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선운사 여행기
4월초 조카의 결혼식이 있어 부산에 갔다. 며칠간 섬여행의 계획도 있었다. 예상보다 짧게 끝난 섬여행 끝에 장수에 있는 지인의 농장에 들러 두릅과 머위로 입호강을 하고, 목포를 거쳐 선운사에 들렀다.
선운사는 처음 가봤다. 1994년 우리가 독일로 갈 때 가져간 송창식 CD에 "선운사" 노래가 들어있다. 그때 중1이던 막내는 그 노래를 참 좋아했다. 송창식과 윤형주가 짝을 이룬 트윈폴리오 시절부터 내가 빠져있었던 송창식을 막내아들도 좋아했다. 가족 모임이 있을 때 노래부를 차례가 오면 거의 매번 송창식의 "담배가게 아가씨"를 신나게 부르는 막내아들이다.
어느 땐가 우리가 선운사에 가볼까 말을 꺼냈을 때, 막내는 싫다고 했다. 그때는 동백꽃 필 때가 아니었는데 자기는 나중에 가장 좋은 시절에 갈 것이라고 했다. "선운사" 노래를 들으며 그려왔던 선운사 모습이 실제와 다르면 너무나 실망할 것 같다고. 막내가 대학생이 되어서 옮겨간 런던 집 정원에 동백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동백꽃이 빨갛게 피었을 때 우리는 역시 또 송창식의 "선운사"를 거듭거듭 들었고, 언젠가 선운사에 가자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이번 봄에 그 선운사에 드디어 갔다. 막내 아들은 빼놓고 우리 부부만 갔다. 아쉽게도 이미 동백꽃은 끝물인 시기에. 꽃무릇은 아직 철이 아닌 때에.
선운사 - 송창식 작사, 작곡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 날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떨어지는 꽃 송이가 내 마음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에요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 송이가
내 마음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에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눈물처럼 동백쏯 지는 그곳 말이에요.
송창식의 노래 "선운사"는 미당 서정주의 시 "선운사 동구"에 대한 오마주이다.
송창식이 노래로 만든 미당의 시 첫 곡은 "푸르른 날"이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로 시작되는 노래. 미당은 이 노래를 듣고 대만족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가 1975년. 그후 10여년이 지난 후에 송창식은 미당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의 시 "선운사 동구"를 오마주한 헌정곡 "선운사"를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타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로 개명한 서정주, 친일 행각은 차치하고, 그의 시는 아름답고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좋아하던 작가 좋아하는 작품이 정치 사회적인 이념 때문에, 시대가 용납할 수 없는 반국가적 언행 때문에 사장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다. 이건 옹호의 변명이 아닌, 단순히 작품에 대한 감정일 뿐이다.
('동구洞口'는 동네 어귀, 절로 들어가는 산문山門의 어귀이다.)
선운사는 557년(백제 위덕왕)에 검단선사가 창건하고, 1318년(고려 충숙왕)에 효정선사가 중수했으나 고려 말 왜구들의 침탈로 큰 해를 입었다. 1472년(조선 성종)에 행호선사가 폐사지에 있는 9층석탑을 보고 중창을 이루었다. 그후 1613년(광해군)에 무장현감 송석조宋碩祚(1565-1637)가 원준대사와 함께 재건했다.
선운사가 위치한 도솔산 계곡은 동학농민군들이 우금치에서 패하고 후퇴하여 모여든 곳이다. 동학농민군들은 이곳에서 최후를 마쳤다. 선운사 여행기를 쓰며 나와 얽힌 인연들을 다시 들춰보게 된다. '동학'은 옆지기의 대학 졸업논문 주제로 연구한 것이고, 우금치는 내가 청소년기를 보낸 곳에 있다. '선운사'는 좋아하는 송창식의 노래이고. 그래서인지 글에 더욱 정성이 들어간다. 독자에게 전달이 잘 될지...
