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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ug 24. 2023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책 리뷰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F. W. Nietzsche 지음, 사순옥 옮김. 홍신문화사 1997년 중판. (글중 인용문은 이 책의 페이지임.)


집에 다니러 온 딸이 책장앞에서 한 책을 골라 가져가겠다고 했다. 고른 책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딸이 대학 시절에 산 책이다. 아니, 아이 셋 기르면서 고른 책이 그 어려운 니체(F.W Nietzsche)라니? 재미있는 이외수의 소설을 읽으라고 권했더니 딸은 니체의 책을 빼어들었다.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아서.”

딸이 셋째 아이를 낳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있었던 일이다.

늙어가며 바보가 되는 것 같은 나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펼쳐본다. 젊어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세상 경험을 많이 한 지금 읽으면 이해가 좀 쉬울거라는 기대를 걸고 짜라투스트라를 만난다. 니체를 만난다. 곳곳에 딸이 그은 밑줄이 눈에 띈다. 니체 생애 마지막 시간들을 보낸 독일 바이마르(Weimar)에 여행을 다녀온 후에 읽는 니체의 책. 더위에 흘리던 땀을 활자 때문에 마구 흘리며 여름이 마감될 것이다.

독일 바이마르 노이에스 뮤제움에 전시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023. 7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때이다. 그때 나는 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였다. 학교 도서관에서 '세계문학전집'을 읽는 것이 나의 책읽기였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문학가인줄 알았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그것은 문학책이었다. '세계문학전집'에 속해있었으니까.

18세부터 23세쯤까지 책을 많이는 읽었지만 그저 뜻모르는 활자만 본 셈이다. 20세 중반 후반을 지나며 옛날의 나 자신을 얼마나 비웃었던가! 네가 뭘 알아서 읽었다는 것이야? 이제 황혼녘에 옛 책들을 다시 집어든다. 신간들의 유혹을 못이겨 한눈을 팔기도 하지만 독서에 대한 나의 기본방침은 옛 책을 다시 읽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시 만난다.


많은 사상가들에게 논란과 혼란과 경악을 불러일으킨 철학자는 아마 프리드리히 니체일 것이다. 그의 저서중에 <짜라투스트라는 ~ >는 특히 더 논란이 컸다. 기독교와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항이고 급진적인 책으로 꼽힌다.

책에는 “모두를 위한 그리고 아무도 위한 것이 아닌 책 Ein Buch für Alle und Keinen”이라는 부제가 있다. 자신의 철학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고 “아무도 위한 것이 아닌 책”이라고 했다. 또한 인류 전체의 운명에 관한 것이라는 의미로 “모두를 위한 책”이라고 한 것이다.

이 책은 마치 동물원처럼 온갖 동물들이 다 등장한다. 사자 낙타 당나귀 뱀 원숭이 등등. 이 책은 마치 도서관의 서가같다. 모든 작가들이 다 나열돼 있다. 철학가 문학가 사상가, 신화 속 신과 종교의 신까지. 숲속 길을 거니는 것 같기도 하고, 미로를 헤매는 것 같기도 한 책이다.


1883년에 출간된 1부를 시작으로 1년 동안 집필이 계속되어 2, 3부가 각각 출판되었다. 4부는 출판사 없이 40여 부만을 사비로 간행해서 8명의 지인들에게 나눠주기만 했다. 1~4부의 합본은 1892년, 나우만(Naumann)에서 니체 전집을 기획하여 발간되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저자 니체와 책 제목을 보는 즉시 “신은 죽었다”를 떠올렸을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었든 안 읽었든 사는 동안  머리속에 박힌 문장들이 있다.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린 왕자>의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데미안>의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이런 식으로 책 제목만 들어도 언뜻 떠오르는 문장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니체의 “신은 죽었다”일 것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 Die fröhliche Wissenschaft> 의 섹션 108에서 "신은 죽었다"를 처음 썼다.

"부처가 죽은 후에도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동굴 안에서 엄청나게 크고 두려운 그의 그림자를 보여주었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의 방식이 그렇듯이, 앞으로도 그의 그림자를 비추어주는 동굴은 수천 년 동안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그 그림자와도 싸워 이겨야 한다! "

 “신의 죽음”은 단지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떠받쳐온 서구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가치 전체의 위기를 가르친다. 이러한 입장에서 니체는 서구의 신학, 형이상학, 도덕은 물론 학문과 과학에도 침윤되어 있는 그리스도교적 가치, 삶과 힘에의 의지를 억압하는 왜곡된 가치를 폭로하고 비판한다.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 니체 지음. 안성찬, 홍사현 옮김. 책세상 e-book.  해설 안성찬.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살기를 원한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정오에 갖는 최후의 의지가 되게 하라!" 98쪽.

"신은 죽었다"는 그의 말은 실제로 신이 진리의 근원, 도덕의 근원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뜻한다. 우리의 존재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이 우리의 삶에 의미와 목적을 주신 분이라면 신없는 세상과 삶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없는 삶을 살아서 무엇하나? 니체는 '너의 가치를 새롭게 창조하라.'고 요구한다. 초인(Übermensch 위버멘쉬)이 되라는 것이다. 내가? 아니, 초인은 아무나 되나...

