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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ug 29. 2023

바이마르 -괴테, 쉴러, 니체

바이마르 여행기

독일 뮌헨에서 에어푸르트와 바아마르를 거쳐 베를린을 다녀오는 여행이었습니다. 이 글은 바이마르에 관한 여행기입니다.

2023. 07. 26-27 방문. 아래의 바이마르에 대한 모든 사진은 이날 촬영한 것입니다.


우리는 뮌헨에서 기차로 이동했습니다. 한달에 49유로짜리 대중교통 카드를 사서 IC,EC,ICE를 제외한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었고요. 도시마다 다른 시내버스표를 따로 살 필요가 없어서 정말 편합니다.

숙소는 늘 그렇듯이 booking 닷컴에서 예약을 했어요. 괴테파크 바로 앞 호텔이라 가볼 곳을 모두 걸어서 다닐 수 있었답니다. 숙박비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아침식사 비용이 1인당 25유로였어요. 비싸기도 하지만 우리 두 노인네가 아침에 50유로 어치의 음식을 다 먹을 수가 없어서 너무 아까운 거에요. 둘이 아침식사에 50유로(71,000원)라니, 너무 하죠? 호텔 밖 카페에서 하루 아침을 해결했어요. 크로와상1개와 커피 한잔이면 돼요. 이 돈을 보태면 저녁식사를 멋지게 할 수 있거든요.


바이마르 Weimar

독일 여행에서 꼭 가야할 체크리스트에 중요하게 꼽히지는 않는 도시입니다. 워낙 유명 관광지가 많은 나라니까요. 그러나 문화관광지로서는 손꼽을만 해요. 우선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인들을 살펴볼까요.

요한 세바스챤 바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프리드리히 쉴러, 알렉산드르 푸시킨, 프란츠 리스트, 프리드리히 니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바실리 칸딘스키, 이 사람들이 다 바이마르에서 창작활동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저는 괴테, 쉴러, 니체에 집중했어요. 물론 미술쪽으로 바우하우스(Bauhaus)를 빼놓을 순 없지만 욕심대로 다 돌아볼 체력이 안돼서...

괴테와 쉴러와 니체는 이 도시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냈습니다. 사망 당시에 앉았던 괴테의 의자, 누워서 임종한 쉴러의 침대가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 전시되고 있어요. "사람이 어디서 제일 많이 죽지?" 이런 농담 아세요? 답은 "침대에서"입니다. 그런데 괴테는 의자에 앉아서 하늘나라로 갔네요.


"독일국은 공화국이다. 정치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바이마르 헌법 제1장 국가와 주 제1조입니다. 어? 많이 듣던 건데? 예, 맞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이죠.

대한민국 헌법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1919년 공포된 바이마르 헌법이 1948년 공포된 대한민국 헌법의 근간이 됐어요..

바이마르 공화국은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즉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 독일이 부상할 때까지의 기간 동안 독일 정부였습니다. 카이저 빌헬름 2세가 퇴위한 후 독일의 새 정부가 국회에 의해 구성되었던 바이마르 마을의 이름을 가져온 겁니다. 불확실한 시작부터 짧은 성공의 시절, 그리고 엄청난 불황에 이르기까지, 바이마르 공화국은 독일이 히틀러와 나치당의 부상을 야기할 만큼 엄청난 혼란을 겪었지요. 1918년 11월 혁명으로 독일의 입헌군주제는 의회민주제로 바뀌었고, 바이마르는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군국주의와 권위주의적인 군주제만 알고 있던 국가에서 현대 자유 민주주의를 건설하려고 노력했지요.

바이마르 공화국 건국 초기에는 비례대표제를 택했고, 최초로 여성에게 투표권과 후보로 출마할 권리를 부여했어요. 게다가 투표 연령도 25세에서 20세로 낮아졌습니다. 우리나라는 대한민국 임시헌정에 의해 1919년부터 여성참정권이 보장됐고, 1948년에 헌법에 명시하였지요.

제헌헌법 제2장 국민의 권리의무 - 제8조. '모든 국민은 법률앞에 평등이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바이마르'라는 도시의 핵심 키워드는 공화제, 헌법, 문화(음악, 미술, 문학)입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집 Haus der Weimarer Republik

"바이마르 공화국의 집"에서는 최초의 독일 민주주의 분야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제공해요. 여기에서 전문가 강연과 워크숍을 예약하고, 워크북과 AR 가이드를 사용하거나, 시립 박물관의 전시회를 방문할 수 있습니다.

