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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Dec 25. 2022

<소설 예수 7> 문이 열리다.

소설 예수 7권 문이 열리다.

저자 ; 윤 석철    출판 ; 나남,  468쪽, 2022/07/25


(책의 인용부분은 따옴표 속 파란색 글씨, 인용 뒤에 있는 숫자는 책의 쪽수이다. 리뷰는 필자의 감상평보다는 책에 수록된 스토리 전체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쓴다. 7권이 끝난 후에 총평을 쓸 예정이다.)


전체 일곱권의 책중에 드디어 마지막 책을 읽었다. 예수는 분명히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끝을 알고 읽는 책, 궁금증이 없는 건조함을 섬세한 너무나도 섬세한 문장들이 커버해준다. 감성을 건드릴 때는 가슴을 촉촉히 적셔주고, 잔인함을 묘사할 때는 소름돋는 무서움으로 떨게 만들고, 지배계층들의 노회한 정략은 놀랄만큼 사실적으로 그렸다. 

6권의 예수 체포에 이어 7권에서는 예수의 재판과 처형을 그렸다. 모두가 성탄절이라고 들떠있는 이 시기에 나는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를 읽다니… 그러나 결론은 같다. 예수가 태어나는 것이나 예수가 죽는 것이나 모두 새 세상의 문을 여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 세상의 문을 연 사람 예수!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는 40명의 대산헤드린 의원들이 모여 예수 처형에 대한 재판을 한다. 요셉은 이 재판이 대산헤드린 재판이 될 수 없다고 항의한다. 니고데모가 나서서 동조한다. 성전이 아닌 가야바의 집이라는 점, 야간에 열리는 재판이라는 점을 들어 재판의 정당성을 부정한다. 절차의 문제를 지적하며 재판을 무효화하려고 한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설치된 대산헤드린은 유대 최고재판소일 뿐만 아니라 토라의 최종 해석권한을 가진 기관이다. 30쪽. 

성전 예식을 맡는 사두개파와 토라에 관한 일을 주도하는 바리새파 의원들 사이에 설왕설래 의견이 오간후에 재판이 열린다. 결론을 정해놓고 그에 맞는 죄목을 찾아 짜맞추는 재판이다. 예수의 죄목은 무엇인가.

“첫째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 이스라엘에 내려 주신 토라, 그 법을 거스르며 가증스럽고 참람한 주장을 한 범죄, 두 번째는 토라의 가르침에 위반하는 저자의 행동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 이스라엘의 안녕과 평화를 해치는 일, 즉 황제 폐하에 대한 반역의 죄입니다.” 33쪽 성전 제사장 야손의 보고이다. 

요셉은 또 다시 항의한다. 황제 폐하에 대한 반역은 로마에서 다룰 문제이지 대산헤드린에서 재판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을 무효화시키지는 못한다. 야손은 예수의 출생문제를 꺼내든다. 예수가 맘제르Mamzer(사생아)라고 폭로한다. 이방인이라 하였고, 재판장은 술렁거린다. 어찌하든 예수를 살리려는 요셉은 예수를 추방하자고 한다. 이스라엘 죄인은 토라에 따라 사형을 하고, 이방인은 추방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한다. 재판장의 질문마다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답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의 법으로 여기는 안식일을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이 사람이라고 한다. 세상의 중심에 야훼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이 서야한다고 선언한다. 격분한 대산헤드린 의원들의 신문과 예수의 항변이 길게 이어지고 판결의 시간이 되었다. 니고데모는 예수에게 최후로 진술할 기회를 주자고 제안한다. 요셉이 나서서 동조했다. 최후의 진술이 허락되었고 예수는 ‘나에게 마지막 씨를 뿌릴 장소가 허락된 셈’ 72쪽.이라 생각했다. 

“하느님이 내려 주신 법을 내세워 그대들이 나를 재판하지만, 나는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았습니다.”

오직 한 분 하느님, 그 분이 내려준 오직 한 가르침으로 이스라엘이 지키며 살았던 법 토라, 그 법과 하느님의 뜻이 다르다고 예수가 말한 셈이다. 74쪽.

“하느님은 세상 밖에서 땅을 내려 보시다가 가끔씩 세상일에 개입하시는 분이 아니고, 처음 창조하신 세상 그대로 사람에게 넘겨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원래 머무셨던 허무와 공허의 흑암을 비워 놓고 그분이 창조하신 세상 속에 들어오셔서 사람 속에, 생명 속에 스며드셨습니다. ~~ 세상 밖에 있는 하느님을 찾지 말고, 사람 속에 스며들어 와 계신 그분의 뜻을 따르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어느 날 죽어서 그분의 은혜를 입어 하늘 궁정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여기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 속에서 이뤄야 하는 나라요.”

