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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Sep 05. 2023

<냉소자의 달콤한 상상> 홍석준

책 리뷰

<냉소자의 달콤한 상상> 홍석준 지음. 바이북스 출판. 2023. 초판2쇄. 235쪽.


아, 르네 마그리트!

표지는 책의 성격을 암시한다. 암시가 아니라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책 한 권 속에 들어있는 활자들이 이미지화한 것이 바로 표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분명히 초현실주의 작품일 테다. 달콤한 상상은 꿈과 환상이니.(이 문장은 저자의 문체를 패러디한 것이다. “ㅇㅇㅇ 테다. ㅇㅇㅇ(이)니.” 책을 읽어가는 중에 가끔 등장하는 문장이니 저자의 문장 스타일, 문체라고 할 수 있겠다.)


“뒤집어야 비로소 보이는 답답한 세상의 속살.”이라는 설명이 있고 책은 3부로 구성되었다.

1부 구별에 따른 차별이 사라진. 2부 믿던 모든게 달라진. 3부 더 이상 편리할 수 없는. 각 부마다 intro 글로 책읽기를 안내한다. “고요하지만 굳센 글의 힘을 믿는다.“는 저자의 글이 얼마나 강한지 살펴본다.


저자는 브런치스토리 이웃 작가이다. 출간된 책을 접하기 이전부터 그의 글을 오랫동안 읽어왔다. 시니컬하다는 느낌이 컸다. 어떤 때는 '독특하다' '창의적이다' '선각자다' 이런 느낌이었고, 어떤 때는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사회 부적응자인가?'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의 나가는 방향은 의지에 차있었고 연장자인 독자로서 응원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소신있는 행동이었다. 첫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는 아직은 굳지않은 땅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이었다. 두번 째 책 <퇴사라는 고민>에서는 그의 사회적인 갈등을 느꼈다. 물론 나는 '육아'와도 '퇴사'와도 전혀 관계없는 독자이다. 모두가 지나온 길이었다. 게다가 나는 참 순종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반항'은 동경이었을 뿐이다. 그런 내가 홍석준 작가의 글을 읽으며 재미를 느꼈다. 자유로운 생각이 부러웠다. '그래, 당신들 세대는 이렇게 나가야지, 겁내지 말고, 개척자처럼.' 이런 응원의 마음으로 그의 글에 슬슬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세 번 째 책 <냉소자의 달콤한 상상>까지 읽었다. 어른에게 말대꾸 한 번을 제대로 못하고 살아온 노인이 자식 세대의 냉소자가 쓴 글을 살펴본다.



1부 구별에 따른 차별이 사라진.

"달콤한 불법 MBTI" 책은 MBTI( Myers-Briggs Type Indicator 심리검사) 이야기로 시작된다. 사람들은 왜 유형을 나누고 분리하는데 재미를 붙이는 것일까? 혈액형에 따른 성격이 어쩌네저쩌네 해가면서 입방아를 찧던 시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지적한다. 내가 나로서 존재한다기 보다는 어느 부류에 속한 집단 속의 한 개체로 존재하는 것같은 떨떠름한 기분이 읽힌다. 나는 그냥 나라고! MBTI 분류 속 어느 한 점이 아니라 그냥 나라고! <퇴사라는 고민>에 빠졌던 작가의 마음이 드러난다.

"혼자 남아야 멈출 수 있는 본능", "마음을 얻을 기회는 딱 세번", "딱 한 번 바꿀 수 있다면"에서는 현실 사회풍조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외모, 성적(대학), 아파트 평형, 자동차, 직업, 연봉, 주식, 부동산이 사람의 가치를 말한다. 수치화된 인간평가의 슬픈 현실이 그려져있다. 이 책의 글은 꿈 이야기로 시작하여 꿈을 깬 현실로 돌아오는 형식이 있고, 현실로 직접 시작하는 형식이 있다.

작가가 그린 꿈은 다분히 초현실적인 내용이다. 여기서 독자는 꿈을 환상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환상은 문자 그대로 환상일 뿐이다. 실제로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환타지이다. 초현실의 세계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찾아간 무의식의 공간이다. 무의식의 초현실적인 공간은 의식의 세계에 적지않은 영향력을 끼친다. 작가는 꿈 이야기를 현실로 끌어들여 요원하지만(?) 문제의 해결에 접근하고자 한다.

