전투’에 뛰어들 고민이 독자들 가슴에 무겁게 들어앉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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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일 책을 읽고 리뷰를 썼다. 단 한 번도 문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당연히 대중교통을 이용한 흔적이 없고, 신용카드를 사용한 흔적도 없다. 엘리베이터와 로비의 CCTV에 찍히지 않았다. 손전화기의 위치추적은 우리집을 가리킨다. 감시체계의 기록에 의하면 나는 “집에 있는” 사람이 된다.

수도계량기, 가스계량기가 모두 집 현관 안에 설치되어 있고, 냉장고 냉동고는 나의 생존과 상관없이 고정적으로 전기를 소비하며 계량기를 움직이고 있으니 나의 ‘생존 흔적’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생존 흔적이 없는 나는 “집에 없는” 사람이 된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고, 감시의 결과로, 기록으로 존재하는 세상에 내가 살고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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