나의 설명보다 더 정확하고 자세한 내용은 안내문과 사전을 인용하기로 한다.
일주문
사찰에 들어서는 산문(山門) 중 첫 번째 문을 지칭하는 용어.
사찰에 들어가는 첫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건축양식은 주로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 문에 많은 현판(懸板)들을 걸어 사찰의 격(格)을 나타내기도 한다. [출처: 일주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판 글씨는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2006)의 글씨. 관지에 '壬子 孟冬 임자 맹동'이라 쓰여있다. 김충현의 생존기간을 참고하면 현판은 1972년(임자년) 음력 10월에 쓴 것이다.
백파율사 비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삼나무 숲 안쪽에 부도밭이 있다. 대부분의 사찰에서 부도밭은 사찰 마당에 이르기 전에 위치한다. 부도밭은 그 절을 이끌었던 고승들을 기리는 비석과 부도가 모여있는 곳이다. 선운사 부도밭에 들어서서 왼쪽 큰 바위 앞에 ‘백파율사 비’가 서있다. 비문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선운사의 백파(긍선 白坡亘璇1767-1852)는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쓰고 그 책을 통해 전통적인 선 수행을 설파했다. 한편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의순 意恂草衣 1786-1866)는 백파의 선문에 반대되는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통해 전통적인 선 수행 방법의 개혁을 주장했다. 초의선사의 친구인 추사(김정희1786~1856)가 선문논쟁에 끼어들었다. 백파와 추사는 서로 상대방을 무시하고 비방했다. 이렇게 시작된 선문논쟁은 100여년간 이어졌다. 그러나 백파가 입적한 후 추사는 백파와 화해하고 극진히 예를 갖추어 묘비를 썼다.
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
"대기대용大機大用"은 백파가 평소에 펼치던 지론을 요약한 것이다.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미당 서정주가 백파와 추사의 관계를 그냥 넘기지 않고 시를 한 수 남겼다. 미당과 선운사의 인연은 깊다. 1974년 <시문학> 7월호에 <추사秋史와 백파白坡와 석전石顚>라는 산문시를 발표한 것이다.
백파와 추사의 논쟁처럼, 서로의 논지를 주장할 때는 가장 치열하게, 그러나 논쟁을 떠난 본연의 인간은 존중해주는 그런 멋진 사람들이 그립다. 그런 관계는 옛날 이야기에서나 있는 것일까? 인신공격성 언쟁이 아닌 품격있는 논쟁으로 함께 발전해나가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실현 가능한 것일까......
마애여래좌상
마애여래는 70미터의 큰 바위벽에 새겨졌다. 검단선사가 도술로 새겼다고 전해진다. 전설에는 마애여래 배꼽속에 새 세상을 만들 놀라운 비결을 숨겨놓았다는 것이다. 이 비결이 세상에 나오면 한양이 무너지고 천지가 개벽한다, 그러나 비결을 꺼내는 순간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전설이다.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1754-1825)가 비결을 꺼내는데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여 그대로 집어넣고 회로 봉했다는 이야기도 붙어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2년 전(1892) 최대 동학 조직을 가지고 있던 손화중孫華仲(1861-1895)이 비결을 꺼냈다고 한다. 이서구가 시도했을 때 이미 벼락살이 없어져서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이 소문이 퍼져 손화중에게 새로운 교도 수 만명이 몰려들었다. 주저하던 농민들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확신을 갖고 동학교단으로 몰려들어 농민전쟁의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나 동학농민혁명과 직접 관련있다는 근거는 없다.
일주문을 지나 부도밭을 둘러보고 전각들이 펼쳐진 마당으로 간다. 만세루가 마당 한 가운데, 그 맞은 편에 대웅전이 서있고, 만세루와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전각들이 펼쳐져 있다. 산속의 평지에 건립했다. 지붕의 형태가 모두 맞배지붕으로 형성되어 단아한 멋이 있다.
