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예수> 전체 7권의 내용과 서평
<소설 예수> 저자 ; 윤 석철 출판 ; 나남
(그동안 브런치 매거진 '책을 읽다'에 쓴 1권~7권의 리뷰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있으니 이해해주세요.)
전체 줄거리.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받는 마지막 한 주일 – 기독교 절기의 유월절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엮었다.
예수를 중심으로 그 시대(BC150~AD33)의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지리적 상황을 반영한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알고있는 “예수”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성경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다. <소설 예수>의 예수는 성경 속 예수와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렇다면 <소설 예수>는 픽션일까, 논픽션일까? 유대 갈릴리 지방의 역사적 인물과 작가가 창조한 허구적 인물이 얽혀있다. 역사는 팩트이다. 창작은 허구이다. 팩트와 허구가 혼재한 글을 읽으며 기독교인은 이미 알고있는 성경의 내용을 연상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고, 성경을 접하지 않은 독자에겐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예수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로 읽으면 될 것이다.
<소설 예수>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팔걷어부치고 개입하여 해결해주는 만사형통 해결사 신, 그의 아들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점일획도 변할 수 없는 경전에 그려진 예수가 아닌, 기독교 도그마(Dogma 교의) 이전의 예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1권 –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하기 전날(안식일, 안식일이 끝난 밤).
2권 –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안식일 다음날). 로마총독 빌라도의 예루살렘 입성.
3권 – 예루살렘 성전과 예수의 갈등.
4권 – 예수의 내면적 갈등.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갈등.
5권 –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침. 로마 총독궁, 성전, 분봉왕, 햐얀리본 이야기.
6권 – 예수가 체포됨.
7권 – 예수의 재판과 십자가 처형.
예수가 보내는 다른 신호
여러 언론매체에 소개된 작가의 이야기와 마지막 7권에 기록된 작가후기를 읽으며 그는 왜 이 책을 썼는가 알아본다.
신이 없는 세상은 텅 빈 허무이며 창조주의 손을 떠나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의 뜻을 살피고 따르는 일이 신앙생활의 목표라고 주저없이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그리스도(메시아)로 섬김을 받는 예수, 신의 아들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한 분이 된 예수가 보내는 다른 신호를 보았습니다. 7권 작가후기 인용.
작가가 본 “예수가 보내는 다른 신호”를 <소설 예수>에 풀어놓았다. 작가가 안테나를 세우고 살았다는 증거이다. 그 신호를 포착할 수 있는.
기독교적 나레이션이 아니라 로마제국 점령지 팔레스타인 갈릴리 지방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 사람이 겪는 고민과 갈등 그리고 그가 가진 비전을 그린다. 소설은 예수라는 존재(Being)를 해석하는 일로부터 시작된 기독교라는 종교가 아니라, 그의 가르침과 행동(Doing)에 주목하면서 그가 꿈꾼 ‘하느님 나라’를 보여준다. 작가는 2000년전 예수가 저항하며 살아낸 시대가 21세기 오늘도 계속되고 있음에 주목하며 예수 운동의 시대 초월성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예수 믿음이 구원’이 아니고 ‘예수의 길’을 걷고 행하고 따르면서 공동체를 살려 낸다는 가르침을 만나도록 이 책을 썼다. <소설 예수>는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기독교가 어떻게 예수의 가르침과 삶으로부터 멀어졌는지, 바울이 이해한 예수, 복음서 기자들이 그를 메시아로 고백하기 이전의 갈릴리 사람 예수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한 책이다.
2005년부터 자료를 모으고 2016년 5월에 <소설 예수>를 쓰기 시작해서 5년 8개월 만에 7권의 책으로 완성했습니다. 그가 살았던 세상을 소설에 복원해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7권 작가후기 인용.
작가의 출발
<소설 예수>는 작가의 첫 작품이다. 생전 처음 써본 소설을 일곱 권 대하장편으로 출간했다. 1권부터 7권까지 완독하면 작가의 글이 일취월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일취월장’이 꼭 찬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첫 책 1권을 읽어내기가 참 어렵다는 뜻이다. 첫 책이니만큼 작가가 욕심을 덜어내지 못하고 하고싶은 말을 다 쏟아놓아 독자로서는 난감하게 가독성이 떨어진다. 대하장편으로 기획된 것이니 작가는 1권을 전체의 인트로덕션으로 여기고 썼을 것이다. 낯선 등장인물들이 성전회의를 하는 장면은 어찌나 길고 긴지 처음부터 독자를 힘들게 한다. 다행히 가슴속에 쏘옥 파고드는 문장들이 수시로 나타나 책을 놓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다. 섬세하고 감성적인 촉촉함과, 묵직한 힘과 속도감을 잘 안배한 문장들에 사로잡히면 이 두꺼운 책은 빠르게 읽힌다. 이 책의 시작은 스토리가 이끌어가기 보다는 문장이 이끈다고 할 수 있다. 곳곳에 문장의 보석이 빛난다.