성별을 바꾼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세상이다. 생물학적인 원형을 물리적으로 바꾸는 것까지 가능해진 시대이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은 남녀의 차이를 고정화시키고, 차별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다. 전업주부, 2세의 주양육자인 저자의 <아빠육아 업데이트>가 소환되는 단원이다. 사회적 젠더문제에 접근했는데 바짝 달라붙어 깊이있는 지론을 펼쳤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경력 단절 남성 주부 모임"에서 작가는 재잘재잘 수다를 떤다. 카페 주부들 미팅 테이블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현장중계를 하는 것 같다. 일반적인 여자와 남자의 주부 역할이 뒤바뀐 상태다. 힘들다는 푸념이다. 힘든 것을 감래하는 행위가 인류의 존속을 위해 필요한 것임을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남자나 여자나. 만약 남자주부들 수다의 끝이 희망으로 연결된다면 어떤 수다가 이어졌을까?

"그러니까 대학이나 다니지!"는 대학이 취업 사관학교가 된 현실이 아프다. 줄세우기 대열의 꽁무니에 서있는 자는 인격조차도 꽁무니인 것으로 취급받는 세태가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유치원, 아니 그 이전 유아 때부터 좋은 대학에 갈 목표에 인생을 건다. 결과는 거기에 이르는 과정의 수단을 정당화시킨다. 옛말처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풍조가 만연한 사회는 결코 미래로 나갈 수 없다. 현재에 머물기도 어려울 것이다. 퇴보, 뒷 걸음질 칠 뿐이다.

"일해서 돈 벌면 바보", "귀한 막노동과 천한 의사 사이에서"는 오래묵은 반상(班常)의 사회 의식을 비판한다. 조선시대에 양반과 상민의 계급은 이 시대에 직업의 계급화가 되었고, 귀천으로 평가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의 가치가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냉소자가 꿈꾸는 직업 유토피아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몸노동(건설현장)과 의사(사자직업)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글은 씁쓸하다. 다양한 직업 비교군이 있음에도 굳이 이런 이분화된 비교라니... 평등을 주장하기 위해 불평등을 예로 드는 아이러니다.

"설마 서로 아는 사이?"는 <퇴사라는 고민>을 쓴 작가의 고민이 엿보인다. 공정사회를 위한 정의감과 개인의 불만이 표출된다. 어디에도 연결할 끈이 없는 자의 비애에 대해 피력했다. 독자인 나도 한번 냉소자가 되어본다.

학연 지연 혈연에 진정으로 얽매지 않는다면, 조건이 적합할 때 학연 지연 혈연이 있는 자도 채용해야 한다. 그것 때문에 피하여 탈락시킨다면 오히려 역차별과 불공평이다.(냉소독자의 평).

"떳떳하다면 드러내고 공식 스펙으로 내세울 텐데 또 그렇게는 못한다." "어디서도 서로 아는 척조차 할 수 없는 깨끗한 나라를 만들겠다." 본문 81쪽, 82쪽.

위 인용문을 한번 바꿔본다.

"어디서든지 서로 아는 척해도 의심하지 않는 깨끗한 나라를 만들겠다."(냉소독자의 평)

"아는 척조차 할 수 없는"을 "아는 척해도 의심하지 않는"으로 바꿔보았다.

"다투는 자들 앞에 나타난 그분"은 미래의 글이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몇 백년, 몇 천년 후의 대화일까? 아, 그 분이 오시면 좋겠다. 다투는 자들이 혼재한 이 세상에 그분이 나타나 고요와 평화를 주면 좋겠다! 인류를 구원하는 분도 신이요, 인류를 파멸시키는 분도 신이다. 같은 한 신이? 아니면 여러 다른 신들이? 타인의 종교를 존중할 줄 아는 사회, 맹신을 넘어 신과 함께 걷는 아름다운 동행을 꿈꾼다. 이것이 허황된 꿈일까?

아주 지엽적인 문제이고 책에는 아무 문제가 안되지만 잠깐 짚어본다.  "남이 믿는 종교의 신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85쪽. 우리가 믿는 것은 신神이지 종교가 아니다. 신을 믿는 것이 종교이다. "온전히 모든 사람을 감화할 수 없었을 거에요."89쪽. 감화하다의 쓰임새가 자동사인지 타동사인지 어색한 문장이다.