선운사 만세루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가람 안에 여기저기 연등을 달아놨다. 등의 모양이 연꽃이라 연등蓮燈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은데 연등은 불탈 연燃자를 사용하여 연등燃燈이라고 표기한다. 연등은 무명을 깨치는 등불을 밝힌다는 상징이다.
만세루, 다시 문학이다. 이번에는 시가 아니라 소설. 윤대녕의 단편소설 <상춘곡>은 윤대녕이 선운사에서 미당 서정주를 만남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윤대녕은 선운사 앞 '동백장'에 머물며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우연히 동백장 식당에서 미당을 만나 '만세루'의 전설을 듣고, 소설이 술술 풀려나갔다. 버려지고 쓸모없는 나무들로 지어진 '만세루'가 소설의 기둥이 되었다. 송창식의 <선운사>가 미당에 대한 오마주인 것처럼 윤대녕의 <상춘곡> 역시 미당에 대한 오마주이다.
만세루는 부처님 진리가 만세가 되도록 오래 간다는 뜻이다. 정유재란(1597-1598) 후 중건한 것이다. 건축물로서 특이한 점은 나무 자재이다. 기둥에서부터 서까래에 이르기까지 성한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다 토막나고 휘어진 것을 사용했다. 길이가 짧은 나무는 꺾쇠로 연결하여 썼다. 다른 법당들을 짓고 남은 자투리 조각으로 진 것이다. 모서리 기둥은 자연목을 껍질만 벗기고 그대로 사용했다. 이렇게 불규칙한 재료를 사용한 것은 목재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앞면 9칸, 옆면 2칸의 넓은 평면에 비해 높이가 낮은 형식으로 지은 것도 제대로 된 목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세루 앞에서 자투리 목재의 의미를 다시 새겨본다. 아무리 보잘것 없는 자투리 나무토막일지라도 훌륭한 건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못난 중생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어찌 생겼든 존재의 가치가 있고, 존재의 역할이 있다는 것으로 생각의 방향을 잡으면 선운사 만세루는 큰 교훈이 될 것이다. 요즘 자긍심을 가지라는 말이 유행인데, 바르지 못한 목재로 지은 만세루는 우리의 자긍심을 키워주는 전각이다.
만세루의 단청은 선이나 무늬를 그리지 않고 바탕색만 칠했다. 뇌록색(잿빛을 띤 녹색)과 석간주(붉은 흙) 두 가지로만 칠했다. 구불구불한 목재에는 이렇게 단순한 채색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대웅보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정유재란 때 왜병들의 방화로 불에 타 광해군 때 다시 지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큰 법당이다. 맞배지붕 형식과 기둥의 간격이 넓어 안정적 느낌이다. 맞배지붕은 지붕선이 일자로 반듯하여 날아갈듯한 팔작지붕보다 안정적으로 보인다.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으로 마감하였다.
비로전, 화엄전의 경우엔 비로자나 부처님만을 모시고 있다.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모실 경우엔 주로 대광명전, 대적광전이라 부른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양옆에 협시보살을 함께 모실 때 협시보살이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이면 '대웅전'이라고 하고, 아미타부처님이나 약사여래를 협시보살로 모시면 '대웅보전'이라고 한다. 선운사는 비로자나불, 아미타여래불, 약사여래, 이렇게 삼존불을 모신 법당이기 때문에 '대웅보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웅전은 사찰에서 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불교건축물이다. 격을 높일 경우 대웅보전이라고도 하며 항상 사찰의 중심에 위치하는데 ‘대웅’은 석가모니의 별호이다.
