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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Nov 23. 2022

<소설 예수 5> 하느님이 떠난 성전

소설 예수 5권 하느님이 떠난 성전

저자 ; 윤 석철    출판 ; 나남,  440쪽, 2022/07/25


(책의 인용부분은 따옴표 속 파란색 글씨, 인용 뒤에 있는 숫자는 책의 쪽수이다. 리뷰는 필자의 감상평보다는 책에 수록된 스토리 전체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쓴다.)

마지막 출간됐던 4권을 휘리릭 훑어보고서야 ‘대하 장편’을 실감하며 5권을 펼쳤다. <소설 예수>1,2,3,4권의 내용을 담은 리뷰는 이 글 마지막에 링크해둔다.

4권의 마지막은 예수에게 기름붓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로 맺는다. 예수를 일컫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기름부음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바로 장례의 절차를 뜻하기도 한다. 4권은 “사람이 죽으면 사흘 후에 몸에 향유를 바르고 장사를 치른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기름부음의 이야기는 5권에도 다시 등장한다. “위로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해서 그녀는 선생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그것은 예수를 따라다니며 배운 치유 의식이었다.”150.


5권은 예수가 회상하는 어머니의 출산 장면으로 시작한다. 장례를 상징하는 글에 잇대어 예수의 동생이 태어나는 마리아의 진통을 그렸다. 죽음과 탄생을 연결하다니 아이러니다. 예수의 죽음이 새로운 생명을 불러온다는 의미일까, ‘죽음’도 ‘탄생’도 생명체에 속한 일이니 ‘사람 예수’를 의미하는 것일까, 이 책에 담길 앞으로의 글들은 신神이 아닌 ‘사람’에 관한 글이라는 암시일까……

리뷰를 쓰면서 거듭 등장하는 말이지만 <소설 예수>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팔걷어부치고 개입하여 해결해주는 만사형통 해결사 신, 그의 아들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침이면 따뜻한 국물 한 그릇 마시고 일터에 나가 돌을 쪼고 나무를 깎고 다듬던 한 아버지의 아들 예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점일획도 변할 수 없는 경전에 그려진 예수가 아닌, 기독교 도그마(Dogma 교의) 이전의 예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버지 요셉과 함께 일터를 오가며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사랑’의 참뜻을 깨닫고 그것이 체화되어 제자들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예수의 이야기이다. ‘사랑’은 추상적인 언어이다. 그러나 예수는 ‘사랑’을 구체적인 언어로 바꾸는 일에 힘을 쓴다.


20세기, 21세기 언어로 말하자면 예수는 인권운동가이다. 자신을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제자들에게 예수는 ‘나’를 찾아야한다고 외친다. 명예를 얻어도 공동체의 몫이고, 수치를 당해도 공동체의 수치가 되던 그 시대, ‘나’는 없고 ‘우리’만 있던 그 시대에 예수는 한 개인인 ‘나’를 중요하게 여겼다. ‘우리’에서 해방된 ‘나’의 가슴에 씨를 뿌리고 그 씨앗이 각자의 가슴에서 싹을 틔우고, 그런 ‘나’, ‘나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면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이다. 공동체 속에 함몰된 ‘나’를 버리고, 개인 존재로서의 ‘나’를 찾는 것이 우선 할 일이다.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깨달은 내가 너가 되고 우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16. “자유를 얻고 자기 삶을, 그리고 자유의 책임을 짊어지라는 말입니다. ~~그대들도 언젠가 강제로 갇혔던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오고 진정한 ‘나’를 찾는 날, 하느님 나라에 들어 있음을 알 것이오.”18.

예수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곳에 알렉산더의 심부름꾼이 찾아와 마리아에게 갈릴리로 돌아가라고 한다. 14일이 시작되기 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야한다고. 이미 12일이 시작된 밤이니 이른바 디-데이는 이틀이 채 남지 않았다.


