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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ug 04. 2023

8월 4일.

먼 여행지에서 가족들을 생각함.


호텔 창밖 바다. 보름달이 뜬 밤바다. 


8월4일, 한 생명이 태어난 날이다.

8월4일, 한 생명이 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손녀의 생일과 큰오빠가 돌아가신 날이 같은 날이다. 같은 해에 일어난 일은 아니고 날짜만 같다. 손녀가 태어났을 땐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쁘고 가슴에 무언가가 꽉찬 느낌으로 뿌듯했다. 큰오빠가 73세 나이에 세상을 등진 날에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 가슴속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느낌이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 아팠고, 평생동안 흘릴 눈물은 그때 다 쏟았다. 어머니가 95년의 생을 마감하고 영면에 들어가신 날에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자연의 이치에 순응할 수 있었다. 

8월 4일, 손녀와 생일축하 화상통화를 했다. 납골당 유골함에 갇혀있는 오빠와는 통화를 할 수 없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 따끈따끈한 햇살과 맑고 파란 하늘은 한국의 가을날씨와 같다. 어려서 올려다 보던 뭉게구름 떠다니는 가을 하늘같다. 실시간으로 들려오는 한국의 물난리소식과 사회문제들이 가슴에 가시로 박혀 마냥 즐겁기만 할 수는 없지만, 염치없이 그냥 잘 지내고 있다. 수해복구 현장으로 달려가야할 시간을 이렇게 한가하게 보내다니 정말 염치가 없다.

옆지기가 큰며느리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태풍 “매미”의 수해복구 현장에서 며느리를 눈여겨 봤을 때였다. 눈여겨 봤다기보다는 눈에 띤 것이 맞다. 강원도 인제로 “매미” 수해복구 봉사를 갔는데 큰며느리(결혼 전)의 행동은 눈에 띠게 열심이었다고 한다(나는 외국에 있어서 안갔다.). 20대의 젊은 여자아이가 더러운 것 안 가리고, 위험한 것 안 가리고, 전력을 다하여 땀을 뻘뻘 흘리며 복구활동에 열중하는 모습이 옆지기의 눈길을 끌었다. 며느리를 데려다가 소처럼 부려먹자는 심사는 절대로 아니지만 봉사에 열중하던 그 아이의 모습은 시아버지를 감동시켰다. 그후 몇 년 후 그 아이는 우리 식구가 되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콩크리트 지지자이다. 

큰 며느리는 특수학급 교사이다. 결혼 초, 예쁘게 꾸밀 때인데 그 아이는 전혀 치장을 하지 않았다. 결혼 때 준비한 예쁜 목걸이 귀걸이 반지 아무것도 몸에 걸치지 않았다. 있는 악세서리를 하지 그러냐고 했더니 아이들이 잡아당겨서 학교에는 못하고 간단다. 몸으로 겪는 아이들이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행사에는 우리 작은 아들을 불러갔다. 성탄절 선물을 주고 아이들을 안아주는데 덩치 큰 아이를 안아줄 수가 없다고. 작은 아들이 학교에 가서 덩치 큰 아이를 안아주고 왔다. 

집에 와서도 늘 학습준비를 열심히 했다. 어떤 방법으로 아이들을 즐겁게 해줄까를 생활 속에서 늘 연구했다. 결혼 전, 자신의 가정 살림에서 자유로울 때에는 방학 때 장애우 캠프에 봉사활동을 갔다. 

코로나로 학교가 문을 닫았던 시절에는 교재를 준비해서 아이들 집집마다 배달을 다녔다. 마치 학습지 강사처럼 방문을 하며 자신의 소임에 충실했다. 혹자는 수능점수에 따라서 특수교육학과를 들어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특수교육학과를 지원하는 대다수의 수험생들은 자기나름의 인생관에 따른 것이다. 모두가 숫자로 대치가 되는 평가로 따지자면 입학당시의 점수는 다른 학과 지원해도 충분히 합격할 점수이다. 그러나 숫자로 대치할 수 없는 심성이 그 어려운 길을 선택하여 걷고 있다. 결코 쉽지않은 특수교사의 길은 자신의 능동적인 선택이 아니라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힘든 일을 하는 며느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무거운 짐을 진 그 아이가 가끔 내뱉는 투정을 무시했다. 위로는 커녕 오히려 무게를 더 얹은 것 같다. 요즘 학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뉴스를 통해 접하며 새삼 미안한 마음이 크다. 

며느리는 가끔 학교에서 있었던 속상한 일을 이야기한다. 학부모의 정말 터무니없는, 어처구니없는, 상식을 벗어난 요구와 항의가 있어서 잔뜩 마음이 상한 며느리의 하소연을 나는 무시했다. 이제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내가 하는 대꾸는 늘 이랬다.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은 가슴 속에 화가 가득한 사람들이잖아. 얼마나 힘들겠니. 그러니까 가끔 정상적인 생각을 벗어나기도 하는 거겠지. 어쩌니, 네가 이해하고 받아줘야지.” 학부모와의 일로 속이 상한 며느리에게 내가 해줄수 있는 말은 겨우 이렇게 밖에 다른 말이 없었다.