일곱 권 연작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하고싶은 이야기를 다 풀어놓을 수 있나. 우리들 일상의 대화도 그렇다. 내가 말하고 상대방의 말을 듣기도 해야한다. 책이라고 다를까. 작가가 혼자만 말을 하면 어떡하나, 독자에게도 빈칸을 채울 기회를 줘야지. 이렇게 말하고 싶다. “친절한 작가씨, 행간은 독자에게 양보하세요.” 행간은 독자의 몫이다.
대하소설의 특성상 한 질 전권을 이어가야 하기도 하고, 낱권 마다 시작과 마침의 매듭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특성이 이야기의 반복, 중복을 부른다. 전체를 한 권 씩 훑으며 찰랑거리는 물결이 어느 책에서는 집채만한 파도로 독자를 후려치는 책이 있지만, 낱권 마다 한 권 한 권 속에 하이라이트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는 대목이 낱권마다 반복된다. 예수를 알기 위해, 하느님을 알기 위해 천착한 작가가 얻은 답을 독자들에게 반복학습 시킨다.
작가는 독자에게 자세히 잘 설명하고 싶어한다. 설명조의 문장이 자주 눈에 띈다. 독자가 ‘설명’이라고 느끼는 것은 아마도 많은 접속사들 때문일 것이다. 초보작가는 불안하다. 그러자, 그리고, 그런데, 그렇지만, 그래서, 그리고, 그러더니, 이런 접속사를 빼면 웬지 문장이 불완전해 보여서 접속사를 제거하지 못했고, 독자는 이런 문장을 만나면 ‘설명한다’고 느낄 것이다.
사람의 아들 예수
신의 아들,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로 알려진 예수를 작가는 사람의 아들로 그린다.
책을 접하며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은 작가가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지였다. 내용을 읽다보면 하느님의 존재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을 알 수 있다. 주인공 예수의 삶이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항상 ‘하느님’에 대한 것이었다. 하느님이 대문자 God이든 소문자 god이든 이 책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이 어떤 이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고, 어떤 이에게는 왜 ‘하나님’이라고 쓰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미 읽고 넘겨놓은 페이지가 점점 더 두터워지면서 이 의구심은 자연히 해소된다. 작가는 하느님을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 오직 하나인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단정짓는 것을 피한다.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싶은 ‘하느님’은 ‘하나님’보다 더 큰 의미이다. 세상 전체를 다 덮는, 이스라엘 땅 넘어 온 세상을 다 덮는, 유대교 그 이전에도 기독교 그 이전에도 존재했던 ‘하느님’을 의미한다. 모든 추상성과 구체성을 다 함유하고 있는 '하느님'으로 읽힌다. 이 책에서 작가는 유대인의 하나님과 예수의 하느님을 다른 단어로 구분하여 썼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유대인은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하늘 아버지로 생각하는 예수는 "하느님"으로 부른다. 독자도 이 부분을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라는 해석은 곳곳에 드러난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가 가슴을 열고 보여주는 사랑이, 아픔이, 사람인 우리들의 마음 그대로임이 책 곳곳에 쓰여있다. 아침이면 따뜻한 국물 한 그릇 마시고 일터에 나가 돌을 쪼고 나무를 깎고 다듬던 한 아버지의 아들 예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목수, 석수 요셉이 예수에게 던지는 일상의 말들은 큰 가르침이 되었고 예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유대교의 율법 ‘토라’에 대한 해석도 아버지를 통해서 터득했다.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어떻게 하느님을 모시고 잘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토라라는 요셉의 가르침으로 아들 예수는 토라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율법으로 사람을 옭매자는 것이 아니고 서로 돕고 아끼고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며 살라는 의미라고.
예수가 십자가의 가로 막대를 짊어지고 채찍을 맞으며 걷는 길에서 그에게 들리는 음성은 아버지 요셉의 음성이다. 세포리스에서 일을 마치고 함께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듣던 아버지 요셉의 음성. “얘야, 예수야, 좀 쉬었다 가자.”는 노동과 허기에 지친 요셉의 목소리. 아버지 요셉의 음성은 가끔 가슴을 울리는 하느님의 음성으로 들린다. 작가는 인간 요셉의 말은 목소리로, 하느님의 소리는 가슴에 가득한 울림으로 표현한다. 공사장에 오가며 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던 어린 예수는 아버지를 통해 하늘 아버지의 말씀을, 땅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삭이고 그 말씀이 체화된 사람이다.