카이사레아(황제의 도시)에서 세금선이 불타는 소동이 발생한다. 총독은 유대의 혼란을 신속하게 진정시켜야 한다. 총독 빌라도는 자신에게 유대 백성을 돌보라고 맡긴 죽은 헤롯왕의 목소리를 듣는다. 헤롯의 백성, 유대 백성이 땅을 잃고 유민流民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명령이다.  예루살렘의 경비는 더욱 삼엄해진다.

세금선 화제로 소실된 공물 문제는 분봉왕(갈릴리, 베뢰아) 헤롯 안티파스와의 협상에서 해결된다. 빌라도가 맡고 있는 유대와 사마리아,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갈릴리와 베뢰아의 화해를 제안한 빌라도의 묘책이다. “화해를 내세워 갈릴리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과일, 그리고 갈릴리 호수에서 무진장 걷어 올리는 생선에 손을 댈 수 있다면 총독의 수입이 대폭 늘어날 수 있는 길이 있으리라.”302.


예수는 부드럽고 고른 숨소리로 제자들을 가르친다. 성전을 뒤엎을 거사를 기획하던 하얀리본은 우두머리 히스기야가 옥에 갇힌 후, 바라바는 끓는 피로 하얀리본을 이끈다.  유월절 거사를 도모하는 하얀리본 결사체, 히스기야의 꿈은 예수가 생각하는 하느님 나라와 비슷했다. 그러나 예수는 평화를 강조하고 히스기야는 힘으로 이루자는 생각이었다. 히스기야 후 하얀리본의 선봉에 선 바라바가 꿈꾸는 하느님 나라는 예수와 전혀 달랐다. “토라를 지킨 의로운 아버지의 아들, 바라바!”79. “완전한 토라의 나라, 새 유대의 건설!”101. 그의 가슴 속엔 ‘토라의 나라’ 밖에는 없다. 예수는 ‘우리’에서 해방되어 ‘나’의 정체성을 찾으라 가르쳤지만 바라바는 ‘우리(바리새파)’속에 머물러 있었다. 예수가 걷는 길은 그의 가장 큰 스승 세례자 요한과도 달랐다. "요한은 하느님의 개입에 따른 세상의 종말과 심판, 그 이후에 하느님이 열어줄 새 세상이 시작된다고 생각했고, 예수는 사람이 사람 손으로 이루는 새 세상을 믿기 때문이다."336.

제자들은 성전이 무너지는 일이 예수가 영광을 받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수가 영광을 받는 날, 자기들이야말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맡아 다스릴 사람이라고 스스로 높이며 우쭐대는 제자까지 있었다.”125. 예수는 자신이 세상에 징검다리를 놓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모래위에 남겨졌던 발자국이 물결에 휩쓸려 모두 사라지는 꿈을 꾼 후, 전날 만났던 바리새파 랍비 요하난의 말을 생각했다. ‘성전 제사를 드리지 않고도, 성전이 무너져도 우리 유대인이 살아갈 수 있는 길!’110. 예수는 그 길에 징검다리를 하나씩 놓아가는 사람이다. “징검다리 돌 하나는 예수가 놓고, 다음 돌은 그들이 놓고…”125.

5권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도 예수는 ‘징검다리’였음을 기록한다. “언젠가 그 길을 따라 걸어올 사람들을 위해 표시를 남겨야했다. 내를 건너려면 어찌어찌 혼자 건널 일이 아니고 징검다리를 놓아야 한다.”433.


독자로서 ‘징검다리’를 생각해본다. <소설 예수>는 작가가 물위에 하나 씩 놓은 징검다리이다. 독자는 놓인 돌을 디디며 물을 건너는 사람이다. 물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그 돌의 전체를 밟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돌은 발 닿는 부분, 디디는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잠긴 부분이 있다. <소설 예수>를 읽으며 징검다리의 물속에 잠겨있는 부분을 생각한다.