신을 믿어야 하나, 안 믿어도 되나? 신을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상황에 처했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를 주제로 선택한 이유는 실제 짜라투스트라가 도덕체계를 창조하고 확립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니체가 그의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에서 밝힌 내용이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를 선과 악의 개념을 조롱하고 기독교와 그 도덕성에 반대하는 대리인으로 내세운다. 신이 죽었다는 것은 플라톤주의의 끝을 의미한다.

Curt Stoeving: 프리드리히 니체, 나움부르크에 있는 어머니 집의 페르골라, 1894, 캔버스에 유채. 105.6×77.3 cm, Klassik Stiftung Weimar .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 조로아스터 Zoroaster

짜라투스트라는 일반적으로 페르시아 종교의 창시자로 제시된다. 어디에서 태어났고 생애 전반기를 어디서 보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리스인과 대부분의 서구 세계에서는  "조로아스터"라고 부른다.

니체의 책 속 짜라투스트라

선과 악 사이의 투쟁으로 정의되는 우주를 생각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책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의 개념을 초월하여 영원회귀를 품은 초인에 대해 설파한다. 자신이 초인임을 의미하는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책의 네 번째 부분(마지막)에서 마침내 영원회귀를 받아들일 때 그는 초인이 된다.

초인에 대한 니체의 개념은 완전한 자유의 이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초인을 제한하거나 통제하는 것은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초인은 자신의 창조자다.


책은 짜라투스트라가 10년 동안의 고독을 끝내고 산 속 동굴에서 내려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지혜와 사랑이 넘치고 인류에게 초인에 대해 가르치고 싶어한다.

처음 세 부분의 대부분은 짜라투스트라가 전한 개별 교훈과 설교이다. 내용은 니체 철학의 일반적인 주제 대부분을 다루지만 종종 매우 상징적이고 모호한 형태를 띤다. 초인을 향한 투쟁은 산을 오르는 것으로, 초인의 경쾌한 자유정신은 웃음과 춤으로 상징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육신과 이 땅에 대한 증오로 영혼과 내세를 믿는다고 말한다. 강한 자들은 투쟁하고, 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종교, 민족주의, 민주주의 또는 다른 도피 수단으로 향한다고 설파한다.

짜라투스트라 설교의 절정은 모든 사건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영원회귀” 교리이다. 제4부에서 그는 초인의 지위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초인의 위치에 근접한 많은 사람들("보다 높은 인간")을 그의 동굴에 모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잔치와 노래를 즐긴다. 이 책은 짜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모든 기쁨은 깊은 것을 원하고, 깊은 영원을 원한다"는 생각으로 끝을 맺는다. 짜라투스트라의 말과 행동은 성경의 복음서를 연상시키고 성경적 암시로 가득 차 있지만, 성경이나 거룩한 경전의 개념을 달리 해석한다.

우리는 권력 의지의 원리를 모든 것의 근본적인 추진력으로 파악함으로써 니체의 철학, 특히 짜라투스트라의 철학 전체에 접근할 수 있다. 종교, 도덕, 진리 및 기타 개념은 모두 삶을 지배하는 동일한 권력 투쟁에 종속된다. 만물의 특징은 끊임없는 고군분투, 노력, 극복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제자리에 너무 오래 고정되어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영속성과 고정성은 단순한 환상이다.

초인은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로 창조되었다. 그의 성격, 가치관, 정신은 모두 그가 의도한 그대로다. 그런 의미에서 초인은 완전히 자유롭고 절대적으로 강력하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니체의 책중에 처음으로 읽는다면 활자읽기에 쏟는 에너지 낭비가 되기 십상이다.(과문한 나만 그런가...) 신약성서의 4복음서라도 읽은 사람은 읽기의 흐름은 좀 부드러울 것이다. 니체에 대한 이해없이 이 책을 읽기는 어렵다. 니체의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를 먼저 읽으면 좋겠다. <도덕의 계보 Zur Genealogie der Moral>와 <우상의 황혼 Götzen-Dämmerung >을 읽은 후 <짜라투스트라는 ~ >를 읽는다면 니체의 사상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짜라투스트라~ >를 읽고 또 읽어도 이해가 잘 안간다면? 자신의 독서력에 자괴감을 가지지 마시라. 니체가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 Ece Homo>에서 이렇게 말했으니까.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은 - 즉 진정으로 그것을 체험했다는 것- '현대인'이 도달 가능한 최고의 생존 수준에까지 올라간 것을 의미한다. 이런 거리감을 내가 느꼈을 때, 어떻게 내가 아는 현대인에게 그러한 것을 기대한단 말인가!" <도덕의 계보/이 사람을 보라> 236쪽. 김태현 옮김. 청하출판사. 2011. 18쇄.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크다.


1부:

짜라투스트라의 서설

서른 살에 짜라투스트라는 광야로 가서 그곳에서 고독을 즐기며 10년 동안 머문다. 마침내 그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서 그의 넘치는 지혜를 나누기로 결심한다.