대웅전에는 대체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협시보살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두는데, 대웅보전이라 할 때는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모시기도 하고 삼신불·삼세불을 봉안하기도 한다. 중심에 불상을 안치하는 불단을 수미단이라 하며, 불단 주변은 화문(花文)과 비천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주불 위에는 닫집을 두며, 석가모니불 뒤에는 영산회상도 등 많은 불화들이 봉안된다. [출처-대웅전,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 관음봉, 석가봉 등 불교적인 이름이 달린(일부) 금강산 일만이천봉(누가 세어봤을까?)에서 으뜸으로 높은 봉이 비로봉이다. 비로자나불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비로자나불은 태양의 광대함에 견주어 세상 모든 곳에 광명을 비춘다는 뜻이다. 때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나타나는 모습은 다 다르게 보인다. 바로 내가 만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하느님이 성전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나 있다고, 그의 가르침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마음 속에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참 진리가 어찌 다르겠는가. 비로자나 부처님도 맑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의심하지 않으면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미혹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보이는 부처님이다. 신앙의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형상화한 이미지를 알아본다. <금강정경>에는 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을 이렇게 기록한다. 두 손을 가슴 앞으로 올려 왼손의 둘째 손가락과 오른손이 만나는 형상(위 사진에 있는 모습), 또는 무릎 위에 두 손을 겹친 모습이다. 오른 손은 불계를, 왼손은 중생계를 상징하는데 이는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의미라고 한다.
비로자나불 신앙은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며 크게 번창했는데, 이미 통일신라 말기에 ‘구산선문九山禪門’이 들어올 즈음부터 유행했다. 신라신앙의 변화를 가져온 밀교도 유행했고, 사찰마다 비로자나불상이 새롭게 유행했다.
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高敞 禪雲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보물 고창 선운사 소조비로자나 삼불 좌상은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이 앉아 있는 삼불상을 말한다. 비로자나불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광명의 부처이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모든 질병을 고쳐 주는 부처이고, 아미타불은 괴로움이 없는 안락하며 자유로운 세상인 극락정토의 주인이 되는 부처이다.
선운사 소조비로자나불좌상은 나무 기둥을 세워 윤곽을 바로잡고 흙을 바르고 천을 덧씌운 뒤에 금박을 입힌 소조 불상이다. 선운사 불상은 조각적·종교적으로 매우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불상의 넓고 당당한 어깨, 긴 허리, 넓고 낮은 무릎 등은 16세기부터 17세기 전반까지 유행한 장대하고 웅장한 형태미를 보여준다.
특히 불상의 받침에 승려 무염 등 10여 명이 1633년에 이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비로자나, 약사, 아미타라는 삼불의 명칭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어 17세기 불상 연구에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는데, 선운사는 대웅보전임에도 비로자나불을 모신 것이 특징이다. [출처-안내판 설명]
지장보궁, 지장보살地藏菩薩, 명부전
지장보살은 땅 속에 숨겨진 보살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불 물 흙 공기를 우주의 근원으로 여겼다. 현대과학은 원자 분자를 말하지만 불 물 흙 공기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만물의 근본으로 여겨진다. 땅, 생명이 성장해가는 흙의 힘을 인격화한 것이 바로 지장보살이다. 지장보살은 모든 나쁜 업으로부터 구제하는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이 현세의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면 지장보살은 죽은 뒤의 고통을 구제해준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고통을 면해주는 보살이다. 세상의 모든 중생, 지옥의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이다.
중생의 구제자인 지장보살을 형상화한 이미지를 살펴본다. 화관을 쓰지않고 민머리이거나 두건을 쓴 모습이다. 왼손에는 금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에는 밝은 보주寶珠를 쥐고 있다.
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 高敞 禪雲寺 金銅地藏菩薩坐像 보물 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 좌상은 청동 표면에 금칠을 한 지장보살상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고자 지옥에 몸소 들어가 죄지은 중생들을 교화·구제하는 지옥세계의 부처를 말한다. 부처가 없는 시대 즉, 석가모니불이 사라지고 미래불인 미륵불은 아직 출현하지 않은 시대에 중생들을 교화하는 부처이다.
