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예수 6권 땅으로 내려온 하늘
저자 ; 윤 석철 출판 ; 나남, 504쪽, 2022/07/25
(책의 인용부분은 따옴표 속 파란색 글씨, 인용 뒤에 있는 숫자는 책의 쪽수이다. 리뷰는 필자의 감상평보다는 책에 수록된 스토리 전체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쓴다.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7권까지 완독한 후에 총평을 쓸 예정이다.)
12월, 지금은 기독교의 대림절 절기이다. 대림절은 성탄절로부터 4주 전의 첫 일요일부터 시작하여 크리스마스 이브까지이다. 성탄절은 아이들 말처럼 '예수님 생일'인데 교계에서는 단순히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을 넘어 그를 기다리는 마음까지 담는다. 대림待臨, 강림降臨, 대강待降, 이처럼 대림절待臨節은 기다림의 절기이다. 아직도 우리는 예수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천년이 지나고 또 지나고 새천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우리 앞에 오지않은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가? <소설 예수>에 따르면 예수, 그는 이미 2000여년 전에 태어나 그 시대를 육신으로 살다간 사람이다. 그럼 우리는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므두셀라"라는 별명을 가진 대추야자가 있다. 1963년 마사다 발굴 때 발견된 씨앗이 발아한 것이다. 마사다는 AD73년 로마군에 잡히기 전에 집단 자살한 유대인 무리가 묻힌 사막지역이다. 이 씨앗은 연구실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2005년에 싹을 틔웠다. 실증된 물리적 현상이다. 씨앗의 생명력은 이렇게 강하고 끈질기다.
<소설 예수> 6권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씨앗을 뿌리는 것에 비유한다. 예수는 씨앗 그 자체이기도 하다. 예수가 유대땅에 뿌린 씨앗은 어찌 되었을까? 강한 생명력을 가진 대추야자 므두셀라처럼 지금 여기에서 싹을 틔우고 있다. 2000년 세월을 기다려온 대추야자는 원래의 대추야자로 발아했다. 그러나 같은 세월을 걸어온 예수는 원래의 모습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변형된 모습이다. 예수라는 씨앗 그 자체도 다른 모습이고, 그가 뿌린 씨앗들은 인간의 손을 탄 유전자 변형으로 완전히 다른 나무로 자랐다. 예수는 지금 어느 나무위에 올라앉아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내가 뿌린 씨앗은 이런 모습이 아닌데..."
<소설 예수> 6권은 1권~5권에 이어 예수가 뿌린 씨앗, 발아하여 하느님 나라를 이룰 그 씨앗들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오늘날의 성전(예배당)을 그대로 묘사한 글이다. 우리가 열심히 다니는 교회의 모습이 이런 모습 아닐까. '그들만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곳.
예수가 성전 뜰에 나타나기 전까지 대제사장, 제사장들은 더할 수 없이 좋은 날을 보냈다. 끄는 대로 따라오고 모는 대로 줄지어 몰려가는 양 떼 같은 유대인이 있고, 성전을 지탱해주는 로마제국의 무력이 있으니 하느님이 성전에 머물든 떠났든 문제될 일이 없었다. 성전에 들어와 소란떠는 사람만 없고, 지금 차지한 자리를 지킬 수만 있으면 '세상은 평화롭고 모두 평안하다!'고 말하며 살았다. 15쪽.
랍비 요하난의 예상은 그 당시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사실 그대로이다. 제도적인 교회에 대한 경고로 들린다.
"어느 때쯤 되면 선생의 가르침보다 선생을 따른 제자라는 자기들 조직을 앞세우고, 그 조직의 운명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날이 올 것이오." 16쪽
예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따르는 제자들의 마음 속은 오늘날의 기득권층과 똑같다. 나누고 갈라서 층을 만들고 자신은 좋은 층위에 있고싶다는 욕망이 예수 선생의 제자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일이 잘되어 예수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제자들과 다른 사람, 그리고 제자들 중에서도 처음부터 갖은 고생을 다하며 따른 사람들과 나중에 참여한 제자들 사이에는 당연히 구분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19쪽.