마을에 도착한 짜라투스트라는 초인을 선포하며 설교를 시작한다. 사람들에게 이 세상과 이 삶에 충실하고, 인간적인 행복, 이성, 미덕, 정의, 연민을 경멸할 것을 촉구한다. 사람들은 짜라투스트라를 비웃는다. 선인과 의인, 참된 믿음을 믿는 사람들은 그를 미워한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는 이러한 법과 가치의 파괴가 영광스러운 창조 행위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프롤로그에는 니체의 책중에 대중의 의식에서 가장 크게 떠오르는 두 순간, 즉 신의 죽음에 대한 선언과 초인에 대한 선언이 포함되어 있다.

초인은 신이 없는 세계에 직면하고,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아직 하나님 개념의 파산을 인식하지 못한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과 ”참 믿음을 믿는 사람들"을 화나게 한다.  일반 인간은 신이나 과학, 진리 등 무엇인가를 믿어야 하는 반면, 초인은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초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것을 새로운 도덕의 창조라기보다 새롭게 보는 방식의 창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인간이 춤추는 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에 오히려 혼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그대들은 아직도 그대들의 내부에 혼돈을 가지고 있다." 18쪽.

별 – 약동하는 이상, 또는 초인의 상징.

혼돈을 가지고 있다 – 무궁한 발전성을 지닌 활력을 뜻함.

예수와 달리 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목자가 되어 양 떼를 이끄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창조하는 자들과, 수확하는 자들과, 기뻐하는 자들의 동료가 되리라. 그리고 그들에게 무지개를, 초인에 이르는 계단을 보여주리라. " 27쪽

초인 (Übermensch 위버멘쉬)   인류의 목표. 초인은 자신을 완전히 극복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준 법 외에는 어떤 법도 따르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의 편견과 가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자제력, 창조적 의지, 강한 권력 의지를 의미한다. 초인은 허무주의에 대한 해결책, 우리 삶에 부여해야 할 의미이다. 니체의 초인 개념은 초인은 동물에게 없는 자제력과 인간에게 없는 자유분방한 본능과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일반 인간과 초인의 차이점은 우리는 신이나 과학, 진리 등 무엇인가를 믿어야 하는 반면 초인은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에서는 짜라투스트라가 "초인"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정신이 어떻게 해서 낙타가 되고, 낙타가 어떻게 해서 사자가 되며, 마지막으로 사자가 어떻게 해서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차례로 설명하겠다." 29쪽.

세 가지 변화 – 참된 자기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정신적 단계를 뜻한다.

자기를 버리고 타인이나 전통적 가치에 철저히 복종하는 낙타의 정신,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해 철저히 부정하는 사자의 정신, 정신과 육체가 참된 자기로서 통합되는 최후의 단계인 어린아이의 정신이 된다.

"어린아이는 천진무구 그 자체이며 망각이다.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며 쾌락이다.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시원(始原)의 운동이며 신성한 긍정이다." 31쪽.

초인을 향한 진보에는 낙타, 사자, 아이의 세 단계가 있다. 첫째는 지식과 힘을 위하여 안위를 버리고 절제하며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는 것이다. 둘째, 외부의 모든 영향과 명령에 "아니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독립성을 주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창조의 행위가 온다. 정말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초인임에 틀림없다. 나같은 범인은 첫째 단계에서부터 미끄러질 것이다.

"배후세계론자에 대하여"에서는 우리는 영이 아닌 육으로 만들어졌으며, 우리의 육체적 필요가 우리의 가치와 욕구를 결정한다고 한다. 아프거나 불만족스러운 사람은 본질적으로 영이라고 주장하며 이생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과 내세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영원히 불완전한 이 세계, 영원하고도 모순에 찬 모조품 – 그것을 만들어낸 불완전한 조물주에게도 도취적인 쾌락 – 일찍이 내가 생각했던 세계였다. 아아, 형제들이여, 내가 창조한 이 신은 모든 신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인간의 망상이었다. 그 신은 인간이었으며 그것도 인간과 자아의 비참한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유령은 나 자신의 잿더미와 나 자신의 불길에서 내게로 온 것이다.

모든 배후 세계를 만들어낸 것은 고뇌와 무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고뇌하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순간적인 행복의 광기였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단 한 번의 필사적인 도약으로 궁극적인 것에 도달하려는 권태, 더 이상 의욕적이라 하지 않는 권태, 그것이 모든 신들과 배후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37쪽

"죽음의 설교자에 대하여"는 영생에 대한 짜라투스트라의 분석이다.