“모두 하느님의 품성을 지닌 귀한 생명입니다.” 77-79쪽.

제자들을 가르치듯 대산헤드린 의원들을 가르치는 예수. 마지막으로 씨를 뿌리는 시간. 의원들은 최후 진술의 시간을 준 것을 후회하고,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예수의 선언이 이어진다. 죄인이 목숨을 구하는 최후 진술이 아니다. 하느님이 떠난 빈 공간을 섬기고 경배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여기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와 계시다는 가르침이다. 하느님은 이런 분이라는 선언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타락하기를 기다렸다가 벌을 주시고, 그런 혹독한 벌을 받고 벌벌 떨며 회개할 때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분이 아닙니다. 처벌하기 위해 벌을 내려주고, 법을 지키는지 어기는지 지켜보다가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건 바로 세상 왕국이나 제국이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처음 창조하실 때 그분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바로 우리 인간이야말로 하느님의 의식을 가진 첫 번째 존재라는 말입니다.” 80-82쪽.

예수의 최후 진술은 <소설 예수> 전권을 꿰뚫는 큰 획을 긋는다. 하느님은 어디 계신지, 하느님은 어떤 분인지, 하느님 나라는 어떠한지를 잘 설명해준다.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 7권에서 작가는 각 권에 흩어져있는 이야기를 한군데로 모을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로마황제 티베리우스 19년 니산월 14일, 예루살렘 대산헤드린에서는 예수에게 사형을 내렸다. 82쪽.


예수의 산헤드린 재판에서 증인을 섰던 므나헴은 고통스런 마음으로 베다니 여인숙으로 돌아온다. 제자들은 예수의 소식을 묻고 므나헴은 제자들에게 갈 수 있는 곳으로 모두들 떠나라고 한다. ‘씨를 남겨두어야 뿌릴 수 있다’는 예수의 말을 상기시키며.

알렉산더의 첩자로, 예수의 제자들과 어울려 4년이나 함께 다니던 므나헴은 대산헤드린 재판에서 예수의 행적(죄)을 낱낱이 고하는 증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에 대하여 세상에 처음으로 증언하는 사람이 되었다. 예수는 므나헴에게 그의 증언들을 기록으로 남기라고 당부했다. 

사형언도를 받고 총독궁 감옥에 갇힌 예수를 아레니우스가 찾아온다. 

아레니우스 “선생은 유대 사람들이 얘기하는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 유대의 신이 보낸 사람인가요? 유대를 독립시키고 이 땅에 새로운 왕국을 세울 사람? 그렇다면,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계획이었소?”

예수 “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이 땅 위에 왕국을 세우려는 사람도 아니고, 반란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도록 일을 벌이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129쪽.

아레니우스 “그럼 선생은 무엇이오? 누구요?”

예수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세워진 표지판? 이정표라고 하면 맞을 것 같군요.” 131쪽.

사람들이 십자가를 끝으로 삼지 않고, 출발하는 지점으로 삼을 수 있도록, 그들이 앞으로 걸어갈 길을 보여주는 이정표가 예수에게는 십자가다. 395쪽.

아레니우스의 궁금증에 예수는 정성껏 답을 한다. 이 또한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이고 세상에 뿌리는 씨앗이다. 예수는 반란을 도모하지도 않았고, 그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칠 뿐이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사시려고, 사람들 안에 깃들어 사시려고 세상을 지으시고 이미 사람에게 맡겨 두셨지요. 그러니 사람이 자율성을 가지고 세상을 꾸려야지, 언제까지 하느님에게 매달려 살 수만은 없지 않겠어요?” 133쪽.


예수의 처형에 관계되는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에게 돌아올 책임의 무게를 저울질했다.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생기면 재빨리 발뺌을 할 속셈이다. 성전 대산헤드린에서는 유대법으로, 총독궁에서는 로마법으로 처리하기로 하였다. 예수를 볼모로 대제사장 가야바, 분봉왕 안티파스, 총독 빌라도의 수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알렉산더와 아레니우스의 지략이 빚은 결과이다. 위수대장도 한몫 거들었다.

“하얀리본의 두목 히스기야, 그리고 바리새파인 바라바와 예수를 한꺼번에 오늘 처형하면,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자가 도적떼와 원래 한패거리였다고 소문을 내면 되겠지요.” 157쪽.