"넌 너무 냉소적이고 시니컬하다고."4쪽. 냉소적과 시니컬은 같은 뜻 아닌가?


1부는 여기서 끝난다. 표지에서부터 예고된 초현실주의 작품. 냉소주의에 꿈과 환상의 세계를 결합시킨 것이 초현실주의이다. 초현실주의 특징은 데페이즈망(dépaysement). 쉽게 말하자면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기법이다. 특히 표지 그림이 패러디한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가 데페이즈망 기법으로 유명하다. '패러디'라고 한 것은 서지사항에 표지그림 캡션이 없어서 패러디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쨌든 표지그림처럼 글에도 데페이즈망 기법을 추가했다면 맛깔스런 양념이 됐을 것이다. 아쉬움을 채워본다. 예를 들자면 1부의 마지막 챕터인 "다투는 자들 앞에 나타난 그분"에 그림의 데페이즈망 같은 글을 더해본다. 기독교 예배당 단위에 가부좌틀고 앉아있는 부처를 묘사한다거나, 반대로 사찰 안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있다면 어땠을까? 이거야말로 초현실주의가 보여주는, 르네 마그리트가 보여주는 데페이즈망이 아닐까? 냉소자가 독자에게 선사하는 멋진 선물이 됐을 것이다.


2부 믿던 모든 게 달라진

"달콤한 남 이야기"로 냉소자는 말의 포문을 연다. 뒷담화라니, 이 얼마나 뿌리치기 힘든 유혹인가, 정말 매력넘치는 화제다! 뒷담화에 "험담 고발 현상금"이 걸렸다. 뭐, 이런 거다. "WANTED 뒷담화". 씹는 자가 어찌 씹히는 자의 비참함을 알겠는가? 피해자는 평생을 잊지못하고 헤어나지 못하는데 가해자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억에 없다'는 말로 뚱치는 사회 현상을 보는 듯하다.

"변하는 사랑의 인정" 무엇이든 '3세번이다!' '삼진아웃'을 외치는 한국인의 정서가 들어있다.  잘못도 3번, 용서도 3번, 냉소자가 의외로 너그럽고 넉넉하다. 내용은 결혼이야기지만 결혼을 인생으로  읽는다면 이 얼마나 매력적인 삶인가. 두 번, 세 번 살 수 있다니!

"지금이 빠진 초라한 과거의 영광"은 시대의 변화를 묘사한다. 한때 잘나가던 과거의 배우를 등장시켜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상황을 연출한다. "라떼 세대"를 희화화했다. 내입에서도 가끔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Latte is horse ~~ 불라불라" 라떼세대의 잘못을 열거한 대목은 "서로 다른 모든 것들을 다 인정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진 냉소자의 주장에 대한 이율배반적 조목들이다. 편집으로 짤린 부분, 무음처리 부분들을 비난하는 건 냉소자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왜냐면 저자가 생각하는 삶의 지침을 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순수의 사회"는 1부 “하나만 남은 종교”에서처럼 미래 시점에서 쓴 글이다. 그야말로 시니컬한 기질이 표출되는 문장들이다. 저자는 어찌 이리 조목조목 적합한 내용을 예로 든단 말인가. 꼼꼼한 여자같다.(으악, 아니다! 남자같다, 여자같다, 이런 고정관념을 깨부수고싶은 냉소자인데.) 말하는 대로 순수하게 사실대로 믿는 사회가 된다면 냉소자의 할 일이 없어질 것같다. 그런 일은 없을테니 냉소자여 계속 팩폭의 강펀치를 날리시라.

"악플러의 민낯"에서는 계몽주의 냄새가 풍긴다. 금융실명제는 밝은 빛으로 지하금융의 검은 그림자를 퇴치했다. 이제 댓글 실명제는 악플러를 발로 꽉 밟아버릴 수 있을 것인가? 악성 댓글러, 너는 이제 내 발밑의 바퀴벌레다! 아, 생각만 해도 통쾌하다.