영생에 대해 설교하는 사람들은 인생은 고통이지만 내세를 준비하기 위해 견뎌야 한다고, 이생의 포기를 설교하는데, 짜라투스트라는 이 지구가 유일한 지구이며 기본적으로 물리적인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반박한다. 내세나 신에 대한 믿음은 이생에서 구제를 원하는 병든 몸이 발명한 것이라고 한다. 건강한 몸은 신이나 다른 세계가 필요하지 않고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천 개를 위한 하나의 목표"라는 장은 짜라투스트라가 "천 명의 민족"이 있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되었다. 각각은 선과 악에 대한 고유한 개념을 가지고 있고, 종족에 대한 고유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라는 중요한 용어가 언급된다. 이 의지는 우주의 모든 변화를 유발하는 근본적인 원동력이다. “초인”은 자신을 위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와 힘을 얻은 권력 의지의 궁극적인 표현이다. 초인의 완전한 권력 의지의 표현은 짜라투스트라가 설파하는 천 번째 목표이다. 몸은 죽어도 정신과 대의는 계속 살아있을 것을 믿는 의지이다.

권력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과 의지 사이의 극복은 우주의 어떤 것도 오랫동안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을 수 없음을 뜻한다. 따라서 모든 우주는 유동적이다. 권력에의 의지는 폭력과 물리적 지배를 통해 발현될 수 있지만,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를 내면으로 돌려 타인에 대한 지배보다는 자기 지배를 추구하는 승화된 권력에의 의지에 더 관심을 갖는다.

"나누어주는 덕에 대하여"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길을 선택하라고 촉구한다. 목표한 산을 오르는 어려움과 정상에서의 보상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산을 오르도록 안내할 수는 없다.

"나는 진실로 그대들에게 권하건데 내게서 떠나라. 그리고 짜라투스트라에게 저항하라! 언제까지 제자로만 머물러 있는 것은, 스승에 대한 보답이 아니다. 그런데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의 월계관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가? 그대들은 나를 존경한다.

이제 나는 그대들에게, 나를 버리고 자신을 찾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그대들이 모두 나를 부인하기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나는 그대들 곁으로 돌아오리라." 98쪽.

우리 사회의 발전은 어떻게 진행돼왔는가를 생각한다. 부모보다 나은 자식, 스승보다 나은 제자, 이런 식으로 변해오지 않았던가? 나보다 나은 자식이 자랑스럽고, 나보다 나은 제자에 칭송을 보내고, 세상은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물론 발전한다는 그것에 인격까지 해당되지는 않는다. 지식이야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2부;

“타란튤라에 대하여”에서 짜라투스트라는 민주주의, 평등, 정의를 설교하는 사람들을, 환상적인 평등주의에 빠진 사람들을 "타란툴라(독거미)"라고 부른다. 그들은 비밀리에 복수의 독을 퍼뜨린다는 것이다.

“나는 영혼을 혼란에 빠뜨리는 그대들에게 비유로써 이렇게 말한다. 그대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타란튤라이며 복수심을 품은 채 몸을 숨기고 있는 자들이다.”122쪽.

짜라투스트라는 오히려 불평등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인간 상승을 이야기한다. 힘이 지배하는 불평등의 세계에서 각자의 이상을 펼치자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인간의 고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독서에는 연관독서가 따라붙는다. 저자의 사상을 한 책에서만 피력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책에 나누어서 점진적으로 발전시키거나, 중복된 글을 쓰면서 이론을 더욱 확고하게 다지기 때문이다. 니체 역시 자신의 사상을 여러 책에 걸쳐 펼쳐놓았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Eine Streitschrif>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발견되는 고대 귀족의 "주인 도덕"과 하층 계급과 사제 계급 사이에서 발전한 "노예 도덕"을 뚜렷하게 구분한다. 약자는 주인의 힘에 분개하고, 주인에게 복수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에 더욱 분개한다. 그들은 이생에서 어떤 실질적인 방법으로도 반격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은 후에 복수할 내세와 신성한 정의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 신성한 정의는 스스로 정의를 확보하기에는 너무 약한 백성이 발명한 것이다.

현실에서 해결책이 없는 사람들은 그럼 어쩌란 말이냐? 이생과 다른 내생이라도 바라보고 살아야하지 않는가. 내세를 믿는 사람들. 아들을 하늘에 먼저 보낸 어머니가 자신도 죽은 후에 아들이 있는 하늘에 가서 아들을 만난다는 희망으로 생을 버티는 어머니를 나는 안다. 이런 사람에게 내세가 없다는 것은 너무 잔인한 말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약한자들을 복수심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

“나는 그대들의 거미줄을 걷어버린다. 왜냐하면 ‘인간이 복수의 굴레로부터 구원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희망에 이르는 다리이며, 오랜 폭풍우 뒤에 나타나는 무지개이기 때문이다.” 122쪽.

“자기초극에 대하여” 모든 생명이 힘을 얻기 위해 애쓴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힘의 의지, "권력의 의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삶은 내게 이러한 비밀을 말해 주었다. ‘보라,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한없이 반복해서 초극해야 하는 존재’이다. 142쪽.

나를 지배하는 커다란 힘을 누르고 이겨내는 것, 그 힘은 자기 극복과 자기 지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말이 있는데 자기를 극복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를 이기지 못하면 외부의 아무것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니체는 인간이 부분적으로는 창조물이고 부분적으로는 창조자라고 말한다. 우리 안에 있는 창조자가 우리 안에 있는 창조물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한다. 초인은 자신을 완전히 극복한 사람으로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

“대 사건에 대하여”에서는 개인주의자 니체의 분노가 표출된다.