관계자들 모두 서로 책임을 미루고 자신의 변명거리만 찾는 모습을 보인다.

내가 가볍게 처벌하면 대제사장이나 성전의 체면이 크게 떨어질 것 같아 그대들이 원했던 대로 처형을 명령한 것이오.” 총독은 성전에게 큰 호의를 베푼 사람이고, 십자가 처형을 받는 예수에게도 크게 잘못이 없다고 말한 셈이다. 309쪽

갈릴리 사람, 분봉왕에게 돌려보낸다.” 결국 갈릴리 분봉왕과 성전이 서로 결탁해서 예수를 제거했다는 선언이다. 310쪽. 


예수, 히스기야, 바라바는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된다. 바라바가 십자가 처형을 받게되자 바리새파는 위기에 처했다. 로마에 사는 유대인 사반을 찾아 바라바의 구명을 간청하고 사반은 빌라도 총독을 만난다. 우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협상으로 하얀리본 결사 400명을 넘겨받기로 한다. 

“장정 한 사람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도적떼 400명이면 하루 400데나리온, 1년 365일이면 14만4천 데나리온, 자그마치 품삯만 24달란트입니다. 품삯만…” 

“그렇게 몇 년 굴리면 100달란트나 되는 돈이 고스란히 굴러 들어옵니다. ~~다리도 놓고 수로도 건설하며 밤낮으로 일을 시킬 수 있습니다.” 177쪽.

공짜로 얻을 수 있는 노동력, 미셀 푸코의 책 <감시와 처벌-감옥의 역사>가 생각난다. 1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300여년의 사회를 분석한 책인데 이 책에서도 범죄자와 노동력을 연결시켰다. 산업사회 이전에는 권력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신체형을 집행했지만, 산업사회가 되면서 신체형으로 노동력을 상실하는 것보다는 신체를 이용하는 것을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범죄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노동의 형벌을 내렸다.

돈을 추구하는 권력자들의 생각은 세월의 경계없이 발전했다. 사반은 총독을 설득하여 하얀리본 결사체 400명을 손에 넣고 다음에 바라바까지 내달라고 한다. 그건 당연히 총독에게 통할 수 없는 청원이다. 그 대신에  빌라도는 바라바를 십자가에서 내릴 것을 결정한다. 히스기야와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리지 못하도록 했다. 예수는 어떠한 죄목으로 십자가 처형을 받는가? 성전이 만들어 총독에게 고발한 예수의 죄목은 이렇다. 예수 처형의 책임을 총독궁에 돌리려는 고발이다.

“예수 저자는 황제 폐하에 대한 반란의 마음을 품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한 죄가 있습니다.”

“두 번째 죄목으로 그는 스스로 유대인의 왕, 즉 메시아라고 자칭한 사람입니다.”

“셋째, 그는 백성을 소동케 하는 자입니다.”

“넷째, 저자는 성전 뜰 안에 들어와 황제 폐하께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선동했습니다.”

“마지막 한 가지, 총독 각하께서 도성에 입성하면서 내린 포고령을 저자가 정면으로 위반했음을 고발합니다.” 187-190쪽


예수의 온 몸은 채찍에 찢겼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공적公敵! 예수는 이스라엘의 공적으로 처벌받고 있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를 그대로 놔두면 온 유대와 예루살렘 성전과 도성이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200쪽. 

예수를 십자가 처형으로 다스리는 것은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이다. 

처벌의 목적이 고통을 주며 예수를 제거한다기보다 사람들에게 구경시키겠다는 뜻이다. ~~끔찍한 폭력으로 경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 지배자들은 십자가 처형을 시행했다. 205쪽.

공개처형을 통해 지배자는 자기의 힘을 과시하고, 법을 어기고 죄를 지으면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공포를 사람들 가슴속에 깊게 새길 수 있다. 213쪽.

미셀 푸코도 <감시와 처벌-감옥의 역사>에서 신체형의 공개처형에 대해 언급했다. 죄지은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것을 일반인들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권력자들은 그 정당성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다. “신체형”은 법률적, 정치적 기능을 갖는다고 한다. 군중들이 입회하여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두려움을 품도록 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받은 십자가형이 그렇다. 

처벌받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오래, 깊게, 많이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처형을 시행했다. ~~구경하는 사람이 얼마나 끔찍하게 느끼는지, 그 반응이 훨씬 더 중요했다. 207쪽.