<소설 예수> 각 권마다 거듭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곳인가? 하느님이 만들어놓고 그 후로는 하느님이 직접 법과 상벌로 엄하게 다스리는 나라인가? 내가 이만큼 만들었으니 이제는 너희들이 더 만들어가면서 살라고 우리에게 맡기신 나라인가...
"모든 사람이 그 나라에 들지 않으면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그렇소! 한 사람이라도 문밖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다면 이뤄진 것이 아니오." 31쪽.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이뤄 주는 나라가 아니고 사람의 힘으로 이뤄지는 나라입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이래서 빼고, 저 사람은 저래서 빼놓고 남은 사람들끼리 모여 이루는 나라가 아니고, 그가 누구였든 함께 손잡고 이루어야 합니다." 32쪽.
"하느님 나라는 다른 사람을 빼놓고 나와 우리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35쪽.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면, 그 나라는 벌써 시작된 겁니다." 87쪽.
법에 따라 합당한 사람만 받아들이는 나라가 아니고, 모든 사람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법이 필요 없는 나라다. 101쪽.
하느님 나라는 찾아가는 목적지가 아니고 찾아가는 길 걸음이다. 자기 두 발로 걸어가며 겪는 일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걷는 일이다. 338쪽.
"세상에 눈뜨고 싹을 내밀며 흙을 들고 살포시 일어나는 새싹이 바로 하느님 나라지요. 따로 있는 것 아니고, 여기 우리 속에, 이뤄지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라고 말씀하신 거지요?" 381쪽
제자들은 전통을 붙들고 이어오며 토라에 따라 전통에 갇혀 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예수는 이스라엘 전통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다.
전통은 신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믿는다. ~~사람이 땅에 두 발 디디고 살아온 지난날은 신이 역사役事한 역사歷史였고 사람이 살아갈 미래는 신의 계획이라고 믿었다. 40쪽.
예수의 눈에는 이스라엘을 조각조각 갈라놓은 전통들이 보였다. 특히 유대 지방 예루살렘 지배자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토라 전통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지배세력, 성전에 협력하는 바리새파, 그리고 옛 하스몬 왕가와 헤롯 왕가의 귀족들이 그러했다. 41쪽.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저서 <만들어진 전통 The Invention of Tradition>이 떠오르는 구절이다. 우리가 알기로는 전통이란 이미 있어왔던 것, 이어져 내려왔던 것인데 홉스봄은 전통이 만들어졌다고 우리를 일깨운다. 홉스봄은 <만들어진 전통>에서 전통은 기관, 지위, 권위의 관계를 확립하거나 합법화하는 것, 그리고 신념, 가치 체계 및 행동 관습의 주입을 사회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만들어진다고 기록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유대에서도 지배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전통으로 피지배자들을 지배했던 것이다. 피지배자들은 오래된 관행과 만들어진 것이 다르다는 의식없이 지배자들을 따랐다. 예수는 지배자의 전통에 갇힌 사람들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예수는 북쪽 갈릴리 지방의 민간전통이 뿌리로 삼았던 하느님을 전혀 새롭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했다. 42쪽.
예수는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서 찾으라고 제자들을 가르친다.
"들으세요! 하느님이 지금 여기 계신데, 왜 천 년 이천 년 전 그때 거기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분을 찾습니까?" 43쪽.
예수는 자신에게 닥쳐올 마지막 순간을 예감하면서도 변함없이 제자들을 가르쳤다. 씨를 뿌리고 또 뿌렸다. 자신이 떠난 후에는 제자들이 계속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흩어 뿌리기를 바라며. 해가 뜨면 성전 마당에서, 달이 뜨면 숙소에 모여, 낮이고 밤이고 길을 가면서도 예수는 제자들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다.
"그대들은 스스로 씨를 뿌리는 사람이며 한편으로는 씨가 돼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날, 하느님 나라가 그대들로부터 더욱 확장될 것입니다." 51쪽.