독자가 디디고 건너는 부분들은 작가의 창작 스토리이다. 그러나 물에 잠겨있는 부분은 작가가 15년의 시간을 투자하여 굳히고 굳힌 틈새 없는 이론 - 2000년전 시대적 배경, 실존인물 예수, 역사가 증명하는 이론들이 징검다리로 놓인 돌의 밑둥인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 예수>는 픽션일까, 논픽션일까? <소설 예수>는 꾸며낸 이야기일까, 기독교 이론서일까? <소설 예수>! 스토리는 소설이고, 예수는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있나? 하늘 저 높은 곳에?

“여러분들이 날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는 모든 것 속에 그 분의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평범 속에서,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은 그래서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분과 연결되어 있으니까요.”137. 내가 있는 그곳에 이미 하느님은 들어와 계시다는 뜻이다. 찾아가야 하는 먼 곳이 아니라, 바로 나의 삶이 하느님 나라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숨겨진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곳에 펼쳐져 있다고 말한 셈이다.”145.


100마리 양중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와 흔히들 말하는 ‘돌아온 탕자’라는 이야기가 있다. <소설 예수>에서는 요하난 벤 자카이의 제자 바리새파 토라 선생 야이르와의 대화중에 나온다.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집을 나간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거렁뱅이가 되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기뻐하며 잔치를 벌였다는 이야기이다. 열심히 일하며 아버지 곁을 지킨 큰 아들의 심적 갈등을 짐작할 수 있다.  <소설 예수>는 이 두 이야기들을 어떻게 조명했는지 살펴본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10장에는 모세가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던중 뒤쫒는 파라오에게 재앙을 내리는 장면이 있다. 다급해진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에게 ‘내가 너희와 너희의 하느님 야훼에게 죄를 지었으니 그 죄를 용서하고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에 빗대어 야이르는 예수에게 이야기 속 작은 아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친다. “입으로는 죄를 고백했어도 마음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선생님이 들려주신 얘기중에 작은 아들은 마음을 돌이키고 자기 죄를 뉘우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려는 것 같았습니다.”153. 이어서 야이르는 불편한 마음을 품은 큰 아들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예수가 큰 아들을 바리새파로 비유한 것 아니냐고. “옮은 일을 하는 것으로 정의를 삼는 바리새파 사람들…. 큰 아들은 아들이 아니라 마치 종들처럼 아버지에게 순종을 했지요. ~~아버지의 명령에 따르는 사람들.”154.

한 마리 양을 잃고 찾는 목동의 이야기는 이렇게 풀이된다.

“목동 뒤를 따라오는 99마리 양에만 눈을 두면 한 마리 양이 길을 잃고 멀어졌다고 알아 챌 수 없겠지요.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을 세지 말고, 내 곁에 오지 못한 사람을 챙기는 일, 그것이 바로 양을 치는 사람의 의무 아니겠습니까?”160.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고 돌보고 챙기라는 말”161.

예수가 가르치는 하느님 나라는 토라의 나라와 충돌된다. 둘 사이에 너무나도 깊은 강물이 가로막고 있다. 예수는 토라 선생 야이르가 그 강을 건너도록 징검다리를 놓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예수는 강둑에 서있는 야이르의 가슴에 씨앗을 뿌렸다. 때가 되면 발아할 씨앗.

“토라의 샘 밖에는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토라는 세상과 상관이 없습니까? 아니지요! 세상의 일부인 셈이지요. 하느님에게서 눈을 돌려 사람을 바라볼 수 있다면 아직은 희망이 남아있을 겁니다. 유대에”164. 씨앗이 발아하는 것은 “때의 영역”166. 이다.

예수는 성전에서 끌려 나가기 전에 가지고있는 씨(하느님 나라)를 뿌리기로 했다. 예수는 유대 광야에서 들었던 하느님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너 혼자 세상을 바꾸려느냐?”167. 때가 되면 씨앗은 싹을 틔울 것이고, 자라고 열매맺어 다시 씨앗이 되어 널리 퍼져나갈 것이다. 예수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동안 할 수 있는 일이 가르치는 일(씨를 뿌리는 일) 밖에는 없다. ‘생명은 씨에 담겨 있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씨를 뿌리는 일밖에…’173.