바다 한 가운데 끊임없이 연기를 뿜어대는 화산섬에 머물던 짜라투스트라가 ‘불의 개’를 만나고 닷새만에 사람들 앞에 나섰다.

니체는 혁명의 시대인 19세기 중반에 소년시절을 보냈다. ‘불의 개’는 지옥문을 지키는 개에서 나온 말인데 사회주의적 혁명가와 폭력적 혁명가를 상징한다. 사회주의를 혐오한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를 통하여 대중 앞에서 교회와 국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혁명에 뛰어든 국가와 교회는 온갖 자만심의 소리를 질러대지만 실제 상황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개인의 무덤일 뿐이라는 것이다.

"처세의 지혜에 대하여"는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느 길을 걸을 것인지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두터운 책을 읽지만 우리에게 화살처럼 꽃히는 것은 책 한권이 아니라 어떤 문장, 한 단어이다. 그 작은 부분을 붙잡고 깊은 생각에 빠지는 것이 바로 독서가 주는 힘일 것이다.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해결에 접근할 수 있는 지혜를 준다.

“두려운 것은 정상이 아니라 비탈이다! 시선은 아래쪽을 향해 던져지고 손은 위쪽을 움켜잡는 비탈, 거기에서 마음은 자신의 이중적 의지로 인하여 현기증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아, 벗들이여, 그대들은 내 마음의 이중적 의지를 고찰할 수 있는가? 나의 시선은 드높은 곳을 향해 돌진하고 나의 손은 심연에 매달려 그곳에 의지하고 있다. 그것이 나의 비탈이며 또한 나의 위험이다." 178쪽.

이중적 의지는 긍지와 현명의 이중적 개념을 뜻한다. 갈증으로 인해 죽지 않으려면 어떠한 잔으로라도 마셔야 한다. 그리고 청결을 유지하려면 더러운 물로라도 자신을 씻어야 한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부분. 1509년, 왼쪽 별이 박힌 지구본을 들고있는 사람을 조로아스터로 본다.


3부:

“환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는 책의 핵심이라 할 수도 있는 “영원회귀” 사상이 펼쳐진다.

짜라투스트라가 자갈밭에 난 오솔길을 걸으며 위를 향해 올라갔다.

“위를 향해---나의 발을 아래로 잡아당겨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악령, 나는 악마이며 최대의 적인 중력의 영에게 반항하면서.

위를 향해---반은 난쟁이이고 반은 두더지인, 절름발이이고 남까지 절름발이로 만드는 이 악령이 나의 귓속에 납을 퍼붓고 나의 뇌속에 납과 같은 사상을 주입시키면서 나를 깔고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위로 올라갔다.” 193쪽.

책에는 많은 상징언어들이 등장하여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상징속에 가려진 본뜻을 찾느라 한참을 더듬는다. 이만큼 읽으니 이제 상징풀이에 훈련이 됐다. “난쟁이”는 우리가 아는 대로 성장을 멈춘 존재로 상승을 거부함을 상징한다. “두더지”는 햇빛을 싫어하는 염세사상을 상징한다. “악령”은 물체를 지구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을 뜻한다. 위로 오르기에는 최악의 조건이다. 우리에게 중력의 정령, 악령은 무엇일까? 모두 각자에게 ‘악령’은 다르겠지만 책에서는 신앙과 도덕을 암시한다. 짜라투스트라는 계속 오르고 또 오른다. 결국은 아래로 떨어지는 중력을 거스르며 위로 오른다. 그것은 용기이다. 죽음까지도 극복하는 용기.

영원회귀 교리는 시간이 무한하다면 모든 사건은 언젠가는 반복된다는 주장이다. 과거가 무한히 뒤로 뻗어 있다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이미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그 논리에 따르면 바로 이 순간은 과거 어느 시점에 일어났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래가 무한하다면 이 순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미래의 언젠가 다시 반복된다는 설이다. 들뢰즈(Gilles Deleuze1925-1995)는 이것을 우주가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의 상태에 있고 고정이나 존재의 순간이 없다는 표현으로 읽는다. “영원회귀”에 대한 니체의 생각은 아마도 들뢰즈와 같을 것이다.

“해뜨기 전에”는 니체의 ‘우연(Zufall)’ 개념을 설명한다. 

“모든 사물 위에는 우연이라는 하늘, 순진무구함이라는 하늘, 예측할 수 없는 하늘, 자유분방함이라는 하늘이 걸려 있다. 내가 이렇게 가르칠 때 그것은 실로 축복이며 모독이 아니다. ‘예측할 수 없는 하늘’---이것이야말로 이 세계의 가장 오랜 귀족이다. 이것을 나는 모든 사물에게 되돌려 주었다. 나는 일체의 사물을 목적의 예속에서 구제해 주었다.” 205쪽.