선운사 지장보살상은 불상의 머리에 두건을 쓴 모습, 넓적하고 편평한 얼굴, 형식적이고 수평적인 옷 주름 처리 등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불상은 일제 강점기에 도난을 당하게 되는데, 불상의 영험함으로 인해 다시 선운사에 모셔지게 되었다. 일본으로 도난당한 지장보살상은 불상 주인의 꿈에 수시로 나타나“나는 본래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돌려 보내 달라”라고 하였으나 불상의 주인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점차 가세가 기울고 병이 들게 되자 불상 주인은 불상을 다른 사람에게 처분하기에 이른다. 그 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도 같은 일이 반복되자 마지막으로 불상을 소장하고 있던 사람이 고창 경찰서에 신고하고 반환함으로써 선운사 지장보살상은 도난당한 지 2년 만에 선운사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출처-안내판 설명]
"어간문"이라는 것은 법당 가운데 있는 문이다. 그 문을 열면 부처님이 정면으로 보인다. '큰스님'이 어간문으로 출입하고, 일반 신도들은 좌우에 있는 문을 이용하는 것이 사찰에서의 예의다. 법당 안에서도 부처님이 위치한 정 가운데를 지나다니지 않는 것이 예의인데, 그 앞을 지나게 되면 부처님을 향해 합장 반배를 하고 지나가는 것이 사찰의 예의라고 한다. 우리들이 어른 앞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명부전冥府殿은 염라대왕(염마왕)이 다스리는 저승세계를 나타낸다. 윤회를 심판하는 지장보살이 중심이다. 지장보살의 후불탱화도 지장도이다. 시왕들의 뒤에는 시왕탱화가 걸려있다. 사진 속 천장에 있는 하얀색 등은 천도의식을 치른 망자들의 이름이 적힌 등이다.
선운사는 원래 지장전과 시왕전이 따로 있었는데 17세기에 한 전각에 모아 '명부전'으로 이름지었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협시(불단앞에 정면으로 서서 오른쪽) 도명존자道明尊者, 우협시(불단앞에 정면으로 서서 왼쪽) 무독귀왕無毒鬼王, 이렇게 삼존의 양쪽으로 시왕과 권속을 배치했다. 좌협시 도명존자는 원래 승려였는데 저승에서 지장보살을 만나 이승으로 돌아와 저승의 모습을 세상에 알렸다고 한다. 지장보살의 전생은 브라만의 딸이라고 한다. 죽은 어머니를 찾아 지옥에 갔을 때 무독귀왕의 안내로 어머니를 구하게 도와준 인연으로 지장보살의 협시가 되었다고 한다. 우협시이다.
시왕(十王 지옥의 심판관)들은 모두 관을 쓰고 의자에 앉아있다. 시왕 사이에 있는 권속들은 녹사(기록을 맡음)와 시동들이다. 선운사의 시왕들은 얼굴이 온화하고 미소를 띤 모습이다. 하나씩 살펴보면 활짝 웃는 얼굴도 있다. 지옥의 심판관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상인 것 같다. 불교미술에서 고려와 조선의 차이가 있는데, 고려시대엔 스님들이 눈을 부릅뜬 노승의 모습으로, 조선시대엔 젋은 스님의 모습으로 표현한다.
시왕에 관심있는 분은 아래 주소를 참고시기 바란다.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451514
관음전, 관음보살
대웅보전 뒷편 동쪽에 있는 관음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됐다.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 천수천안관세음 탱화가 있다.
관세음보살을 중심 부처님으로 모실 경우엔 대웅전이라고 부르지 않고 원통전圓通殿이라고 부른다. 관세음보살이 모든 곳에 원융한 모습으로 중생의 고뇌를 씻어준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예를 들어 양양의 낙산사에 원통전이 있다.
“절세의 미인,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어여쁜 모습, 섬섬옥수에 꽃을 쥐고, 드러누운 나에게 미소를 던진다. 극히 정답고 달콤한 미소였다..” <죽다 살아난 이야기> 한용운 전집1 중에서.