어머니 마리아는 세상 어미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들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을 예감하고 떨리는 가슴으로 보퉁이를 싸 안고 작은 아들 야곱을 채근하여 예수를 찾아 황망한 발걸음을 재촉하는 마리아. 여러 날을 걷고 또 걸어 십자가의 길에서야 예수를 만나게 된다. “얘야, 얘야, 내 아들 예수야!” 긴 가로 막대를 메고 비틀비틀 걷는 예수에게 다가가 어미는 찢어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들의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는다. 보따리에서 빵 조각을 꺼내어 아들의 입에 조금씩 넣어준다. 예수는 그 빵을 입에 받아 우물거린다. 그 빵은 아기 예수가 꿀꺽꿀꺽 삼키던 어머니의 젖이고, 물질화 할 수 없는 어미의 본능적인 사랑이다.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은 그의 행적에서도 잘 나타난다. 누구든지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이려고 애썼고, 졸린 사람에게는 자라고 했다. 참고 이겨내야 한다는 강요를 하지 않았다.
폭력으로부터 해방, 전통으로부터 해방, 희년
지배층에서는 예수를 선동가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예수는 자신이 바라는 하느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어떤 선동을 했는가? 혁명대군을 이끌고 성전으로 쳐들어 갔는가? 그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 열심이었다. 사람들이 눈을 뜨고 스스로 하느님을 만나도록 인도했다. 율법에 꽁꽁 묶인 사람들이 스스로 그 올가미를 풀어낼 수 있도록 가르쳤다. 작가는 ‘왜?’라는 질문이 억압에 항거하는 해방의 시작이라고 기록한다.이유를 물어야 한다. 왜 그러는지 궁금하면 성전에도 묻고, 제사장에게도 묻고, 로마군에게도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묻지도 말고, 의심하지도 말고, 오직 율법을 따르기만 하라는 것은 억압이고 폭력이다.
묻는 것으로 해방이 되는가? 예수는 비폭력 인권운동가로 그려진다. 폭력에 폭력적으로 대항하지 말라고 말한다. 사람의 존엄성으로 폭력을 행한자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라는 것이다. 작가는 예수가 우리 죄를 짊어지고 대속代贖하기 위해 십자가를 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가장 잔혹한 십자가 처형을 받으며 예수는 폭력으로 이길 수 없는 힘을 보여준다. 순순히 십자가 처형을 받아들인 것은 굴종이 아닌 가장 큰 저항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예수가 성전의 폭력, 로마의 폭력에 저항한 십자가를 그린다. 독자들에게 ‘제국의 폭력’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겠다는 의도인가.
예수가 주창하는 해방,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은 희년을 뜻한다. 이스라엘에서 희년禧年은 50년마다 노예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 때문에 조상의 소유를 팔았던 자들에게 되돌려주고, 사람뿐 아니라 땅도 쉬게 하는 제도이다.
예수는 희년의 실행이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첫 걸음이라고 한다. 성전에서는 메시아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고통을 견디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뒤엎어 오히려 혼란이 오고 고통이 가중될 수 있는 위험한 혁명이라고 여긴다. 희년 선언은 지금 세상에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작가는 희년 실행이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생명이 우선이라는 선언이라고 한다. 보편적 복지다, 도덕적 해이다, 사회적 담론이 들끓는 이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독교 신자가 천만명이라는 이 사회에 '희년'을 언급하는 것은 작가의 비폭력 혁명 선언인가…
이스라엘은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붙들고 토라(율법)에 따라 전통에 갇혀 살고 있었다. 그것에 대한 질문이나 비판은 죽어 마땅한 죄악이었다. 성전이 가르치는 토라가 생활의 중심이었다. 살아온 지난 날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역사였고, 미래는 그분의 계획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예수는 이스라엘 전통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다. 토라의 굴레에서 벗어나라, 전통에서 해방되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예수의 눈에는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의 전통이 지배자들의 기득권 보호 수단으로 보였다.