냉소주의는 계몽주의의 한계에서 파생됐다. 계몽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냉소를 낳았다. 그런데 역으로 우리의 주인공 냉소자는 계몽주의로 회귀한 듯한 문장들을 쏟아낸다. "국 영 수 빠진 입시 경쟁"에서도 (159쪽) 냉소주의는 계몽주의에게 잠시 자리를 내준 듯하다.

"존재할 수 없는 말"에서 냉소자는 원당절과 한판 싸움을 벌인다. 나는 여기서 저자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사회자님, 저는 모든 남자가 앉아서 소변을 봐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 달라질 기회가 있는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바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146쪽. 다행이다. 여기서 일방적인 자기 주장이 나올까봐 조마조마했는데, 과연 우리의 냉소자는 획일적인 사고에 매몰되지 않고, 타인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 바로 그거야. 함께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 왜 차갑게 시니컬한 성품을 가지겠나, 다름으로 배척하지 말고 상대를 인정하고 함께 걸어나가는 사회를 꿈꾸기 때문이지. 이 단원의 끝맺음 부분은 글쓴이의 재치가 돋보인다.

"위대한 도서가 사라진 이유"는 마치 성배를 찾아나선 인디아나존스(이거 옛날옛적 영화 이야기지만 2023년 버전도 있으니 나를 너무 구식사람으로 여기지 마시라)를 연상시킬 정도로 궁금하고 신비주의가 베일을 드리우고 있어서 흥미진진하다. 그래 금서는 찾은거야? 150쪽 위 "끝까지 발악 우겼다."는 문장이 좀 어색.

자기계발서에 대한 비판은 나도 같은 마음이다. 동감이다. 그러나 "자기계발서"로 자기 계발한 자들도 많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아는 태도가 '냉소자'의 정신 아닐까?


3부 더 이상 편리할 수 없는

‘냉소자’와 ‘반항아’가 등치되는 단어는 아니다. 그러나 서로 연상작용은 한다. 냉소자들에게 반항적 기질이 있는 것이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냉소자의 달콤한 상상>을 접하며 '반항'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다. 기존의 틀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눈에는 반항아가 질서의 이탈자처럼 보이겠지만, 선의로 생각하면 반항아는 새로운 길을 닦는 개척자이다.

세기의 반항아 <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이 책읽기에 쓰윽 끼어든다. 난무하는 비속어와 부도덕한 내용이 청소년들에게 해악이 된다고 엄청난 비난을 받은 책이다. 명문 기숙학교에서 퇴학당한 문제아 홀든 콜필드의 독백,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삐딱한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반항아로 손가락질 받는 홀든의 꿈은 나중에 호밀밭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켜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것이다. 그의 반항을 이해할 수 없었던 자들에게 그야말로 하이킥을 날린다. '냉소자'의 꿈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냉소자의 달콤한 상상>을 읽었다.


"달콤한 눈뜨고 달리기", "하루 세 번 식사 알약 삼키기", "운동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인간의 생체리듬에 관한 글이다. 자고, 먹고, 움직여야하는 우리 몸에 대한 단상이다. 독자도 각자의 경험을 돌아보는 재미가 있다. 늦은 밤 절대 덮어버릴 수 없는 소설책에 푹 빠져 '안 자고 뭐하냐'는 어머니의 잠재촉을 받던 일, 시험기간에 눈 언저리에 물파스를 발라 잠을 쫓던 일이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남이 해준 밥을 먹을 때는 하루 세 끼가 아쉬워 다섯 끼쯤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가, 내가 밥을 하게되니 그냥 알약으로 때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던(아직도 간절한) 마음도 떠오른다. 이것저것 귀찮으면 남에게 시킬 수 있지만 내 몸에 필요한 운동은 내 몸이 직접 해야한다. 아, 이것도 그냥 로봇 옷을 입고있으면 입력한 프로그램대로 나를 운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언제쯤? 로봇 옷만 입으면 된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이것 참 달콤한 상상이다. 머지않아 이렇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저자 홍석준은 정말 별 생각을 다한다. 그에겐 별의별 생각을 잔뜩 주렁주렁 매단 날개가 달렸다. 그에게 매달려 함께 날다보면 꿈에 그리던 시간대로 날아갈 수 있을 것같다. 참 재미있는 작가다!

