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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May 03. 2021

묵은 책 읽기 <위대한 개츠비>

독서감상문

한 십 여년 전부터는 새로 산 책을 읽는 대로 바로바로 나눔과 기증을 해왔다. 묵은 책들은 받는 이에게는 헌책이요, 나에게는 정이 많이 든 책이라 떠나보내지 못하고 붙잡아 두고 있다. 여러 번의 이사와 살림정리에도 살아남은 책들이 아직도 내곁을 지키고 있다. 제법 많은 양의 책들이다.

요즘은 가치 있고, 이 시대에 맞는 이슈이고, 필독서 느낌이 드는 책들의 유혹을 떨쳐버리느라 애쓴다. 새책 구매를 멈추는 대신 묵은 책 읽기에 마음을 쏟고 있다. 구매할 때는 최고의 선택이었지만 헌책이 되어 세월 속에 파묻힌 책들을 다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독후감, 독서감상문

<위대한 개츠비> 스콧 피츠제랄드 저, 김욱동 역, 민음사. 2003.


<위대한 개츠비>는 20대에 영화로 먼저 만났다. 로버트 레드포드를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개츠비"를 만난 것이 아니라 "로버트 레드포드"를 만났다. 그의 미소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고, 쓸쓸한 그의 분위기가 멋있었고, 총맞고 수영장에 빠지는 장면은 수십년을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30대 나이에 접어든 후에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아닌 개츠비를 책에서 만났다. "그래, 사랑은 바로 이렇게 하는 거야!" 개츠비의 데이지에 대한 사랑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지! 이게 바로 사랑이지!" 오직 사랑밖에 모르는 개츠비가 참 멋있는 남자로 보였다. 피츠제랄드의 멋진 문장에 자주 눈이 번쩍 뜨였다.


<위대한 개츠비>는 나레이터 닉 캐러웨이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1920년대 미국이 호황을 누리던 시대를 그린 소설이다.

1922년 여름, 예일대학 출신  닉은 채권사업을 배우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한다. 롱 아일랜드의 서부 West Egg에 있는 개츠비의 옆집에 자리를 잡는다.

개츠비는 바다 건너편(만의 반대편으로 거리는 멀지 않다)의 초록색 불빛을 자주 바라본다. 그 쪽 East Egg에는 개츠비의 연인이었던 데이지의 집이 있고, 초록색 불빛은 그 집의 선착장 불빛이다.  개츠비는 매주 화려한 파티를 열고 많은 뉴요커들이 파티에 몰려든다. 혹시라도 데이지가 파티에 오지않을까 하는 기대로 여는 파티다.  파티에 온 사람들은 개츠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살인을 했다는 말도 있고, 밀주 제조로 돈을 벌었다는 말, 옥스포드 대학 출신이라는 말, 독일 왕가의 후손이라는 말...

닉은 데이지의 사촌이다. 닉의 주선으로 개츠비는 드디어 닉의 집에서 데이지를 만나게 되고 개츠비의 집에 간다. 데이지와 개츠비가 헤어진 지 5년만에 이루어진 만남이다. 이후로 둘은 연인관계를 이어간다.

데이지의 남편 톰 뷰캐넌은  모든 사실을 알게되고, 어느 날 한 자리에 모여 톰과 개츠비가 한바탕 싸움을 벌인다. 그 자리에 있던 데이지와 개츠비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동차 사고로 톰의 정부인 머틀(윌슨 부인)을 죽인다. 톰은 개츠비에게 그 사건을 뒤집어 씌우고 화가 난 윌슨(머틀 남편)은 개츠비를 총으로 쏴죽이고 자신도 권총자살한다. 그러나 정작 차를 운전한 사람은 데이지였다.

데이지는 톰이 이끄는 대로 톰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개츠비의 장례식에는 조화조차 보내지 않았다. 매주 파티에 몰려와 광란의 시간을 보냈던 많은 사람들도 장례식은 모르는 척했다.