우리가 알기로는 전통이란 이미 있어왔던 것, 이어져 내려왔던 것인데 20세기 영국의 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은 전통이 만들어졌다고 우리를 일깨운다. 홉스봄은 <만들어진 전통 The Invention of Tradition >에서 전통은 기관, 지위, 권위의 관계를 확립하거나 합법화하는 것, 그리고 신념, 가치 체계 및 행동 관습의 주입을 사회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만들어진다고 기록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유대에서도 지배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전통으로 피지배자들을 지배했던 것이다. 피지배자들은 오래된 관행과 만들어진 것이 다르다는 의식없이 지배자들을 따랐다. 예수는 지배자의 전통에 갇힌 사람들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하느님 나라
청년 예수가 사람들에게 그토록 가르쳐주려고 애쓰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동안 우리가 생각하던 하느님은 어떤 분이셨나? 소설은 예수의 입을 통해 하느님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한다. 예수가 전하는 하느님 나라는 하늘에서 빵을 뚝딱 떨어뜨려 내려주는 나라가 아니라, 배고픔을 알고 빵을 나누는 사람들이 이루는 나라이다. 책에서 몇 군데 인용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과 하느님 말씀은 따로따로 떨어진 일이 아닙니다. ~ 하느님은 따로 어디 멀리 높은 곳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여러분 속에 계십니다.” 3권92쪽
“무서운 심판자, 벌을 주고 호령하고 꾸짖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 여러분이 집 앞에 이르기도 전에 내다보고 또 내다보다가 맨발로 쫓아 나오시는 분입니다.” 3권150쪽
“하느님의 형상은 생김새가 아니고 하느님의 본성, 사랑입니다. ~~ 하느님의 본성을 따라 지음받았으니 여러분이나 나나 바로 우리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3권153쪽
"하느님이 보내주신 메시아가 번뜩 나타나 이 땅위에 세우리라고 생각했던 그런 하느님 나라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세상입니다." 4권112-115쪽
"모든 사람이 그 나라에 들지 않으면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그렇소! 한 사람이라도 문밖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다면 이뤄진 것이 아니오." 6권31쪽.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이뤄 주는 나라가 아니고 사람의 힘으로 이뤄지는 나라입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이래서 빼고, 저 사람은 저래서 빼놓고 남은 사람들끼리 모여 이루는 나라가 아니고, 그가 누구였든 함께 손잡고 이루어야 합니다." 6권32쪽.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면, 그 나라는 벌써 시작된 겁니다." 6권87쪽.
“모두 하느님의 품성을 지닌 귀한 생명입니다.” 7권 79쪽.
소설 속에서 예수가 역설하는 하느님 나라를 작가는 독자들에게 역설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가르는 ‘거룩’의 담을 허물고자 가르침을 설파한 예수, 작가가 예수는 아니지만, 자신이 세상에 외치고 싶은 말을 소설 주인공의 입에 실려서 띄우는 것 아니겠는가. 편가르기와 증오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하느님의 품성을 닮은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싶은 간절함이 읽힌다.
예수의 관점은 늘 억압하는 지배자 세력과 억압당하는 사람에 있었다. 이방제국과 이스라엘에 머무르지 않았다. 하느님은 세상을 심판하여 파멸시키시는 분이 아니라고 믿었다. 억압받는 자들을 해방시키시는 하느님이라고 믿었다. 하느님에 대한 예수의 설명은 항상 지금 여기 우리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들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말하는 “지금”은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을 뜻한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이 아니라 내게 의미있는 일이 발생한 순간, 카이로스를 말한다. 그 순간이 바로 예수가 말하는 ‘지금’이다.
“지금”은 언제란 말인가? 지금이란 나와 함께하는 시간, 내가 있는 시간이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내가 있었던, 내가 있는 시간을 지금이라 할 수 있다. 쌍둥이처럼 함께 사용하는 구절 ‘지금’과 ‘여기’에서 굳이 ‘여기’는 쓰지 않아도 당연히 내가 있는 곳은 ‘여기’가 된다.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은 카이로스 시간의 의미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예수가 말하는 “때” 역시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혁명을 꿈꾸는 히스기야, 바라바, 예수
예수와 아래 윗집 이웃해 살던 히스기야는 의적 하얀리본 결사체를 이끌며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준다. 히스기야는 성전 창고를 털어 곡식을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빚 문서를 불태울 꿈을 꾸었다.
히스기야는 소설 초기부터 감옥에 갇힌 사람이 되어 실제 행동이 많이 드러나지 않는다. 가난한 집의 딸 막달라 마리아가 먹는 입 하나 줄이기 위해 분봉왕 알렉산더의 여종으로 들어가면서 히스기야와의 만남은 없다. 그러나 간간히 히스기야와 막달라 마리아의 연정은 소설 전체를 조용히 흘러간다. 마지막 십자가에 달린 예수아 히스기야의 주검을 마리아가 향유로 닦아준다.
바라바는 토라를 지킨 바리새파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는 완전한 토라의 나라를 꿈꿨다. 유대를 새롭게 건설하는 꿈이다. 바라바와 히스기야는 서로 다른 목적으로 유월절 거사를 모의했다.