중세에는 이곳에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있었으나 종교 개혁 과정에서 해체되었어요.  18세기 말까지 무기가 보관되어 있던 무기고가 있었답니다. 1887년에는 대공이 바이마르 예술가 협회에 기증하여 이곳에서 축제를 열고 숙박시설로도 사용했대요. 뭉크(Edward Munch)도 이곳에서 묵었다고 하네요..  

1945년, 극장에 있는 군수공장에 대한 공습이 있었고, 그 결과 인근 무기고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예술가의 집은 1층만 남았고 심하게 파손됐는데 10년 후 미술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쿤스트할레(예술관)에서는 수많은 기획전이 열렸고, 대중의 큰 호응을 얻어 1994년 쿤스트할레에 임시 박물관이 건립되었습니.


바이마르 거리,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거리에 세워진 이정표. 오른쪽은 괴테의 <파우스트> 공연이 있었던 국립극장 앞에 세워진 괴테와 쉴러의 동상. 쉴러는 신장 190, 괴테는 169Cm인데 동상의 크기는 같아요.

같은 날 찍은 사진인데 어느 것은 하늘이 회색빛이고 또 다른 사진은 파란 하늘색입니다. 여우비라고 해야할지, 여우볕이라고 해야할지 헷갈리네요.

바이마르 국립극장은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극장 중 하나입니다. 1791년부터 괴테가 감독을 맡아 쉴러의 거의 모든 드라마를 이곳에서 초연했어요.

청동 기념물은 드레스덴의 조각가 에른스트 리첼(Ernst Rietschel)이 만들어 작센바이마르 공작 칼 아우구스트 1세와 아이제나흐의 탄생 100주년인 1857년 9월 4일에 제막되었습니다. 화강암 바닥의 청동판에는 "시인 커플 괴테와 쉴러에게. 조국이 Dem Dichterpaar Goethe und Schiller. Das Vaterland."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괴테 하우스 Goethes Wohnhaus

괴테가 1782-1789에 세들어 살았던 집인데 칼 아우구스트 공작이 괴테에게 선물하여 1801년 괴테의 소유가 됐답니다.

괴테는 174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라이프치히와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변호사로 일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도 '괴테하우스'가 있습니다. 수십년 전, 유럽여행의 첫 방문지가 바로 프랑크프르트였고, 괴테하우스였어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많이 놀랐지요. 그런 집은 처음 봤으니까요.  

괴테는 1774년 서간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유럽 전역에서 스타가 되었지요. 저는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 진열된 '세계문학전집'에서 뽑아 읽었어요. <파우스트>도 읽긴 했는데 이해도 못하고 그냥 훑었어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작 카를 아우구스트 1세(그의 어머니 안나 아말리아처럼 열렬한 예술 애호가이자 후원자)는 1774년 여행 중에 프랑크푸르트의 괴테를 방문하여 그를 바이마르로 초대 했습니다. 1775년 말 괴테는 약혼녀 릴리 쇼네만과 별거하며 바이마르로 갔습니다. 공작은 괴테에게 높은 관직을 부여하고 그에게 많은 봉급을 지급했지요. 괴테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오디오 가이드를 빌리면 각 방의 안내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영어, 독일어 선택돼요. 입장료는 1인당 13유로(18000원 정도). 우리나라 박물관 입장료보다 훨씬 비싸요.

괴테 하우스에 장식된 조각품. 왼쪽은 우리의 '얼굴무늬수막새(국립경주박물관)'가 생각나서 촬영(그만 못하지만...) 했어요.


괴테의 서재. 마지막날 모습 그대로라고 함. 오른쪽-괴테의 침실-침대 옆 의자에서 1832년 3월 22일에 사망했어요.


신 바이마르 박물관 Neues Museum

뮤제움의 전신인 대공 박물관(Grand Ducal Museum)은 독일 최초로 특수 목적으로 지어진 박물관 건물 중 하나로 1869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이곳은 1920년대 초 현대 미술의 선구적인 전시를 위한 장소였습니다. 50년 동안 비어 있던 뮤제움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심각한 손상과 오랜 방치로 1989년에 거의 완전한 폐허가 되었습니다. 1999년 유럽 문화 도시의 해를 기념하여 원래 모습으로 개조하여 현대 박물관이 됐습니다.

바우하우스 박물관 바이마르(Bauhaus Museum Weimar)와 바로 옆에 있는 신 바이마르 박물관(Museum Neues Weimar)은 헨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 해리 케슬러 백작(Count Harry Kessler),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와 같은 모더니즘의 선구자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노이에스 뮤제움(Neues Museum 새로 세운 박물관). 뮤제움 숍에는 온통 니체, 니체, 니체입니다. 읽을 수도 없는 책들을 구경만 실컷 했어요. 익숙한 제목들이 눈에 띨 때 반가웠지만 들춰봐도 소용없는...