예수는 따르는 무리들을 끌고 하느님 나라로 행진하지 않았다. 어디든 그가 있는 자리에서 씨를 뿌리는 일, 가르침에 열심이었다. 씨앗이 뿌려진 그 자리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 진다고 믿었다. 예수는 항상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한 종류 나무라고 모두 한 뿌리로 살아가는 것 아니고, 따로따로 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각자 자기 몫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174, 175. 각자 자기의 몫을 누린다는 것은 희년禧年 선언으로 이어진다.


희년은 “생명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각 생명이 차지해야 할 몫을 그에게 돌려주는 일”이다.176. “희년은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첫걸음입니다.”177. “희년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 이르는 물줄기입니다.”182. 희년을 외치는 예수를 사람들은 혁명가라고 생각했다. 메시아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고통을 견디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뒤엎어 오히려 혼란이 오고 고통이 가중될 수 있는 혁명가 예수라니! 2000년전 예수의 희년 선언은 그로부터 2000년 후인 지금 세상에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경고’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물자는 양이나 크기나 정도에 한계가 있고 때가 되면 줄어들고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 농사지을 수 있는 만큼의 땅이 그의 몫입니다.”180, 181.


감옥에 갇혀있는 히스기야는 이투레아 동굴 속에서 수련하던 기억을 더듬는다. 나사렛을 향한 그리움도 피어올라 십자가에 매달린 아버지, 뽕나무에 몸을 건 어머니, 어릴 적 단짝 예수, 마음속에 품고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만난다. 이투레아 산을 바라보다가 현인과 율법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현인은 신神이 내려준 법 - 태양신 샤마시신이 함무라비에게 내려준 법, 야훼가 모세에게 내려준 법을 이야기한다. "내가 하려는 말은 신이란 높은 곳에 앉아 경배만 받는 분이 아니라 그를 경배하는 사람들이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도록 돌봐야 할 분이라는 말이다."187. "사람이 한평생 걸어 찾아가는 것보다 신이 한 발짝 찾아오면 얼마나 쉽겠니?"191. 히스기야는 이투레아의 현인을 만난 후 세상을 보는 눈이 크게 뜨였다. "토라의 울타리에 갇혀 사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울타리 밖을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이 됐다."195.

유월절 거사에 골똘한 바라바의 인식은 히스기야나 예수와 달랐다. "우리 동족이 지금까지 겪은 고통은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 살았던 죄에 대한 벌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혹독한 회초리를 치면서 올바른 길로 돌아오라고 가르치시는 겁니다."197. 바라바는 오직 토라를 지키기 위한 순교를 감당할 것이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생각은 달랐다. "나는 성전 창고를 활짝 열어젖히고 싶어서 거사를 해야겠소! 창고 곡식을 모두 풀어 나눠 주고, 차곡차곡 쌓여 있다는 빚 문서도 모두 찾아내 하나도 남기지 않고 활활 불사르겠소."199. 바라바와 히스기야는 서로 다른 목적으로 유월절 거사를 모의했다. 히스기야는 예수가 이루려는 하느님 나라는 결코 폭력으로 이룰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감옥으로 찾아온 유다에게 절대로 예수를 끌어들이지 말라고 일렀다. "그가 이루려는 하느님 나라는 하얀리본이 하려는 일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일이오."204. 깜깜한 감옥 속에서 히스기야는 바라바와 유다가 일으킬 거사를 막는것이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알렉산더의 밀정 므나헴은 예수를 예언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스라엘 역사에 수없이 많이 나타났던 이전의 예언자들과는 달랐다. 그동안 예언자들은 죄에서 돌이켜 야훼에게 돌아오라고 외첬다. 예수는 모든 억압과 압제를 거부하라고 가르친다. "예수는 정치권력과 경제적 수탈로부터 해방을 목표로 삼았다."214. "하느님 나라는 나의 생각과 가장 크게 다른 사람도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입니다."217.