십자가 처형은 육체의 고통 그 이상으로 큰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남자든 여자든 발가벗겨서 매단다. 죽음보다 더한 수치를 주는 것이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은 후에도 형벌이 계속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 처형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채 들짐승 산짐승 그리고 독수리 까마귀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고 마지막 뼈 한 조각이 사라질 때까지 형벌은 이어진다. ~~ 몸은 사라지고 수치스러운 이름만 남는 형벌이 십자가 처형이다. 212쪽.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 처형받는 상황에서 예수가 남긴 말을 회상하기도 하고, 이것은 심판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돌로 된 심장이 살로 된 심장이 되었을 때,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마음이 살로 된 마음이 되었을 때, 선생님은 나와 함께 계신 거래요.” 224쪽. 요한의 말.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은 축복을 내리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세상을 심판하여 땅 위든 하늘 위든 새로운 세상, 하느님 나라를 이룬다고 그는(시몬 게바) 믿었다. 233쪽

요한이 자기 생각을 말한다. 

“내가 언뜻 생각하기에, 하느님은 예수 선생님을 통해서 세상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아담과 사람, 아브라함과 민족, 이제 예수 선생님과 세상!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234쪽.


예수의 온 몸은 채찍에 휘감겨 찢기고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 찢어지는 것이 어찌 몸뿐이겠는가. 뒤쫓아가는 어머니 마리아의 가슴도 예수의 몸 못지않게 찢어진다. 비척비척 쓰러질 듯 달려가며 아들을 부르는 어머니 마리아의 외침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런 감정에서 무슨 서술적인 묘사가 필요한가. 작가는 가장 짧은 문장으로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예수! 얘야, 얘야….” 258쪽.

긴 가로기둥을 메고 비틀비틀 걷는 예수에게 잠시 멈출 시간이 주어졌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동생 야고보,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에게 다가갔다. 예수와 어머니의 만남이다. 이 장면에서 독자는 예수가 신神의 아들이 아니고 사람의 아들임을 확실히 느끼게 된다. 

마리아는 들고있던 보따리를 작은아들 야고보에게 넘기고, 큰아들 예수의 수염 더부룩한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 보따리 춤에 밀어 넣었던 빵 조각을 꺼내 조금씩 찢어 아들의 입에 밀어 넣어 주었다. 

빵을 입에 넣어주는 어미, 그 마음을 알기에 거절하지 않고 받아먹으며 입을 우물거리는 자식,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은 어미고 자식이었다. 273쪽.

 

백부장에게 잠시 시간을 얻은 예수는 그 고통의 순간에도 가르침을 펼친다. 평화에 대한 메시지다.

“평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말, 행동, 상대방을 바라보는 눈길 모두 평화를 이루는 길입니다. 평화는 우리가 찾아가야 할 어느 곳이 아니고, 우리가 매일 걷는 그 길입니다.” 274쪽.

제가 얘기합니다. 모든 사람 속에 하느님의 형상이, 품성이 들어 있다고. ~~사람이 다른 사람 속에 스며들어 계신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277쪽

모든 사람은 선하게, 아기처럼 선하게 태어났습니다. 그 속에 하느님이 부어 주신 선한 본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나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커 가면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선을 끌어내십시오. 그래야 세상은 끝날을 피할 수 있습니다.” 279쪽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 말고, 나를 억압하고 강제하고 폭력을 휘두른 사람에게 폭력으로 이길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겁니다. ~~사랑과 용서는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걸음입니다.” 291쪽.

"힘으로 저항하지 말고, 사람의 가치와 사람의 존엄성을 내세워 상대가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저항하라고 가르칩니다. ~~내 목숨을 내던지며 비폭력으로 저항하라고 가르칩니다." 369쪽

여기 내가 서있다! 폭력으로 이길 수 없는 사람, 가장 힘없는 한 사람의 유대인~~ 나를 이기지 못하면, 폭력 너는 아무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채 그렇게 말하면서 로마의 폭력, 제국의 폭력, 세상의 폭력에 저항하는 것 같았다. 순순히 매달렸다는 말은 복종이 아니고 가장 큰 저항이 분명했다. 382쪽.


역사는 예수, 갈리리 청년 예수를 어떻게 기록하는가? 경전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는 유대의 정치무대에서 유대인들 사이의 미움과 질투 때문에 빌라도의 손을 빌려 처형된 사람으로 기록됐다. 327쪽.