만해 한용운韓龍雲(1879 - 1944)이 만주에서 ‘굴라재’ 고개를 넘으며 총에 맞고 죽음에 직면하여 관세음보살의 환체幻體를 만나 쓴 수필의 한 부분이다. 만해에게 보인 관세음보살의 모습이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졌다는 이름이지만 실제 조각된 손의 숫자는 40개이다. 가운데 가장 큰 손은 합장을 하고 있고 나머지 손은 양쪽으로 각각 20개가 있다. 그 하나하나의 손들이 25유(二十五有 윤회의 生死界- 욕계 14유, 색계 7유, 무색계 4유)를 구제한다고 보기 때문에 40x25=1000수가 되는 것이다. 각각의 손들이 구슬, 도끼, 활, 법륜 등의 물건을 손에 들고 있고, 손마다 눈이 달려있다.
천수千手의 기원은 바라문교의 리그베다 신화에 나오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인드라Indra신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천수관음 신앙은 고려 이후 <천수경>의 보급과 함께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천千’ 은 무량無量·원만圓滿을 뜻하며, ‘천수千手’는 자비가 광대무변하다는 뜻이다. ‘천안千眼’은 지혜의 원만자재圓滿自在함을 상징한다. 즉 끝없는 자비와 걸림없는 지혜로써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관세음보살의 형상화된 이미지는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에는 남성에 가까운 모습이었고, 이후로는 주로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조성됐다. 자비의 보살로서 자애로운 어머니, 여성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연꽃을 들거나 정병을 잡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아미타 부처님을 가까이 모셨던 인연으로 아미타 부처님 왼편에 모시는 것이 관례이다.
선운사 범종각
종루鐘樓, 종각鐘閣은 부처님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고 교화하가 위해서 소리와 관련된 사물을 봉안한 전각이다. 사물은 지옥과 천상의 중생을 위한 범종梵鐘, 축생을 위한 법고法鼓, 물고기를 위한 목어木魚), 날 짐승을 위한 운판雲版이다.
선운사 범종각은 새로 조성하여 옛스러움의 운치가 없다. 전각들은 세월의 더깨가 쌓여있어야 운치가 좀 있지않은가. 범종각 정면에는 범종이 있고 왼쪽으로 법고, 오른쪽에 목어와 운판이 있다. 범종은 많은 사람들을 모을 때, 시각을 알려줄 때, 예불과 의식을 행할 때 종을 친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종을 치기도 한다. 범종은 중생들을 구제하며 새벽에는 28번(마하가섭존자부터 중국의 보리 달마대사까지 28대 조사, 또는 욕계, 색계,무색계의 28천을 상징) 자녁에는 33번(욕계 2천의 도리천 정상 33천을 상징)을 친다.
북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북소리처럼 널리널리 펴져 모든 사람들에게 이치를 전해준다는 뜻으로 예불할 때와 의식할 때 친다. 중생에는 사람뿐 아니라 짐승 세계의 중생들까지 포함된다. 법고의 양쪽을 암소와 수소 가죽으로 대는 것은 음양의 조화를 이루려 함이다. 목어는 문자 그대로 나무로 만든 물고기 모양이다. 예불과 의식을 행할 때 친다. 물속의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목어처럼 풍경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다. 이는 물고기는 눈을 뜨고 자기 때문에 항상 마음의 눈을 뜨고 수행하라는 의미이다. 운판은 청동으로 만든 구름 모양의 판이다. 공중의 조류와 허공을 떠도는 영혼을 천도하기 위해 친다. 대중에게 끼니 때를 알리기 위하여 치기도 하고 예불이나 의식을 행할 때도 운판을 친다.
'범종각'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 범종의 소리가 은은히 울려온다. 어려서 듣던 산사의 범종 울림은 세월을 건너, 공간을 건너 내 귀에까지 퍼져온다.
불사, 기도의 가치
가격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지…
오래 전에 읽었던 책에서 떠오르는 구절이 있어 인용한다.