성전을 뒤엎을 거사를 기획하던 하얀리본은 우두머리 히스기야가 옥에 갇힌 후, 바라바는 끓는 피로 하얀리본을 이끈다. 바라바의 가슴 속엔 오직 ‘토라의 나라’ 밖에 없다. 그는 이스라엘의 고통이 하느님 뜻을 어긴 죄값이라고 생각했다. 토라를 지키기 위하여 순교를 각오했다. 바라바는 철저히 바리새파 속에 머물러 있었다.
히스기야의 꿈은 예수가 생각하는 하느님 나라와 비슷했다. 그러나 예수는 평화를 강조하고 히스기야는 힘으로 이루자는 생각이었다. 예수는 부드럽고 고른 숨소리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가르침을 씨앗을 뿌리는 일이라고 했다. 예수는 열심히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뿌렸다. 예수가 걷는 길은 그의 가장 큰 스승 세례자 요한과도 달랐다.
히스기야와 예수, 이 두 인물의 말과 행동을 통해 작가가 하고싶은 말을 쏟아낸다. 성전으로부터,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갈릴리의 두 청년은 한 인간의 다중인격을 묘사한 것 같다.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을 하나로, 다른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을 둘로 표현했다. ‘예수’라는 뻔한 주제로 글을 쓰면서 소설의 재미있는 장치인 복선을 깔기도 어렵고, 반전을 시도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작가는 예수를 예수와 히스기야로 나눠서 그리지 않았을까? 예수가 아버지 요셉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아버지 요셉의 목소리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설정이다. 폭력을 억제하고 평화로 다스리는 예수의 억제된 힘을 히스기야가 분출하고, 여제자 마리아와 함께 어울리는 남성 예수를 히스기야와 마리아의 연정으로 해결하는 작가의 작은 트릭(?)이 엿보인다. 책에서 인용한다.
마리아는 히스기야를 올려다보고 있는 동안 놀라운 경험을 했다. 히스기야의 모습이 조금씩 예수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기 때문이다. ~~히스기야는 예수의 십자가와 하나로 포개졌다. 예수와 히스기야가 두 사람이었지만 결국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마리아는 깨달았다.7권 422쪽.
노회한 성전 제사장들, 교활한 로마의 총독
성전은 예배드리고 제사드리는 신전이다. 유대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곳이다. 이방인을 철저히 배제하는 곳이다. 대제사장, 제사장, 대산헤드린 의회가 성전에 속해있다. 그렇다고 그곳이 이스라엘의 해방구는 아니다. 오히려 착취의 장소이다. 로마가 유대를 통치하는 공식 기구에 속한다. 제국, 힘이 지배하는 곳에는 지키고 살아남아야 하는 발버둥이 있다. 결국 성전은 정치와 종교가 손을 잡은 기구가 된다. 작가는 성전 관계자들과 로마 정치가들과의 관계를 현 사회의 축소판처럼 그려놓았다. 필요에 따라 야합하고 배신하고 결탁하고 음해하는 인간의 부끄러운 모습이 숨김없이 노출된다.
예수가 뒤엎으려고 한 것은 제도로서의 성전체제이다. 제국의 압제에 대한 평화적 항거이다. 기득권자들에게 위험이 될 수 밖에 없다. 권력의 사회관계망은 촘촘히 짜여있어서 예수는 처형의 길에 이른다.
예수의 처형에 관계되는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에게 돌아올 책임의 무게를 저울질했다. 그 결과, 성전 대산헤드린에서는 유대법으로, 총독궁에서는 로마법으로 처리하기로 하였다. 예수를 볼모로 대제사장 가야바, 분봉왕 안티파스, 총독 빌라도의 수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알렉산더와 아레니우스의 지략이 빚은 결과이다. 위수대장도 한몫 거들었다.
예수를 처형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이다. 공개처형으로 사람들에게 구경시키고 지배자의 힘을 과시한다. 특히 가장 끔찍한 십자가형, 살 한 점 뼈 한 조각도 남지 않는 십자가형을 집행하므로써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고, 그 두려움을 항상 잊지 않도록 하는 처벌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 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감옥의 역사>에서 신체형의 공개처형에 대해 언급했다. “신체형”은 법률적, 정치적 기능을 갖는다고 한다. 군중들이 입회하여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두려움을 품도록 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받은 십자가형이 그렇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예수에게 주는 고통보다는 군중들에게 끔찍한 공포를 주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가르침, 씨를 뿌리는 사람 예수
그동안 예언자들은 죄에서 돌이켜 야훼에게 돌아오라고 외쳤다. 예수는 하느님이 정죄하고 심판하고 벌을 주는 하느님이 아니라고 외친다. 가혹한 벌은 힘을 가진 세상 왕국에서나 하는 일이라고 한다. 예수는 모든 억압과 압제를 거부하라고 가르친다. 더구나 그 억압이 유대의 삶의 기준인 토라라고 한다. 토라는 유대사람과 이방인을 철저히 구별한다. 예수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더불어 함께 사는 하느님 나라를 전파한다. 갈릴리와 유대와 이스라엘 사람만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선민(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경계를 허무는 일을 이야기한다.