“아니, 그런 무식한 학부모가 있나? 선생이 제 종인줄 아나보네? 지가 할 일을 왜 선생한테 요구해? 무식한 것같으니라구.”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꿀꺽 삼키는 나였다. 어찌 말이라고 다 뱉을 수 있는가. 가려가며 뱉고 억지로라도 삼켜야하는 것이지. 


요즘 학부모들의 갑질에 당하는 교사들의 고충을 접하면서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며느리에게 뿐 아니라 친정엄마에게도 딸에게도 참 쌀쌀한 사람인 것 같다.  나는 공감능력이 부족하다.

우리 친정 올케들은 착하다. 잘못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 나의 친정어머니는 옛날 사고방식으로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이렇게저렇게 해야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셨다. 세상은 변했지만 당신이 시집살이를 하던 시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셨다. 가끔 며느리(나의 올케)의 언행이 기대에 못미치면 대놓고 말은 못하고 딸인 나에게 불평불만을 털어놓으셨다. “며느리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올케편을 들어 친정어머니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어느 때부턴가는 불평불만을 말한 끝에 “너한테 말했자 소용도 없지만” “딸이라고 있어봤자 하나 소용도 없어. 맨날 지 올케편만 들고 에미를 무시하니”를 덧붙이셨다. 그런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는 나에게 며느리 얘기를 전혀 안하셨다.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친정어머니 말을 듣고 맞장구치며 올케 흉을 봐야 하나? 그래야 어머니 속이 풀리는 걸까? 아니면 올케한테 우리엄마에게 왜 그랬냐고 덤벼들어 따져야 하나? 그럼 어머니의 속이 풀리나? 

생각해보면 우리 딸도 내게 서운한 마음이 클 것 같다. 딸은 시댁과 원만하게 잘 지내지만 가끔은 불만을 툴툴거린다. 딸의 시아버님은 4형제이고 맏아들이시다. 큰 일치레가 많고 잦다. 딸의 시어머니는 모든 것을 잘 감당하시고 효부상을 탄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 딸은 시어머니만큼 덕목을 갖추지 못했다. 제가 할 도리는 감수하면서도 불평을 가끔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김장을 하는데, 제사를 지내는데, 사촌동서들은 안 오고 며느리는 저 혼자만 왔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나는 큰 집에 일하러 가면서 내 며느리 안데리고 가. 내가 할 일은 하지만 왜 내 며느리까지 데리고 가서 일하니?” 딸의 불평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김장을 딸네 시집에서 다 함께 하는데 다른 며느리들은 안오고 저혼자만 간 것이 억울하다는 딸의 말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다. 친정엄마에게 말해도 소용없다.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그래, 늬 시집 작은 어머니들 참 나쁘네. 김치는 다 가져가면서 왜 자기네들 며느리는 안 데리고 와, 그런 법이 어딨어?” 내가 씩씩거리며 이렇게 말해야 딸의 속상한 마음이 풀릴까? 어른인 내가 어찌 딸과 맞장구치며 사돈댁을 험담할 수가 있나. 


며느리 학교에서 갑질당하고 온 속상함에도, 친정어머니가 며느리에게서 느낀 서운함도, 딸의 시댁에 대한 불만에도 내가 대응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있다. "참아라. 이해해라."

나야말로 속이 답답하다. 즉흥적으로 맞장구치지 못한 말들이 내 가슴속에도 쌓여있다. 이런 내 마음을 며느리는 친정엄마는 딸은 알까, 이해할까?

어찌하면 내게 하소연하는 마음들을 위로해줄 수 있을까? 나는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인가보다. 인정머리없는 사람인가보다. 가끔은 하소연에 맞장구치며 속시원히 대상에게 욕을 해버릴까? 불평불만인 사람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위로를 하는지 나이 70이 넘었서도 아직 모르겠다. 그런 지혜를 갖고싶다. 

나의 착한 며느리, 이 시에미가 따뜻한 위로를 못해줘서 미안하다. 돌아가신 어머니, 제가 맞장구를 쳐드리지 않을 때 많이 외로우셨죠? 뒤늦게 가슴이 아프네요. 어머니 죄송해요. 딸아 딸아 내 딸아, 시집에서 속상한 일을 친정엄마에게 쏟아놓지 못해 마음의 병을 얻을까봐 걱정이구나. 내가 다 받아주도록 마음을 바꿔볼게. 그리 될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여행지에서 먹은 음식. 다행히 밥과 김치 없어도 잘 먹고 잘 지낸다.

저녁식사는 언제나 생선, 접시 가득 든든히 먹는 아침, 구운 가지위에 작은 채소 얹은 간단한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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