"승가나 스님들께 경제적인 생활을 유지하도록 음식이나 제물을 올리는 것만이 공양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모든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바쳤듯이, 우리 또한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보시 공양을 함으로써 우리의 업장을 소멸하고자 하는 기원이 공양의 참뜻입니다. 그러므로 공양이란 부처님과 승가에 공양하는 형식을 갖지만 그 내용은 부처님께, 즉 진리의 세계를 실현코자 하는 삶에 공양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길을 걷는 스님과 여러 보살과 자신이 은혜를 입고 있는 주변의 모든 중생에게 올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 법륜, 정토출판, 2010.03.15 개정판1쇄 528쪽.
"이러한 수행을 하면 자신보다는 가족을 생각하고, 가족보다는 주변 이웃의 이익을 생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 충돌하지 않게 되어 화합과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올리는 참된 공양이란 부처님의 형상에 공양물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 법륜, 정토출판, 2010.03.15 개정판1쇄 529-530쪽.
"일반적으로 공양을 올릴 때 부처님의 지혜 광명과 자비 공덕을 상징하는 초와 향, 그리고 꽃과 청수를 올립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한 공양은 참된 공양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물론 많은 재물과 향과 꽃을 올리고 찬찬하는 것도 큰 공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덕은 중요한 것이 못됩니다. 큰 공양을 올릴 수 없다하더라도 부처님의 삶을 좇아 부처의 길, 보살의 길을 걷고자 할 때 큰 공덕이 자신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하는 공양이 참된 공양입니다.
그러면 향과 초를 밝히고 공양물을 올리면서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촛불과 향이 자신의 몸을 태우면서 주변을 밝히고 향기롭게 하듯이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보살행으로 모든 중생의 어둠을 밝히고 향을 살라야 합니다. 그리고 꽃과 청수를 올릴 때에는 우리도 꽃처럼 주위를 아름답고 향기롭게 하고, 청수가 모든 것을 씻어주듯 맑고 청정한 계행을 지켜 오탁의 중생계를 맑히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 법륜, 정토출판, 2010.03.15 개정판1쇄 528쪽.
대반석臺盤石 위에 쌓은 돌탑을 보며 불상 앞에 섰을 때보다 더 깊은 감동을 했다. 한 사람이 쌓은 것은 아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쌓아올린 것이다. 돌 하나하나에 담긴 염원이 얼마나 간절한가! 대반석 주변에 돌탑을 쌓기 좋은 납작한 돌이 흔히 널려있는 곳도 아니다. 쌓인 돌들을 보면 그 돌 위에 어떻게 또 돌을 얹었을까 놀랍다.
염원, 바람, 기도, 특정 종교를 꼽지 않더라도 기도하는 마음은 다 같을 것이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현재 처한 상황을 알리고, 잘못을 참회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며, 앞날의 소망을 말하는 그런 순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쌓아올린 작은 돌탑 앞에서 마음은 저절로 경건해진다.
돌 하나 잘못 얹는 순간 내가 놓은 돌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내 돌 하나뿐 아니라 그 밑에 놓여있는 다른 사람들이 쌓아놓은 돌들이 다 무너지는 일도 생긴다. 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가! 일면식도 없고,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는 사람들 - 나 이전에 돌을 하나씩 올려놓은 사람들의 기도를 내가 지켜줘야할 책임이 막중하다. 맨 처음 돌을 놓았을 때 그것은 돌탑이 아니고 그냥 돌 한 개일 뿐이다. 그 위에 누군가가 하나 더 올려놓고, 다른 이가 또 올려놓고... 그렇게 기도들이 모여 돌탑이 된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 아닐까. 크나 큰 우주 안에 아주 작은 지구별, 그 안에 서로 얽히고 설켜있는 인간들, 얽은 끈이 보이지 않아도 부정할 수 없는 연결고리에 묶여 존재하는 우리들이다. 동글납작한 예쁜 돌도, 울퉁불퉁 뾰족한 돌도, 전체가 밀착되거나 혹은 아주 작은 부분만 닿아있거나 하나의 탑으로 서있는 돌탑 앞에서 잠시 마음을 닦는다.