혁명을 도모하는 사람은 비단 예수 뿐이 아니다. 하얀리본 역시 유월절 거사를 꿈꾸며 '칼을 갈았다'. 하얀리본 결사대는 500개의 시카 칼을 준비했다. 하느님 나라는 폭력으로 이룰 수 없다고 가르치는 예수와 달리 하얀리본은 무력武力으로 성전을 무력無力화 시킬 계획이다. 감옥에 갇힌 우두머리 히스기야 대신 바라바는 앞장서서 하얀리본을 지휘한다. 같은 뜻으로 뭉쳤다고 속내도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앞에서 설쳐대는 바라바와 달리 유다의 꿍꿍이속은 제자들중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다. 거사의 성공을 위해 히스기야를 감옥에서 빼낼 계획이다. 히스기야와 예수가 손잡으면 거사에 성공하리라고 생각한다. 그 성공에 유다 자신의 역할, 자신이 세운 공이 두드러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유다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 주겠어! 나는 열두 명이든 70명이든 그냥 예수 선생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니야! 하얀리본 동지들 500명 중 한 사람으로 대우받을 수도 없어!"
'히스기야 동지만 성전 뜰로 빼낼 수 있다면, 거사는 거의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 히스기야 동지야말로 예수 선생과 손을 잡고 천하를 한 번 크게 도모할 만한 그릇이 아니던가? 나는 그 두 사람을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고!' 63쪽.
예수가 말하는 해방은 무엇이고, 하얀리본이 도모하는 거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가 좋은 세상이 온다고 하여 그 말에 솔깃했던 움막마을 사람들은 그 '좋은 세상'을 오래 기다릴 수가 없다. 그들에게 좋은 세상이란 빵이 풍부한 세상인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하느님이 그들의 울부짖음과 한숨과 고통소리를 듣고 보내 준 구원의 소리처럼 들었다. ~~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배는 여전히 고팠고, 천막 아래 몸을 누이면 밤바람은 차고 바닥도 차갑고 암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침저녁으로 빵을 내려 주는 사람은 성전의 대제사장 가야바였다. 80쪽.
"아니! 그러면 예수 그 사람을 아예 따라나서든지! 빵은 성전이 내려주고, 좋은 말씀은 예수에게서 듣겠다? 빵 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 거에요!" 85쪽.
예수도 빵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다. 움막마을 사람들의 배고픔을 알고 있다. 성전 뜰에서 빵을 구하는 기도를 가르쳐주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내일 먹을 빵을 오늘 마련해 주십시오!" 85쪽.
예수가 전하는 하느님 나라는 하늘에서 빵을 뚝딱 떨어뜨려 내려주는 나라가 아니라, 배고픔을 알고 빵을 나누는 사람들이 이루는 나라이다. 장성하여 부모곁을 떠나 세상을 살아가듯, 하느님은 사람을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리고 사람에게 세상을 맡겼다.
예수에게 중요한 일은 세상 모든 일이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이뤄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사람들에게 맡겨진 세상!' 95쪽
"그 나라는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라기보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맡긴 사람의 나라'라는 말이 맞을 것 같네요." 104쪽
"아무리 사랑이 지극한 어머니도 장성한 아들에게 젖을 물리지 않는 것처럼, ~~어느 날부터 어머니는 자식에게서 강제로 젖을 떼고, 자식은 부모의 품을 벗어나서 세상을 살아가기 마련이지요." 106쪽.
프리드리히 실러의 <미학편지>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예술가는 비록 자기 시대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그가 시대의 보호를 받는 자이고 시대의 총아이기도 하다면 그에게는 고약한 일입니다. 은총을 베푸는 신은 늦기 전에 이 젖먹이를 어미의 품에서 떼어내어 더 나은 시대의 젖을 먹이고, 또 그를 멀리 떨어진 그리스의 하늘 아래에서 성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어른이 된 다음 그는 이방인이 되어 자기 시대로 돌아와야 합니다. ~~시대를 정화하기 위해 돌아오는 것이지요. <미학편지> 88쪽 인용.