짜라투스트라는 하늘을 모든 이성과 목적 위에 있는 존재로 칭송한다. 궁극적으로 우주는 이성과 목적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과 사고에 의해 지배된다. 우주와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으로 니체는 ‘우연’을 꼽는다. 왜 존재하는 지 모른다. ‘뜻밖’이다. 합리성이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는 우주를 니체는 ‘우연’이라 한다.

“세 가지 악에 대하여”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세 가지 악을 저울에 올려놓는다. 육욕, 지배욕, 이기심이다. 이것들의 무게는 어떨까? 저울추는 어디를 가리킬까? 나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이 세 가지 악의 무게가 아주 클 것같다. 그러나 저울은 예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저울은 수평을 유지한 채 멈추어 있다. 내가 저울대 한쪽에 세 가지 무거운 질문을 올려놓자 다른쪽에 세 가지 무거운 대답이 놓여졌다.” 236쪽.

‘육욕’을 추하게 여기는 이들에게는 악이지만, 어떤 이들에겐 즐거움일 수 있다. ‘지배’는 "권력에 대한 의지"를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일 뿐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변화와 개선을 주도하는 힘이다. 복종하는 사람들에게만 악으로 보인다. ‘이기심’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즐기는 것 이상이다. 자신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있는 사람만이 이기심을 악으로 여긴다. 생각해보면 "악"으로 간주되는 것은 특정 도덕적 관점에서만 "악"으로 간주된다. 물론 정도에 따라 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경계를 넘으면.

“낡은 목록과 새로운 목록에 대하여”는 30개로 나뉜 주제글이다. 니체 철학의 많은 주제를 간략하게 다룬다. 장 전반에 걸쳐 짜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옛 도덕의 낡은 석판(십계명 돌판을 암시함)을 부수라고 촉구한다. 고정된 도덕률이 있다고 설교하는 사람들은 삶의 역동성을 부정하려고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창조자가 되라고 촉구한다.

"그들은 저 낡아빠진 착오 위에 앉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낡아빠진 교단을 뒤집어엎으라고 명령했다. 또한 나는 그들에게 위대한 덕의 대가, 시인들, 세계 구원자들을 비웃으라고 명령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침울한 현자들과 검은 허수아비처럼 생명의 나무 위에 위협적으로 앉아 있는 모든 자들을 비웃으라고 명령했다." 247쪽

짜라투스트라의 설교는 기독교의 도덕이나 염세주의적 도덕의 설교자들을 비난했다. "교단을 뒤집어엎으라"는 명령은 마치 예수가 성전을 뒤엎은 장면처럼 눈에 선하다.

예수가 설교하는 기독교는 종종 니체 자신의 견해와 상반되지만(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 니체는 자신의 도덕적 관점을 창조할 용기와 의지를 가진 예수를 존경한다. 유대인에 대한 그의 태도도 그렇다. 그는 유대인을 '복수'라는 노예 도덕의 창시자로 보고 경멸하는 반면에 유대인들이 모든 단점을 장점으로 바꾼 의지와 독창성을 깊이 존경한다.


4부:


처음 9개의 장에서 우리는 부분적으로 니체 자신을 조롱하기 위한 모든 종류의 캐리커처를 본다. 마지막 11개 장은 짜라투스트라의 그림자가 들려주는 유쾌하고 경박한 노래에서 절정에 이르는 더 가벼운 마음을 담고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사이로 한 번 더 내려가는 대신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오기를 기다린다. 짜라투스트라가 자신의 동굴에 초대한 여러 사람들이 등장한다. 거머리, 마술사, 가장 추악한 사람, 자진하여 거지가 된 사람 등등이 4부의 각 부분을 차지한다.

“왕들과의 대화”에서 숲길을 걷던 짜라투스트라는 당나귀를 몰고 오는 두 사람을 만난다. 그들은 안락함과 부를 포기하고 더 높은 사람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 왕들이다. 당나귀는 짐을 싣고오는데 ‘당나귀’속에 숨은 뜻은 창의력, 판단력, 선악 구별등이 분명치 못한 민중들을 상징한다. 니체가 글을 쓰던 이 무렵은 대중혁명의 시대였다. 왕권이 무너지고, 대중들은 혁명의 승리에 취해있었다. 세상은 빠르게 천박해져갔다.

“우리들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쳐 온 것인가? 그것은 ‘훌륭한 풍습’으로부터가 아닌가? 우리들의 ‘상류사회’로부터가 아닌가? 진실로 우리들이 도금되고 가짜이고 가장한 천민들과 함께 살기보다는, 은둔자들과 양치기들 사이에서 사는 편이 낫다.” 306쪽.

“우리들은 지금 천민들을 피해 도망쳐 온 것이다. 이들 절규하는 자들과 글을 쓰는 쇠파리와 장사꾼들의 악취, 발버둥치는 야심과 구역질나는 악의를 피해. 천민들 사이에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구역질나는 일인가! 혐오스럽다. 천민들 사이에서 제1인자인 척하다니!” 307쪽.

쇠파리는 잡문 따위를 쓰는 저술가를 비유하고, 악취는 왕권과 장사꾼의 결탁에서 오는 부패를 상징한다.