평화를 이루라고 요구한다. 폭도들의 유월절 반란을 제압한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평화를 지켰다고 할 것이다. 현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기득권층 사람들은 현재의 평화가 흔들리거나 깨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의 율법에서,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일이 평화라고 가르친다. 예수는 힘있는 자들이 지키려고 하는 평화를 깨고 바꾸어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외친다.
심판의 하느님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속죄제사를 드린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은 제사를 받아야 죄를 사해주는 분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더구나 자신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전에 제사받을 하느님이 머무르시지 않는다는 말, 제사가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말, 토라에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런 가르침은 몸이 부들부들 떨릴 일이다. <소설 예수>를 읽는 기독교인 독자들도 심장이 두근두근해질 내용이다.
또한 예수가 전하는 하느님의 형상, 우리가 그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형상은 하느님의 품성을 뜻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다. 하느님이 떠난 빈 공간을 섬기고 경배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여기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와 계시다는 가르침이다.
새 하늘, 새 땅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지 않다, 이 땅에, 사람들 속으로 내려오셨다고 작가는 역설한다. 소설속에서 예수가 하느님은 지금 여기에 계시다고 하는 말이다.
작가에게 묻는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산 사람들에게 이렇게 상처를 주어도 되느냐고. 죽음으로 이별한 사람을 내가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으로 버티고 사는 사람들, 아무런 희망조차 없이 매서운 현실의 고통속에서도 견디고 살아내면 나중에 하늘에 가서 보상받을 거라고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죽은 후의 삶에 대한 어떠한 소망이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수많은 신자들에게 지금 살고있는 이 세상이 세상의 끝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나? 다음 세상이 없다는 것은 다음 세상을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희망하는 새하늘 새땅을 예수는 어떻게 설명하는지 들어본다. 물론 예수의 입을 빌린 작가의 메시지다. 책에서 몇 구절 인용한다.
"사람이 처음으로 하느님의 품을 떠나 사람으로 서는 일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품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아니고 그분의 품에서 걸어 나오는 일이다.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겪는 일이다."5권270쪽.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 되고, 그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스며든다는 뜻이구나!"5권270쪽. 예수가 이루려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출발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5권278쪽.
'사람들에게 맡겨진 세상!' 6권95쪽
"그 나라는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라기보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맡긴 사람의 나라'라는 말이 맞을 것 같네요." 6권104쪽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 지금 여기에 계시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가 새 하늘 새 땅,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이 안 보인다. 하느님은 사람들 속으로 스며드셨다. 하늘에서 사라진 하느님, 사람들 속으로 스며든 하느님, 하느님은 세상을 사람에게 맡기셨다. 탯줄을 끊은 아기처럼, 이유기를 지난 아기처럼, 두 발로 세상에 서서 스스로 걸으며 살아가야 한다. 장성하여 부모곁을 떠나 세상을 살아가듯, 하느님은 사람을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리고 사람에게 세상을 맡기셨다.
예수를 일컫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를 하느님으로 여기는 말이기도 하다. <소설 예수>에는 예수를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내용이 없다. 하느님의 본성을 담아 창조된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나라를 이루면 그것이 하느님 나라라는 해석을 할 뿐이다.
기름부음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바로 장례의 절차를 뜻하기도 한다. 예수는 처형받기 전날 밤에 베다니 여인숙에서 마리아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다. 죽음을 예시한 의례였다.
https://artvee.com/dl/golgotha
에드바르 뭉크 <골고다> 1900. 캔버스에 유채. 80x120Cm.뭉크 뮤제움, 오슬로, 노르웨이.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을 돌보는 일
작가는 예수를 혁명가로 묘사하고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묵직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소설의 문장들이 무겁고 굳어있지만은 않다. 굶주림에서 벗어날 길 없는 사람들과, 부모자식 형제자매의 관계를 묘사하는 부분을 읽으면 마치 한국전쟁 전후의 우리나라 정서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촉촉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예수가 거닐었던 마을들을 그림처럼 펼쳐보여주므로 독자들은 그 시대 그 장소로 끌려들어가 예수와 함께 나란히 길을 가게 된다. 그리고 예수의 생각이 곧 독자의 생각이 된다. 초보작가라는 풋풋함과,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열정은 작가의 정체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위에 언급한 풍경의 묘사는 작가의 나이가 젊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성전과 총독부 사람들이 이권을 위해 부리는 더럽고 비열한 술수는 험한 세상을 뚫고 걸어온 작가의 연륜이 보인다.