빵에 목숨걸고 살아가는 움막마을 사람들은 매일 빵을 내주는 성전쪽에 붙어있는 것이 자신들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거사를 위해 하얀리본이 수사문 밖 덤불 속에 숨겨둔 무기를 성전에 신고했고, 함정에 빠진 하얀리본의 거사는 실패했다. 함정에 빠진 것은 바라바뿐이 아니다. 감옥에 있는 히스기야를 성전 뜰에 내보낸 것도 함정이었다. 하얀리본은 열린 성문밖으로 나가는 즉시 모두 목숨을 잃었다. 성전의 수많은 군중이 피를 흘리지 않게 하려고 하얀리본 동지들을 성밖으로 나가도록 한 히스기야는 하얀리본의 배신자가 되었다. 토라의 나라를 이루려는 바라바, 배신자 낙인이 찍힌 히스기야, 그저 공허한 말, 아직도 철학자 놀음을 하는 정신나간 사람(159쪽) 예수는 성전 뜰에서 서로 다른 각자의 방식대로 거사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
바라바의 연설은 열정적이었고, 군중들은 열렬히 호응했다.
"여러분, 느헤미아가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율법을 지키지도 않았고, 하느님의 명령과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고, 하느님이 허락하신 기름진 땅에서 살면서 주를 섬기지 않고 악행을 일삼는 죄를 지어서 우리가 이방의 종이 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성전을 청소하여 토라의 나라로 돌아갑시다." 185쪽.
비폭력과 평화를 주장하는 예수의 마음에 마음을 더한 히스기야는 관중들에게 피를 흘리지 말라고 호소했다. 군중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시아! 메시아!' 메시아를 연호했다. 바라바가 메시아이기를, 히스기야가 메시아이기를, 예수가 메시아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외침이다. "메시아! 메시아!".
"하얀리본은 갈릴리나 유대에서 사람의 생명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그 밤이 지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살리자고 다른 사람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얀리본이 혁명군이 되었다고 여러분을 죽음으로 몰아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돌아가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195쪽.
히스기야의 연설이 이어진다.
"저는 율법학자도 아니고, 토라를 깊게 공부한 사람도 아닙니다. 더구나 메시아라는 말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누가 배고픈지, 누가 아픈지, 누가 가장 애타게 하느님을 찾는지 그 울음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입니다." 197쪽
바라바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사람들 가슴속에서 불러 일으켰다면, 히스기야는 하느님의 최후 역사를 믿고 한 걸음 물러서서 기다리자는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199쪽.
바라바와 히스기야의 호소력있는 연설에 이어 예수의 연설은 단호한 선언이다.
"하느님은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원수와 맞싸워 굴복시키고 우리가 당한 일을 복수하여 되갚아 주시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듣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원수를 사람하며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214, 215쪽.
랍비 요하난은 성전 뜰에서 군중들에게 가르침에 열심인 예수를 찾아간다. 토라의 선생이지만 요하난은 예수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고 혁명이 실패하게 될 것을 걱정한다. 솔로몬의 주랑건물에 마주앉은 요하난은 예수에게 계획을 접고 돌아가라고 말린다.
"선생을 순교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토라에서 가르친 하느님이 아니라 선생 혼자 생각하는 하느님, 세상 사람들 중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하느님을 가르쳤기 때문이지요." 262쪽.
"제가 죽는다면, 죽을 운명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잔인하게 살해하느냐를 보여 주는 일입니다. 그건 하느님의 일이 아니고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르는 일이지요." 263쪽.
"이 세상은 다음 세상의 바로 전 단계가 아니고, 우리가 숨 쉬며 사랑하며 가족과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마지막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살아야 할 세상으로 바꾸는 일은 이 땅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짊어진 의무입니다." 271쪽.
예수는 '지금 세상'에서 '사람들'이 이루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강조했다.
"지금 우리와 함께 여기 계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왜 천 년,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까?" 339쪽
예수는 요하난에게 자신이 떠난 후에는 제자들에게 흩어지라고 했다고 말한다.
"선생님! 제가 제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멀리말리 달아나라고.... 손에 들고 있는 씨를 모닥불 속에 던져 넣지 말라고.... 그래야 땅에 뿌릴 씨가 남고, 그래야 씨 뿌릴 사람이 남지 않겠습니까?" 302쪽.