짜라투스트라는 두 왕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왕들이 더 높은 사람을 찾고 있다고 말하자 짜라투스트라는 기뻐하며 그들을 자신의 동굴로 초대한다.

"만찬"은 널리 알려진 예수의 "최후의 만찬"이 연상된다. 최후의 만찬은 기독교 예배의 중심인 성만찬의 순간이다. 이 엄숙한 율법의 순간이 짜라투스트라에게는 웃음의 순간이 된다. 그는 웃고 기쁨을 추구하고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심각한 것은 무엇이든 조롱하라고 권고한다.

"보다 높은 인간에 대하여"는 니체의 생각을 요약한 20개의 단문들로 나뉘어져 있다. 신은 이제 죽었고 초인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정복해야 한다. 자기 극복에는 악, 고통, 자기 동기부여, 고독이 필요하다고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주변의 "더 높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초인이 아니라고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설교한다.

"신은 이미 죽었다. 그대, 보다 높은 인간이여! 이 신은 그대에게 가장 큰 위험이었다. 그가 무덤 속에 들어가고 난 다음 비로소 그대들은 되살아났다. 이제야 비로소 위대한 오정이 다가온다. 이제야 비로소 보다 높은 인간이 주인이며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359쪽.

오정은 인류 최고의 자기 성찰의 때를 가리킨다.

"각성""당나귀의 축제"는 구약성서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가지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오던 때와 같은 이야기다. 짜라투스트라가 동료들과 그가 중력의 영을 쫓아낸 것에 만족해할 때 그때 왕의 당나귀에게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기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내용(출애굽기32장)이다.

짜라투스트라는 당나귀에게 기도한 손님들에게 뛰어들어 꾸짖는다.

"오, 그대 교활한 바보들이여! 그대 광대들이여! 어찌하여 그대들은 내 앞에서 그대들 자신을 위장하고 숨기는가!" 398쪽.

그러나 짜라투스트라는 이것을 회복되어가는 징조로 받아들인다.

"그대,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이 밤과 이 당나귀의 축제를 잊지 마라! 그대들은 그것을 나의 동굴 속에서 생각해냈으며, 나는 그것을 좋은 전조라고 생각한다. 오직 회복되어 가는 자들만이 그런 생각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그대들이 다시 이 당나귀의 축제를 벌인다면 그대들 자신과 나를 위해 벌여라! 그리고 나를 기념하기 위해서!" 399쪽.

"징후"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이다.

짜라투스트라는 그의 동굴 밖에서 사자를 발견하고 초인이 오고 있다는 신호로 여긴다. 의기양양하게 일어나 자신의 마지막 죄인 '더 높은 인간'에 대한 연민을 극복했음을 깨닫는다.

"자! 사자가 왔다. 나의 자식들이 가까이 왔다. 이제 짜라투스트라는 완전히 성숙했다. 나의 때가 온 것이다! 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대낮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 솟아라, 솟아라, 그대 위대한 정오여!'" 413쪽.

사자의 모습은 1장 '세 가지 변태에 대하여'에서 사자를 초인이 되는 과정의 두 번째 단계로 표현한 것을 암시한다. 사자의 뒤를 이어 순진한 창조주인 아이가 뒤따른다. 사자를 본 짜라투스트라는 "나의 자식들이 가까이 있구나, 나의 자식들이"라고 말한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짐을 말하는 장면이 상기된다.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 것이다.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이사야서 35장.


니체는 <짜라투스트라~ >를 18개월동안에 썼다. 그 동안에 또 다른 책 <즐거운 학문>과 <생의 찬미가>를 쓰기도 했다. 놀라운 일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피날레 부분은 리하르트 바그너가 베니스에서 죽은 그 신성한 시각과 꼭 일치하는 시각에 완성되었다. 이 책의 잉태 기간은 18개월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도덕의 계보/이 사람을 보라> 267쪽. 김태현 옮김. 청하출판사. 2011. 18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dvard_Munch_-_Friedrich_Nietzsche.jpg 

Edvard Munch <Friedrich Nietzsche> 1906. 캔버스에 유채, 템페라. 201x130cm. 뭉크뮤제움,오슬로,노르웨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작가 니체 자신의 평가.

"나는 인류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물을 안겨다 준 것이다. 앞으로 수 백년 동안 퍼져나갈 목소리를 가진 이 책은 현존하는 최고의 책이며 그것은 바로 저 높은 산의 공기이며 인간에 대한 모든 사실이 고산의 저 아득한 밑바닥에 놓여져있다. 그것은 또한 가장 심오하고 진리의 가장 깊숙한 보고에서 탄생하였고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은 샘이며, 그 샘에 두레박을 내리면 황금과 선(善)이 가득 담겨져 올라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도덕의 계보/이 사람을 보라> 191쪽. 김태현 옮김. 청하출판사. 2011. 18쇄.

어떻게 이렇게 자기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극찬을 할 수 있을까?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극치, 시쳇말로 '자뻑'의 극치다. 그러나 '자뻑'을 역겨워하지만 마시라. 그만큼 읽을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어렵고 긴 책이지만 한 줄로 이 책은 이런 책이야,하고 설명을 하자면 "이 책은 멈춰있지 말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시 창조하라는 것이다. 초인이 되기까지."