불전佛錢으로 시주施主와 공양供養을 하진 않았으나 진지한 기도의 돌 하나를 얹었다. 모든 이들의 평안을 염원하는 돌 하나. 나의 기도.
선운사는 2천여 그루의 동백나무 군락이 5천여평에 걸쳐 30미터 정도의 긴 띠 모양으로 조성돼 있다.
동백나무는 상록 활엽수로서 불에 강하다고 한다. 산속에 나무자재로 절집을 지으며 방화림으로 동백나무를 심은 곳이 많다. 강진 백련사, 광양 백룡사, 구례 화엄사, 해남 대흥사와 미황사, 여러 사찰들의 전각들을 동백숲으로 보호한다. 선운사는 동백숲이 띠처럼 둘러있다.
동백나무는 방화림 역할도 하지만 그 열매로 기름을 짜 유용하게 쓰인다. 어렸을 때 증조할머니께서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셨다. 그 시절 어린 나는 아주까리 기름 냄새도 동백기름 냄새도 다 싫어했었다.
사찰 동백숲의 동백기름은 스님들에게 아주 중요한 필수품이다. 등잔불을 밝히는데 동백기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방화림 역할, 등잔 기름으로 상용되는 사찰주변의 동백숲이다. 시와 수필과 소설로 문학의 소재가 되어 더욱 유명해진 선운사의 동백숲은 봄이면 많은 이들의 발길을 유혹한다. 그에 못지않게 빨간색 꽃으로 유혹하는 선운사의 꽃무릇은 여름 한 더위를 넘기고나면 불타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사랑의 색깔이기도 하고, 역사를 더듬으면 우금치에서 패주한 동학농민들의 선혈같기도 하다.
선운사에는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은 전각이 더 많이 있다. 아름다운 가람의 풍광을 더 자세히 전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다.
'선운사'라면 꼭 떠오르는 미당 서정주의 시로 마감한다.
선운사 동구 - 서정주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어떤 불상이 부처님, 즉 여래상이고 어떤 불상이 보살상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부처는 누구인가요? 왕궁의 왕자로 태어나서 출가하고 득도하고 부처가 되었습니다. 이미 세상의 장식이 전혀 필요없습니다. 그래서 여래상은 장식성없이 단순합니다.
그러면 보살은 누구인가요? 구도중에 있으나 출가하지 않고 중생과 더불어 살고있지요. 보살상은 석가가 왕궁의 왕자로 있을 때의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정병을 들고 화관을 쓰고 꽃을 들고, 이런 장식성이 있는 불상이지요.
또한 부처님은 머리에 상투를 틀어올린듯 볼록한 육계가 있고, 소라껍질모양의 나발로 머리를 표현하는데요, 이는 32상 80종호라하는 부처의 모습에 근거한 것입니다. 광배역시 ‘한 길이나되는 빛이 비친다’는 규범에 따라 머리광배와 전신광배로 형상화합니다.
금동여래입상 8C. 통일신라
진리와 자비의 상징인 부처를 직접 형상화한 불상은 예배의 대상이 되는데요, 구리합금으로 주조한 후 도금한 불상은 존상과 대좌, 광배를 별도로 주조하여 결합합니다. 손과 손가락의 모양을 수인이라고 하는데요, 이 불상의 수인은 손을 어깨 높이로 올린 시무외인과 손을 아래로 내린 여원인입니다.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고 위안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금도금은 금과 수은을 1대5의 비율로 조형물에 바른 후 가열하면 수은은 증발하고 금만 남습니다.
(이 내용은 리움 미술관 M1 고미술관에서 전시 설명할 때의 시나리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