니산월 13일.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붙잡아 가장 끔찍하게 처형하기로 마음 먹는다. 성전 뜰에서 벌어진 하얀리본의 거사, 바라바와 히스기야, 군중들에게 흔들림 없는 자세로 가르침을 계속 하던 예수가 빌라도의 머리 속을 꽉 채웠다. 성전의 제사장들, 로마와 관계된 사람들, 모두들 제각각 다른 야심을 가지고 바쁘게 또는 느리게 움직였다. 눈에 띄는 움직임으로, 암암리에 숨겨진 움직임으로 수선스러운 니산월 13일 시간은 낮과 밤을 이으며 흐르고 있었다. 총독 빌라도가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 지방을 다스리기 시작한 지 7년이 된 시점이다.
총독은 2천7백명의 로마군 병력과 성전 경비대 병력, 대제사장 가문들이 보유한 가병들까지 통괄하는 권력자의 지위를 가진 사람이다. 로마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현실과 정신세계를 아울러 지배하는 유일한 존재인 셈이다. 244쪽.
이러한 빌라도가 무서움에 떠는 것은 혁명군의 무력이 아니다. 예수가 씨앗이라는 것, 예수가 씨를 뿌리고 다닌다는 일이 무서웠다. 씨앗을 뿌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깨달았다.
씨 뿌리는 사람을 없앤다고, 이미 뿌려진 씨가 싹을 내지 못할까? 씨는 때가 되면 싹이 트기 마련인 것을.... 그건 세상 권력으로 막아지는 일이 아니다. 황제의 명령으로도 막을 수 없다. 256쪽.
예수가 늘 말하는 '때'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때가 되었다.
"그 때라는 말씀은 한 달 두 달, 어느 날이라는 시간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겪어야 할' 일을 말씀하신 거지요." 292쪽.
때가 되었고, 예수는 자신이 떠난 후, 죽은 후에 제자들에게 흩어지라고 가르쳤다. 흩어져 씨를 뿌려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하는 마리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의 뜻을 전한다.
"손에 들고 있는 귀한 씨를 모닥불에 던져 넣지 말고, 들과 산과 밭에 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모이고 뭉치면 단단해진다. 단단함 속에는 생명이 깃들 수 없다. 그러니 뭉치는 대신 퍼져야 하고, 모이는 대신 흩어져야 하고, 움켜쥐는 대신 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96쪽
성전 제사장들은 유월절 제사 준비에 바쁘다. 대제사장이 입을 예복을 로마군 위수대에서 받아왔다. 대제사장은 하느님과 사람을 매개하고, 성과 속을 매개하고, 하느님이 창조한 만물을 대표하고, 열두 지파 이스라엘 사람을 대표하는 지위, ~~ 예복을 입는 순간 그는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권력과 위엄을 가진 사람이 된다. ~~예복을 입지 않은 대제사장은 그저 성전 제사장 중 우두머리일 뿐이다. ~~로마황제의 특별 허가를 받지 않으면 성전이 예복을 받아 보관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로마총독 시절부터는 총독궁의 명령에 따라 세금을 걷어 바치고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는 역할로 격하됐다. 314, 315쪽.
밤이 지나면 운명의 날이다. 예루살렘에게도, 제자들에게도, 예수에게도 운명의 날은 시간을 미루지 않는다. 제자들과 함께 성전에서 나온 예수는 홀로 있고자 제자들과 헤어진다. 기드론 골짜기 흰 바위앞에 예수는 혼자 앉았다. 제자들 앞에서 체포된다면 그들이 위험에 빠질 것 같았다. 제자들마저 모두 체포되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가 늘 했던 말대로 손에 들고 있는 씨를 모두 모닥불 속에 털어 넣는다면 누가 남아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367쪽.
<소설 예수> 1권의 시작 부분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의 동생 야고보와 함께 보퉁이 하나를 들고 성급히 예수를 찾아 나서는 장면이 있다. '내 아들 예수야!' 예수를 부르며 애타게 예수의 뒤를 쫒던 마리아는 드디어 베다니 마을에서 나사로를 만나 예수의 거처를 알게 된다. 아들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의 상봉이 가슴벅찬 감동이 될지, 가슴 찢어지는 흉통이 될지는 <소설 예수>의 끝무렵에서나 알 것 같다. 마리아와 야고보는 나사로의 안내를 받아 여인숙으로 들어간다. 마리아는 아들에게 닥칠 일을 예감하며 불안에 떤다.