박물관 앞에서 '어서옵쇼'하는 폼으로 서있는 조형물이 재미있네요.

토마스 쉬테(Thomas Schüttes)의 청동조형물 <위대한 정신Großer Geist>입니다. "물질과 형태의 저항 속에서 그는 인간 존재의 양가성, 신체의 중력, 작거나 심지어는 큰 정신으로서의 고양을 보여줍니다."라는 것이  미술평론가들의 설명입니다.


노이에스 뮤제움 니체 아카이브의 조각품들. 방에 들어서자마자 서있는 니체를 보고 움찔 놀랐습니다. 실물 사람인줄 알고요. 이 조각품들 뒤편으로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이 진열돼 있어요.

니체의 원본 원고는 현재 바이마르 "괴테와 쉴러 기록 보관소"에 있습니다.


벽면을 장식한 그림. 첫눈에 고갱의 색감이 느껴져서 찍었습니다. 그런가요?

왼쪽-Ludwig von Hofmann <Weinlese> 1905. 오른쪽- <Tanzende mit Schleier> 1905.


노이에스 뮤제움 지하에 있는 북바인딩 룸. 너무나도 가지고싶었던 바인딩 기기들이 다 모여있습니다. 전시품도 있고, 실제로 사용하는 것들도 있고. 북바인딩 클라스에 등록하여 배우고싶은 마음을 꾸욱꾸욱 눌러 참았습니다. 포기해야할 것들이 제법 많아지는 나이를 실감하면서.


쉴러 하우스 Schillers Wohnhaus

괴테의 집에서 불과 몇 걸음 거리입니다. 두 사람은 수시로 서로를 방문해 많은 토론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서로에게 많은 편지도 썼습니다(괴테는 1828/29년에 쉴러와의 서신을 출판). 그는 그것을 그의 가장 큰 보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귀한 서신은 쉴러 아카이브에 거의 다 공개되어 누구나 볼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https://www.friedrich-schiller-archiv.de/briefe/briefwechsel-goethe-schiller/

쉴러는 1802년부터 1805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아내 샬롯과 네 자녀와 함께 이 집에서 살았습니다.

프리드리히 쉴러는 1759년 슈바벤의 마르바흐 암 넥카르(Marbach am Neckar) 마을에서 태어나 슈투트가르트의 카를슐레(Karlsschule) 에서 제1법학을 공부한 후 1780년에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글쓰기에 있었습니다. 브런치스토리에도 변호사와 의사 작가들이 많죠. 글쓰기에 진심인 쉴러의 첫 번째 드라마 <도둑들 Die Räuber>은 1782년 만하임에서 초연되어 하룻밤 사이에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죠. 초연을 위해 군의관이었던 그는 허가 없이 슈투트가르트를 떠났고, 뷔르템베르크 주권자인 칼 유진 공작은 쉴러가 글 쓰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1783년부터 1789년까지의 기간은 작가로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계를 꾸려줄 후원자를 찾아 거주지를 자주 바꾸었습니다. 1788년 루돌슈타트에서 괴테와의 만남은 급여 없이 예나에서 교수직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실러의 취임 강연에는 강의실 수용인원을 초과할 정도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1790년부터 쉴러는 바이마르 공작 칼 아우구스트(Carl August)로부터 급여를 받았고 이로 인해 재정 상황이 개선되었습니다. 그러나 쉴러는 1799년까지 바이마르로 이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에스플러네이드에 있는 집을 구입했습니다.


바이마르 실러 하우스는 거리에 있는 평범한 건물이에요. 큰 간판도 없고.


쉴러의 책상은 마지막날 모습 그대로. 최후의 글. 쉴러는 1805년 5월9일 이 침대에서 사망했습니다.

객실에서는 쉴러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는 개인 물품, 가구, 글 등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고 쉴러 자신을 직접 대면하는 느낌입니다. 쉴러의 서재에서는 그가 <메시나의 신부 Braut von Messina>와 <빌헬름 텔 Wilhelm Tell>을 썼던 원래 책상과 잉크병, 문진 등의 물건이 있습니다.


쉴러하우스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제가 쓴 나라 이름아래에 남편은 same이라고 썼네요. 제가 아는 어떤 어른은 우리나라를 '한국'이라고 하는 것도 꼭 주의를 주시는데. '대한민국'이라고 하라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도 쓰기 싫어서 same이라니. "이하동문"을 많이 써봤나봐요.  가운데는 노이에스 뮤제움 방명록.

오른쪽에는 쉴러의 윌리엄 텔(빌헬름 텔)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요.