작가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지만 이미 제도적인 종교의 교리가 가슴에 꽉 차 있는 독자들에게는 예수가 던지는 말은 스며들지 못하고 그대로 넘쳐 흘러나갈지도 모른다. 만약 어떤 이의 가슴에 조금의 틈이라도 있다면 아마도 예수의 외침은 물처럼 스며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독자의 가슴에 빈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어쨌든 작가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 소설 속에 무진장 많이 쏟아부으니까. 독자가 거듭거듭 밑줄을 긋고 또 그은 후에 같은 밑줄을 세어보면 그 수가 열 손가락을 다 꼽을 지경이다.
<소설 예수>에서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는 핵심 메시지를 짚어본다.
곳곳에 언급했듯이 갈릴리 청년,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구원의 메시아가 아니다. 당시 성전과 로마가 결탁한, 종교와 정치가 결탁한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편에 선 혁명가다. 예수가 전하는 하느님은 죽어서 가는 천당에 있는 것이 아니고 땅으로 내려와 사람들 속에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예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명이다.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고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를 이루라는 것이다.
책을 읽고, 법륜 스님이 지은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이라는 책의 메시지도 예수의 사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책에서 인용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미리 예정된 부처의 조건 속에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단지 역사 속에서 가장 먼저 부처의 성품을 깨우쳐 부처가 되신 분입니다. 또한 우리의 본래 성품도 부처라는 것을 깨우쳐주어 우리가 부처가 되도록 인도해 주신 분입니다. ~~어떠한 견해로써 부처님을 설명하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사 속에 나타난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날 구체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 붓다>49쪽.
인간 해방의 역사는 신에 의해서 이루어지거나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해방의 역사는 오로지 인간에 의해, 그것도 고통받는 인간을 구제하겠다는 인간의 발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 해방의 역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역사 속에 던진 수많은 삶의 발자취입니다. <인간 붓다>63쪽.
이렇게 쓰면 좀 격이 떨어지는 표현이지만, 예수하고 부처하고 짰나? 똑 같은 이야기를 하네.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신학서를 쓴 것인지, 소설을 쓴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작가가 본 ‘다른 모습의 예수’를 말하고자, 여러 사람들에게 예수는 이런 사람이라고 외치고 싶어서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쓴 책으로 여겨진다. 성전에 대해, 로마에 대해, 하느님에 대해 설명이 시작되면 그 한 부분 부분이 에세이 한 편이 된다. 흥미를 느끼는 독자는 하고싶은 말을 다 쏟아내는 작가와 함께 신바람이 날 것이고 책장이 훌훌 넘어가겠지만, 푹 빠져들지 못하는 독자는 책을 덮을까 말까 망설일 것이다. 정말 할 말이 많은 작가다. 자신이 하고싶은 말에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준다.
작가는 일점일획도 변할 수 없는 경전에 그려진 예수가 아닌, 아버지 요셉과 함께 일터를 오가며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사랑’의 참뜻을 깨닫고 그것이 체화되어 제자들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예수를 이야기한다. ‘사랑’은 추상적인 언어이다. 그러나 예수는 ‘사랑’을 구체적인 언어로 바꾸는 일에 힘을 쓴다. 작가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이것 아닌가? ‘사랑’의 구체화,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사람사는 세상.
"므두셀라"라는 별명을 가진 대추야자가 있다. 1963년 마사다 발굴 때 발견된 씨앗이 발아한 것이다. 마사다는 AD73년 로마군에 잡히기 전에 집단 자살한 유대인 무리가 묻힌 사막지역이다. 이 씨앗은 연구실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2005년에 싹을 틔웠다. 실증된 물리적 현상이다. 씨앗의 생명력은 이렇게 강하고 끈질기다.
<소설 예수> 6권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씨앗을 뿌리는 것에 비유한다. 예수는 씨앗 그 자체이기도 하다. 예수가 유대땅에 뿌린 씨앗은 어찌 되었을까? 강한 생명력을 가진 대추야자 므두셀라처럼 지금 여기에서 싹을 틔우고 있다. 2000년 세월을 기다려온 대추야자는 원래의 대추야자로 발아했다. 그러나 같은 세월을 걸어온 예수는 원래의 모습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변형된 모습이다. 예수라는 씨앗 그 자체도 다른 모습이고, 그가 뿌린 씨앗들은 인간의 손을 탄 유전자 변형으로 완전히 다른 나무로 자랐다. 예수는 지금 어느 나무위에 올라앉아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내가 뿌린 씨앗은 이런 모습이 아닌데..."