한편 알렉산더, 위수대장 야손, 경비대장, 이들은 반란을 일으킨 자들의 처형에 대해 궁리한다.
"예수 그자는 반드시 성전의 재판과 총독 각하께서 재판을 통하여 처벌하시는 것이 훗날 생길 문제를 사전에 방지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법과 로마법을 위반해서 총독 각하의 처벌을 받았는데 누가 감히 이러니저러니 입에 올리겠습니까?" 402쪽.
"이번에 명절을 맞아 성전에 올라온 모든 사람들에게 그 참혹한 모습을 보여 주면 모두 크게 놀라 움츠러들고 앞으로는 감히 그 누구도 성전에 들어와 소란을 피울 생각을 못할 겁니다." 403쪽.
그들은 단칼에 목을 베는 것보다 더 처참한 처형을 생각한다. 죽음보다 더 큰 수치를 줄 계획이다.
예수는 이스라엘, 유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예수는 그들에게 당장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오!" 413쪽.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성전에 올라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그분이 앞으로도 보호해 준다는 약속을 언제든 다시 확인 받을 수 있었다. 새로운 진리를 찾지 않고도, 어제까지 해 오던 대로 성전을 섬기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할 수 있었다.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알기 때문이었다. 413쪽.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 처형을 받은 후에 제자들이 다시 그들이 알고있던 하느님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예수는 하느님에게서 걸어 나온 사람이다. 제자들에게 하느님에게서 걸어나오기를, 사람들속에서 사람들이 이루는 하느님 나라를 그토록 열심히 가르쳤건만, 예수가 떠나면 제자들은 다시 하느님에게 돌아갈 것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느님, 의인과 의로운 일을 높이 들어 칭찬하시는 하느님, 벌을 주고 축복을 내리는 하느님, 왕같은 하느님에게 돌아갈 것이다. 417쪽.
예수에게 하느님은 아버지 요셉과 같은 분이다. 법으로 얽어매놓고 그 법에 어긋나면 참혹하게 벌주는 분이 아니다.
예수의 마음을 울리며 들려준 그분의 음성은 늘 아버지 요셉의 목소리였고, 그분의 눈길은 아버지의 눈길이었다. 예수가 경험한 그분은 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420쪽.
아버지 요셉처럼 하느님도 아담을 사랑하고 아끼고, 무엇이든 가르쳐 주려 하고, 아들이 잘하는 일이 있으면 어깨를 힘껏 끌어안고 기뻐했으리라. 424쪽.
"그리스도"라 믿었던 예수, "메시아"라 믿었던 예수, 그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기 시작했었다.
그가 하느님의 권능을 받아 이방제국을 물리치고, 타락한 성전을 청소하여 깨끗이 바로 세우고,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이방 사람들이 경배를 드리러 찾아오는 예루살렘, 그리고 거룩한 나라 이스라엘을 회복할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다. 448쪽.
그러나 결국은 예수가 잡혀 끌려가면서 들은 소리는 "흥! 메시아! 꼴좋다!" 이런 조롱이었다.
예수의 눈에는 보였다. 하느님 나라는 이제 더 이상 사람이 허덕허덕 찾아가야 할 그곳에 있지 않고, 땅 위에 내려와 있었다. ~~ 예수는 땅으로 내려온 하늘을 본 첫 사람이었다. 466쪽.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생각한다. 진정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우리들 속에, 사람들 속에, 하느님은 들어와 계신가? 세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 "지금" "여기"에 하느님이 있다는 건가? 하느님은 왜 예수의 눈에만 보이고 우리들 눈에는 안 보이는 거야? 이미 여기에 와 계시다면서.
7권을 마저 읽으면 그동안 품어왔던 수많은, 아니 따지자면 아주 단순한 물음표의 답을 얻을 수 있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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