니체는 이 책에서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눴다. "짐승/동물/인간말종"과 "초인의 지위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초인의 위치에 근접한 많은 '보다 높은 인간'"과 "초인"으로. 나는 어디에 속할까를 생각해본다. 인간말종이란 어감이 너무 험하니 내가 거기 속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기 싫다. 물론 초인 역시 꿈에도 이룰 수 없는 경지이고. 그럼 나는 '보다 높은 인간'은 되는 걸까? 안타깝게도 여기에 나를 세우는 것도 민망하다. 사람이 염치가 있지, 어떻게 내가 그 위치라고 자평할 수 있겠는가. 그냥 짐승에서는 좀 벗어난 보다높은 인간쪽으로 기어가고 있다고 치자. 나의 목표는 초인이 아니라 보다 높은 인간까지인가?

니체는 동물과 초인 사이의 다리로서의 인간 이야기한다. 인류가 목적지가 아니라 전환기라는 주장이다. 더 큰 이익을 위해 본능을 통제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동물이 아니다. 일부 자연적 충동에 저항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문명을 구축하고 지식을 발전시키며 영적으로 깊어질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우리의 의지를 외부로 향하게 하는 대신, 우리는 그것을 내부로 향하게 하고 자제력을 얻었다. 그러나 자제력을 위한 이 투쟁은 힘들고 인류는 끊임없이 포기하려는 유혹을 받는다는 이론이다. 그 누구보다도 나는 그런 유혹에 약한 사람이라고 자각한다.

동물의 비유를 보자. 글도 쓰고, 손으로 책도 만들고, 가끔은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연하는 나는 어느 동물에 해당하는지. 아직은 낙타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왜 낙타인가? 기술에 대한 숙달과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어질 길고 신중한 연구의 무거운 과제를 등에 진 낙타다. 그 짐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지지 못했다. 이 짐을 벗어던져야 사자가 된다. 다른 예술가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립성을 주장할 수 있는 힘센 사자, 나는 언제쯤 사자가 될 수 있을까? 사자는 다시 변태하여 어린 아이가 된다는데, 어린아이는 새로운 생명이라는 뜻,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 스타일을 개발하여 완전히 새롭고 개인적인 나의 것을 만들수 있을 때 드디어 낙타와 사자의 변태 과정을 거쳐 어린아이가 될 수있다. 아이가 되면 좋겠다는 꿈을 꿔도 죄는 아니겠지... 꿈꾸는 게 무슨 죄가 되나?


니체의 '영원회귀'를 접하며 이전에 슬쩍 스쳐갔던 들뢰즈가 떠올랐다. 들뢰즈의 이론에 따르면 "되기의 존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영원회귀'아닐까. 정지되지 않고 움직이는 생성 상태, "되기"와 같은 느낌이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존재의 최종상태가 있었다면 이미 도달했을 것이다. 움직이는 초기 상태가 있었다면 결코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들뢰즈의 "되기" 니체의 "변화"를 비슷한, 또는 같은 걸로 이해하는 것은 내가 아직도 뭘 잘 몰라서 그러는지... 니체의 우주 개념에서 진정한 하나의 신이나 하나의 고정된 도덕같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영원히 반복된다.


<짜라투스트라 ~ >를 읽으며 식탁에 앉으면 옆지기와 책 얘기를 많이 했다. 그의 생각과 니체의 생각이 겹쳐보이는 곳이 많다. 그는 <소설 예수>에서 하느님은 더 이상 안계시다, 우리를 떠나셨다고 썼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와 같은 맥락이다. 니체는 신이 우리를 창조했다고 우리를 신에게 의지하지 말고, 신은 없으니 우리 스스로 다시 우리 자신을 창조하라고 설득한다. 그럼 우리가 창조주가 된다는 거야? 우리가 신이 되는 건가? <소설 예수>에서는 하느님이 하늘에서 걸어내려와 우리들 속으로 스며 들었다고 말한다. 우리 곁을 떠나 우리 속으로 들어왔다고 썼다. 내 안에 있다. 그러면 내가 하느님이라는 거야? 불경죄!

"어머나, 당신이 니체에 버금가는 위대한 철학자네!" 진심 반, 장난 반, 그를 추켜세운다.


허무주의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허무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 매력을 느꼈고, 그런 기분으로 허무주의를 이해했었다. 성경을 읽으면서는 전도서의 첫구절처럼 "헛되고 헛되도다"가 허무주의인 줄 알았었다. 바니타스 개념으로 이해했던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물론 오래전에 바니타스와 니체의 허무주의 개념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무주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19세기 후반 유럽을 허무주의적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이 우리 삶에 의미와 목적을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니체는 목적 없이는 우리가 평범하고 안락한 꿈의 세계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 나이가 되고보니 인생무상을 느낀다. '인생무상人生無常' 이런 감상적인 마음은 니체의 허무주의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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