에어푸르트 Erfurt

뮌헨에서 에어푸르트를 거쳐 바이마르에 갔어요. 기차 창밖 풍경. 독일여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력발전기가 설치된 풍경입니다. 어느 동네에나 지붕에 태양광발전 판넬이 설치돼있고, 넓은 들판에도 태양광 발전 판넬이 한도끝도 없이 줄지어 설치돼 있어요. 2023.04.16일 독일은 모든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했습니다. 무슨일이나 그렇듯이 찬반논란이 대단합니다.

독일 전 환경부장관 스벤야 슐츠의 말을 옮깁니다.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은 이전에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여겨졌던 사고가 일본과 같은 첨단 기술 국가에서도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큽니다. 가슴 섬뜩한 경고입니다.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여겨졌던”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말이 무서워요. 그래요, 사고는 그렇게 슬며시 우리를 강타하죠. 원전이 경제적이라고 하는 경제논리도 곰곰히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원자로 수명이 다했을 때 폐로하는 비용, 오염수 관리비용, 방사능의 반감기 등을 계산해보면 결코 싼 값은 아니라고 합니다. 아, 이걸로 논쟁을 벌이자는 것은 아니고요, 그냥 제 생각입니다.


에어푸르트 역앞 건물 창에 있는 빌리 브란트(당연히 사진임.)

1970년 12월 7일, 독일 연방공화국 총리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 게토 영웅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는 역사의 심연을 바라보며 수백만 명의 살해당한 사람들의 짐을 짊어지고 사람들이 할 말을 잃었을 때 하던 일을 했습니다.” 브란트는 자서전에서 바로 이 순간을 회상했습니다.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수년 후에 충분히 평가되었습니다. 2000년에는 폴란드 총리 예지 부젝(Jerzy Buzek)과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öder)가 바르샤바 게토 영웅 기념비에 브란트가 바친 헌사를 기념하는 동상을 공개했습니다. 동상이 있는 광장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Museum of the History of Polish Jews 참조)

이 사진을 굳이 올린 이유는 일본총리가 요런 모습으로 우리 앞에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참 아픔 많은 세상입니다.


책 구매

클라식 바인딩한 괴테의 <파우스트>, <파우스트> DVD.

독일어를 전공한 사촌동생에게 줄 선물. 나이 70넘은 그가 독일어와 평생을 담쌓고 살았는데, 이 선물이 그가 청춘으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 되기를 바라며.

쉴러의 <빌헬름 텔>은 손주들에게 구경시켜주려고 샀어요. “너희들이 아는 ‘윌리엄 텔’ 이야기 있잖아, 이게 바로 그 책이다. 구경해.” 이런! 책을 읽으라 않고 구경하라니? 그래요, 애들은 전혀 읽을 수 없어요. 그러나 만져보고, 구경하는 것 만으로도 책에 대한 좋은 경험이 된다고 저는 믿어요. 아이들 클 때 보면 글도 모르는데 책꽂이 책들을 빼서 책장을 이리저리 넘겨보더라구요. 거꾸로 들고 중얼중얼 꾸며대서 읽기도 해요. 좋은 장난감인거죠.


맛있는 음식 , 바이마르와 그외 여행지에서.

가장 감동적인!!!

갑자기 가슴 찡해지는 감동! 뮌헨에서 반찬을 선물받았어요. 브런치스토리 작가님이 불쑥 내밀더군요. 나는 정말 염치없는 노인네에요. 내가 한국음식을 해서 젊은 작가에게 먹여야할텐데 오히려 젊은이가 내게 반찬을 해오다니! 어린 아들 둘 데리고 기차타고 오면서 이걸 또 들고온 거에요. 이번 여행에서 먹었던 음식중에 가장 입에 맞고, 귀한 음식이었어요. 오이볶음, 배추된장무침, 숙주나물, 애호박볶음, 버섯볶음.


아침

언제나 채소 푸짐하게 한 접시.


점심

왼쪽은 야채 얹은 가지구이, 너무 조금이라 배고팠어요. 오른쪽은 식빵토스트 위에 야채 얹은 것..

왼쪽-팬케잌과 과일. 새우 파스타. 레버케제와 감자.


저녁은 항상 해산물.

왼쪽 오징어 먹물 파스타, 생각보다 너무 새까매서 당황.

오늘은 농어, 내일은 민어, 이런 식으로 저녁식사는 항상 생선으로 끝냅니다.


바닐라와 초콜렛 아이스 크림. 가운데는 호텔 Welcome Sweet으로 입실을 기분좋게 하네요. 오른쪽은 달아도 너무나도 단, 끔찍히 단 디저트 케잌.


https://brunch.co.kr/@erding89/325

https://brunch.co.kr/@erding89/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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