<소설 예수>를 읽고.
책을 읽으며 신비로움을 느꼈다. 이것은 20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야! 이러한 느낌이 현실 소설을 읽는 재미가 되어 책장을 덮을 때까지 긴장감이 늦춰지지 않았다. 스포도 문제가 되지 않고, 반전이 없어도 재미있다. <소설 예수>는 작가의 첫 문학작품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감정을 간지럽히는 서정적인 문장, 꾸며낸 이야기와 실제 역사가 탄탄히 짜여진 벨트위에 독자를 올려놓고 성큼성큼 걷게하는 이야기 구성의 노련함이 있다. 시작은 미숙했지만... 이야기의 컨베이어벨트는 독자를 2000년 전으로, 현재로 자유자제로 끌고 다닌다. 책장을 덮으며 내가 2000년 전으로 돌아가 예수를 직접 본 듯한 여운이 있다. 그러나 나는 현재의 시간안에 서있다. 책속에 기록된 이러저러한 몇명의 이름이 그 이름을 바꾼 현대의 실제인물로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2천년을 넘나드는 평행이론이다.
지리적으로 중국 러시아 일본 사이에, 지정학적으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패권 다툼의 한 가운데 있는 우리의 현실이 눈에 보인다. 제국의 그늘이다.
로마제국의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 그에 앞장선 간악한 군림자 예루살렘 성전의 행태를 읽으며 식민지 시대를 겪은 우리들의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그 뿐인가, 예수 시대로부터 2천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우리에겐 2천년 전의 로마제국과 같은 제국의 힘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지 않은가. 그 때의 예루살렘 성전은 2022년에도 우리 곁에 모습을 바꾸어 존재하고 있다. 2천년을 넘나드는 평행이론을 다시 생각케 한다.
<소설 예수>는 참 잘 썼네, 별것도 아니네, 이런 단순한 평과는 거리가 있는 책이다. 예수가 뿌린 씨앗이 내 안에도 심겨져있고, 그것이 발아되고 자라는 구체적인 과정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닫도록 작가는 강력히 요구한다. 독자가 <소설 예수>를 집어들기엔 무겁고 버거운 책이다. 그러나 마치 서정시처럼 아름다운 문장은 끈을 놓치않고 따라붙으며 무거운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어쩜 그리도 참 아름다운 문장을 지어냈는지! 감성을 건드릴 때는 가슴을 촉촉히 적셔주고, 잔인함을 묘사할 때는 소름돋는 무서움으로 떨게 만들고, 지배계층들의 노회한 정략은 놀랄만큼 사실적으로 그렸다. 종교서적, 기독교 책이라는 선입견을 내려놓으면 점점 짧아지는 현대소설의 경향을 벗어난 대하소설의 맛을 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설명이 장황해서 지루해지는 고개만 잘 넘기면 고개마루에서 흘린 땀이 시원하게 닦일 것이다.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부활’에 관한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음에 의아해 할 것이다. 이 책은 예수를 현학玄學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예수의 초월성을 말하지 않았다. 사람의 아들 예수, 갈릴리 청년 예수를 그렸다.
예수는 책 속에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라고 가르쳤다. 무조건 따르지 말고 "왜?" "왜 그러느냐?"고 물으라고 했다. 작가는 독자에게 많은 물음표를 던졌다. 독자는 책의 곳곳에서 작가가 제시한 삶에 "왜요?"라는 질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 답을 얻는 것도, 답을 얻은 다음에 '어떻게' 사는 것도 독자의 몫이다. 행간을 음미할 여유도 없이 빽빽하게 써나가던 작가는 마지막에 커다란 여백을 남긴다. 이 책을 읽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빈칸에 그려보라고.
저는 <소설 예수>의 저자 윤석철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나의 <소설 예수> 리뷰는 그의 아내로서 쓴 것이 아닙니다. 순전한 독자의 시각으로 썼습니다. 그동안 제가 브런치 매거진 '책을 읽다'에 쓴 다른 작품들의 리뷰와 <소설 예수>의 리뷰가 다르지 않습니다. 작품을 읽는 독자로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쓰려고 많이 노력한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3년 1월14일에 서울 정동 아트센터에서 <소설 예수> 북 콘서트를 엽니다. 공주대학교 조동길 교수의 <7일간의 간절한 물음 "소설 예수"에 담긴 경계의 미학>이라는 주제의 문학평론 강의가 있습니다. 이어서 챔버 오케스트라의 연주, 독자와 작가와의 대화로 진행됩니다.
혹시라도 참석 의향이 있으신 분은 연락주세요. 제대로 된 프로그램 안내장을 다시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