처음에 영화를 봤을 때와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세상에 그리 밝지 못했다. 1920년대 미국이 어땠는지 관심도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다. 이 책은 1차대전이 끝난 후 졸부들이 활개를 치던 미국사회를 배경으로 리얼한 시대상을 그렸지만 시대적 배경에 무지했던 나는 '사랑'에만 집중했다. 피츠제랄드가 그 시대에 무슨 메세지를 전하고자 이 책을 썼느냐보다는 개츠비의 뜨거운 사랑과 데이지의 차가운 배신이 더 크게 다가왔다.


유럽에 거주할 때 주말이면 벼룩시장 구경을 자주 했다. 그곳에서 커다란 나팔관을 매달고 있는 옛날 축음기를 발견하면 발길이 멈춰졌다. 재즈음이 흘러나왔고, 개츠비의 파티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건너편 동네의 초록색 불빛을 바라보는 개츠비의 쓸쓸한 뒷모습이 떠올랐다. 신기한 일이다. 옛날 축음기를 보는 순간 개츠비가 떠오르다니.

유럽에 머물던 동안 많은 미술관들을 돌아다녔고, 그림에 관한 관심이 깊어졌다. 미술책들을 모았고, 인터넷에서도 명화를 찾아보았다. 미술관에서 직접 보지 못한 그림들을 수시로 찾아보면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자주 접하게 되었다. 이 역시 신기한 연상작용으로 호퍼의 그림을 보고있으면 개츠비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왁자지껄한 파티장, 주말의 밤이 깊어갈수록 광란으로 치닫는 그 파티장에서 더욱 쓸쓸한 개츠비의 모습이 눈에 아른 거리곤 했다. 1920년대, 미국의 재즈시대를 조금씩 알아가던 시기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나는 개츠비의 고독을 느끼곤 했다.


우리나라 민음사에서 번역 출간된 <위대한 개츠비>의 표지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올라왔다. 개츠비와 호퍼를 함께 느끼는 감정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모양이다.


왼쪽- Edward Hopper - Automat. 1927. oil on canvas. 71.4 X 91,4Cm. Des Moines Art Center/Iowa


요즘 다시 읽은 <위대한 개츠비>는 수십년 전 나의 감상을 완전히 짓뭉개버렸다.

책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내 생각의 방향이 달라진 것일 게다. 사랑에 감탄하고 배신에 흥분하던, “그래, 이런 것이 바로 사랑이지!”하면서 감화감동하던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내 젊은 날들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파묻혀 버린 흙무더기 위에 시대를 비판하는 내가 서있다. 사랑에 눈먼 내가 아닌, 시대를 들여다 보는 눈을 키운 내가 서있다.


책에는 군인 개츠비와 상류사회 여성으로 만난 데이지가 개츠비의 군이동으로 헤어지면서 미래를 약속한 서술이 없다.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돌아왔으나 데이지는 개츠비를 배신하고 이미 톰 뷰캐넌의 아내가 되어있었다?  

데이지의 배신은 톰과의 결혼이라기 보다는 재회후 교통사고를 낸 데이지가 자신이 운전했다는 것을 밝히지 않은 것이 더 큰 배신이다. 개츠비가 살인죄를 뒤집어 쓰는데도 톰과 함께 여행을 떠나며 그 상황을 모면한 것이 더욱 더 큰 배신이다. 저자 피츠제랄드는 데이지를 배신자로 그리며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던 미국 사회를 비판한 것 같다.


전쟁이 끝난 후 주가 폭등으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은 품위있는 건강한 부자들보다는 졸부들이 많았다. 그들은 향락을 위해 쉽게 번 재산을 펑펑 썼다. 축재를 위해 온갖 불법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개츠비의 사랑은 지조있고 아름답다? 그것은 표면일 뿐, 사실은 개츠비도 선악과 정의 불의를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았다. 오히려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의 선봉에 선 사람이다. 그의 목표는 실컷 누리고싶은 향락 때문은 아니었다. 연인 데이지를 곁으로 데려오기 위한 목적이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시킬 수 없다는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옳은 말이다. 그렇다면 개츠비의 목적은 아름다운 사랑이 아닌 것이다. "데이지"라는 애인은 자신의 불타는 야심일 뿐이었다.