예수의 마지막 길을 따라 걸은 로마 사람 아레니우스는 예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예수, 그가 누구인지 생각에 잠긴다. 

세상의 지배 체재와 황제의 다스림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사람이 예수라는 것을 알아챘다. ~~신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혁명가라고 그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루려는 세상은 로마제국과 속주 유대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에 발붙이고 사는 모든 사람의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347쪽

“나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보고 있는 저 일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371쪽.


처형장이 가까워지고 있다. 처형장을 오르는 길이 나사렛집 언덕을 오르는 것같다. 몇 백 걸음만 걸으면 십자가를 세울 자리에 이른다. 예수는 아버지 요셉의 목소리를 듣는다.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이 가까워진다. 처형장이 가까워진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떠오른다.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는 바라바 옆 자리 십자가에 매달렸다. 바라바는 가운데, 히스기야는 바라바 옆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세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있다. 

바라바와 히스기야의 십자가 위에 각각 ‘유대인의 메시아’라는 팻말을 달아 놓았다. 유대인들이 메시아라고 믿는 사람이라도 로마는 거침없이 처형한다고 밝힌 셈이다. “~~너희들의 메시아는 이렇게 죽었다” 397쪽.

예수의 팻말은 ‘유대인의 왕’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십자가를 졌다고 한다. <소설 예수>에서는 속죄제사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속죄제사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죄인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이나 짐승이 희생제물이 되어 생명을 잃는다는 점이다. ~~염소를 대속물로 바치면서 정작 죄인들은 경건한 구경꾼으로 물러날 수 있는 교묘한 장치였다. 401쪽

하느님은 흥정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예수는 생각했다. 제사를 받고 마음 돌리는 분이 아니고,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이스라엘의 노력에 한 번도 고개를 끄덕인 적이 없는 분이다. 412쪽.


아레니우스의 도움으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야고보, 막달라 마리아는 처형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소설 예수> 1권, 첫 시작에 보퉁이를 들고 아들 예수를 찾아나서는 마리아가 등장하는데, 보퉁이는 예수가 죽은 후에 몸을 닦아줄 향유였다. 마리아는 예수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예감인지 예지인지…

히스기야가 먼저 숨을 거둔다. 막달라 마리아와 히스기야, 제대로 한번도 함께 하지 못했던 그들이 죽음의 자리에서 아무런 훼방도 받지않고 시간을 함께 한다. 

마리아는 히스기야를 올려다보고 있는 동안 놀라운 경험을 했다. 히스기야의 모습이 조금씩 예수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기 때문이다. ~~히스기야는 예수의 십자가와 하나로 포개졌다. 예수와 히스기야가 두 사람이었지만 결국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마리아는 깨달았다. 422쪽.

예수는 히스기야를 위로한다. 

“히스기야! 그대는 오늘 나와 함께 하느님 나라에 있을 걸세.”

“고맙네, 예수! 자네와 함께 있을 곳이라면 나는 어디든 좋네….” 427쪽 히스기야의 마지막 말이다. 

“토라의 나라! 로마 놈들을 몰아내고…. 아, 지극히 높으신 분 하느님! 저를 받으소서!” 434쪽. 바라바의 마지막 말이다. 바라바는 십자가에서 내려져 바리새파에서 데려갔다. 


예수가 마지막 숨을 쉬었다. 하느님의 소리가 마지막 숨결로 들려왔다.

“사람 속에 내 형상이 들어 있는데 어디로 또 나를 찾으러 떠난단 말이냐? 무엇을 찾아? 그러니, 찾으러 돌아다니고 헤매고 울고불고 하다가 결국은 깨닫지 않겠나? 찾았던 거기가 바로 여기고, 지금이 그때고, 사람이 찾아 헤맨 하느님이 바로 자기였다고.”443쪽.


하느님의 시대가 사라지고, 사람의 시대 문을 연 사람 예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자신도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이 바로 함께 머무는 것이라고 처음 안 사람으로. 447쪽.

어머니 마리아의 보따리 속에서 꺼낸 향유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몸을 씻기고, 히스기야의 몸도 씻겼다. 

마리아가 혼잣말을 한다.

“우리 마음속에서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면, 선생님은 우리가 되신 거겠지요. 마치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듯….” 457쪽.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외치던 예수, 하느님 나라를 힘으로 이루려고 한 히스기야,  토라의 나라를 세우는 메시아가 되고 싶었던 바라바, 제국과 성전의 폭력에 대항하던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어서 다음 글에 <소설 예수> 1권-7권의 총평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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