"사람이 고픈 자의 선택" "돈이 사라진 곳에 남은 마음" "원하는 관계 구매 가능"은 관계에 대한 고민이다. '관계'라는 그물망에 얽혀 사는 것이 인생이다. 늠름하게 우뚝 서있는 나무의 뿌리를 보면 대단한 큰 뿌리 하나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잔 뿌리들이 얼기설기 뭉쳐서 큰 나무를 지탱하고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현실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관계들을 꼽았다. 소셜 미디어에 포박당한 삶에서 벗어나고픈 마음, 때로는 고맙기도 하고 때로는 왕짜증을 유발하는 '상부상조'의 관습도 짚었다.

벤딩머신(vending machine)이 건물 안에도 길거리에도 논밭 한가운데도 있는 세상이다. 작가는 여기에 "원하는 관계 구매 가능"한 프로그램을 더한다. 참 멋진 아이디어! 꿈꾸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그런데 나처럼 햄릿 증후군(Hamlet Syndrome 결정장애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은 어쩌나... 이상적인 체험들이 즐비한 기계 앞에서 선뜻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망설이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작가님, 나를 쫘악 스캔해서 딱 들어맞는 것 하나 골라주는 서비스도 함께 해주세요.


"바라는 미래의 처음"에서 작가는 꿈을 깬다. "새삼 스스로 놀랐다. 못마땅한 게 이렇게나 많으면서 꾹 참고 잘도 살아왔구나."233쪽.

이제 작가는 꾹 참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독자는 저자가 기독교 신학에서의 "예정설"을 믿는지 안믿는지 알 수 없다. 최소한 "운명"이라는 거대 담론의 희생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정해진 질서에 따라 순응하는 수동적인 삶은 크게 나무랄 것이 없다. 대열을 벗어나 새로운 길의 첫 걸음을 걷는 능동적인 삶은 우려의 눈길과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아빠 육아 업데이트>에서 아빠 육아 선구자의 삶을 살아온 작가, <퇴사라는 고민>을 지혜롭게 결정내린 작가, 그가 <냉소자의 달콤한 상상>을 한낱 꿈으로 버릴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이미 저 위의 글중에 언급했듯이 초현실의 세계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찾아간 무의식의 공간이다. 무의식의 초현실적인 공간은 의식의 세계에 적지않은 영향력이 있다. 저자의 꿈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에 영향력있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냉소자의 달콤한 상상>을 읽으며 옛날에 읽었던 책들이 떠올랐다. 홍석준 작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구절을 옮긴다.  <냉소자의 달콤한 상상>이 여기 책들과 같은 맥락은 아니다. 전혀 딴판이기도 하고 유사성이 살짝 비치기도 한다. 거두절미하고 보여주고싶은 문장만 뽑아 옮긴다. 작가가 내디딘 발걸음을 힘차게 이어가기를 바란다. 초현실적인 꿈이 환타지로 끝나지 않고 현실화되기를 바란다.

"뿐만 아니라 성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어요. 어떤 길로 가는 게 유행이면 대개 그리로 가고, 또 다른 길로 가는 게 유행이면 다들 그곳으로 몰리지요. 어떤 규칙에 따라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가령 아침 여덟 시에는 모두 어떤 길로 가고, 반 시간 후에는 모두 다른 길로, 그 십 분 뒤에는 세 번째 길로, 또 반 시간 후에는 모두 다른 길로, 또 반 시간 뒤에는 아마 다시 첫 번째 길로 돌아와 그 후로는 종일 그 길로 달리게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언제라도 가는 길은 바뀔 수 있죠."
프란츠 카프카 <성> 펭귄클라식 코리아 출판. 2008. 318쪽.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은, 초현실성이 현실을 초월한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현실 밖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현실 속에 내재한다고 보는 어떤 특이한 내재성의 철학에 가까운 것"임을 천명한다. 오생근 지음 <초현실주의 시와 문학의 혁명> 문학과 지성사 출판, 2010. 305쪽.
 A. 브르통 <초현실주의 회화> 갈리마르 출판. 46쪽 재인용)

옛 책들을 나란히 놓고 사진을 찍었다. 프란츠 카프카, J.D.샐린저, 앙드레 브르통의 책들과 나란히 있는 자신의 책이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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