다시 만난 데이지가 살짝 옛 사랑에 빠지며 개츠비에게 "우리 이대로 도망가자"고 한다. 개츠비는 놀란다. 너를 데려오려고 이 모든 것을 갖추었는데, 이것을 다 버리고 도망가자고? 이것이 개츠비의 큰 잘못이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평생을 공들여(개츠비는 5년동안) 쌓아둔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있어야 한다. 홀연히 떠날 수 있을 때 데이지의 손을 잡고 맨몸뚱이만 빠져나와서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해야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나중엔 함께 떠나려고 했으나 데이지의 마음이 먼저 떠났고, 개츠비는 총에 맞았다.


우리나라도 지역간에 경제 문화 사회적으로 편차가 있고, 어느 나라든 그런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지역을 구분하고 있다. East Egg, West Egg의 부자들은 뉴욕 나들이를 자주 하는데 그 중간 지점에 '재의 골짜기(The Valley of Ashes)'를 두었다. 그곳에 윌슨부부가 살며 윌슨은 자동차 정비를 하고, 그의 부인 머틀은 톰의 정부 역할을 한다. 가난한 지역 주민들의 삶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저자가 의도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여기서 가치 체계가 균형을 잃은 미국의 1920년대 모습을 보았다.

롱 아이랜드 사람들이 모두 부자지만 이스트 에그에는 기존의 부자들을, 웨스트 에그에는 신흥 부자들을 배치했다.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고개를 든다. 사회 계층을 분류하고 분리하는 현실이 그 시대와 똑같다. 재의 골자끼를 유부남의 정부가 사는 동네, 그 정부가 차에 치어 죽는 장소로 그린 것이 씁쓸하다.


처음 부분에는 남편이 바람피는 것을 그냥 넘겨주는 데이지가 불쌍해보였었다. 그러나 데이지는 다른 선택을 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남편 톰이 지닌 부(富)의 무게가 크기 때문일까? 톰의 부도덕은 한 가정에서 끝나지 않고 결국은 여러 사람의 죽음을 불러왔다. 윌슨 부부와 개츠비가 죽었다. 비단 톰의 부도덕 탓만은 아니다. 데이지도 톰과 다르지 않다. 부도덕을 넘어 불법을, 과실이지만 살인까지 저지른 부자들의 처신에 화가 치솟다가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버린다. 개츠비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고 현실을 외면한 채 여행을 떠나는 톰과 데이지의 행동이라니!


화려한 파티는 끝났다. 개츠비는 죽고 데이지는 떠났다. 닉은 그 동네에 환멸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간다. 나레이터가 손뗀 스토리는 끝난다.

부나방들은 반짝이는 불빛에 모여들지만, 불빛이 사그라들면 모두 떠난다. 전쟁이 끝나고 활발한 경제활동으로 부는 부풀어오르고, 그것은 팽창되다가 빵 터져버린다. 소설 속 닉 케러웨이가 채권을 배우기 위해 동부로 이사오던 때 무섭게 치솟던 주가는 소설 속에서는 폭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 밖에서는 1929년부터 땅바닥에 떨어진 주가의 추락으로 대공황이 시작되어 10년간 춥고 어두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개츠비의 꿈과 희망이 죽음으로 끝난 이후, 소설 밖 세상은 서서히 내리막길의 턱을 넘어가고 있었다.

소설 속 개츠비의 시대, 미국의 재즈시대 후에 대공황이 미국사회를 뒤덮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다시 고쳐 쓸 수 없는 이 역사적 사실까지 끄집어 내고 이 책 읽기가 끝났다.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는 위대하지 않다. 불빛 아래의 그림자를, 사회의 이면에 렌즈를 들이댄 스콧 피츠제랄드는 위대하다.




묵은 책을 다시 읽으며 오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많이 변한 나를  발견한다. 시대를 건너 뛰며 나의 시각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결국, 묵은 책을 다시 읽는것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읽는 것이다!


끝.

다음엔 <위대한 개츠비> 리뷰, 서평을 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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