예수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다. "평화를 지키려는 사람은 지금 이루어졌다고 믿는 평화를 지키는 일, 현재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 평화를 이루려는 사람은 억압하는 세상,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에게서 탈취해 빼앗아가는 세상, 이런 세상은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220,221. 알렉산더는 평화를 지키려는 사람이다. "유대를 휘젓고 세상을 격동하는 것을 막아 평화를 지킨 사람, 알렉산더는 자기가 바로 그 사람으로 오래오래 기억되리라고 믿었다."298.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몸은 알렉산더의 그늘밑에 있던 므나헴은 예수의 말을 듣고 자신은 현상을 지키려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므나헴은 두려웠다. 그동안 알렉산더에게 예수 일행의 행적을 고해바친 자신은 예수를 거꾸러뜨리는 일에도 증인이 되어야 하고, 예수의 사상을 세상에 남기는 일에도 증인이 되어야했다. 므나헴을 통하여 예수를 낱낱이 살피고 있던 알렉산더는 예수를 제거할 마음을 굳힌다. 물줄기를 틀겠다는 생각이다. "예수가 지배체제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산맥이어서 지금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는 계기라서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233.


예루살렘 성전 대제사장 가야바는 자유로운 예수가 부럽다. 야훼가 정해줬다는 예복을 입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방법대로 야훼 앞에 서야하는 자신이 발가벗고 그분앞에 서고싶다. 유월절 제사가 다가오도록 아직 로마에서 예복도 받지 못한 가야바는 오직 로마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다. "로마황제의 통치를 받고 사는 우리 유대,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252. 가야바는 유대 백성을 하늘로 끌고 올라가야 하는 대제사장이고, 예수는 땅의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이끌기 편하도록 율법으로 옭아매어 끌고 가고, "예수는 정해진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아니라 물으며 걸으라고 깨우쳐 주는 사람이다."261.

예수는 자신이 걷는 길의 끝을 안다. 예수는 자신이 떠난 후에 남은 제자들이 어찌될지 걱정하던 중에 큰 깨달음을 얻는다. "이제 모두 사람에게 맡기신 모양이구나. 사람이 알아서 살라고..."269. 이미 이유기를 지나 장성한 사람들은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삶을 사람들에게 맡기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소설 예수>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이 어디 계신가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이 피력된다.

"사람이 처음으로 하느님의 품을 떠나 사람으로 서는 일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품안으로 걸어들어가는 일이 아니고 그분의 품에서 걸어 나오는 일이다.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겪는 일이다."270.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지 않다, 이 땅에, 사람들 속으로 내려오셨다고 작가는 역설한다. 나는 이 부분이 <소설 예수>의 핵심 메세지라고 생각한다.

"갈릴리, 유대, 이스라엘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경계를 넘으라는 의미구나.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 되고, 그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스며든다는 뜻이구나!"270. 예수가 이루려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출발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278.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하느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421.


예수는 아버지 요셉의 임종을 생각했다. 아버지의 유언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얘야! 내 아들아! 네가 어떤 길을 걷든 그 길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믿고 걸을 수 있겠느냐"272. 예수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예수에게 종종 들려오는 소리는 때로는 아버지 요셉의 목소리였고, 때로는 하느님의 소리였다. "하느님은 존재가 아니고 관계다."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는 탯줄이다. 하느님과 연결되는 끈이 관계라면 그것은 끊을 때가 되면 끊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두 발을 땅에 디딜 수 있다."277. 예수는 그렇게 하느님에게서 걸어나온 첫 사람이 되었다. 하느님도 사람과 함께 걷는 길은 처음이다. "생명을 지으신 분의 품에서 걸어 나와 처음 세상 걸음을 걷는 일이다. 그 분 손에 매달리지 않고."281.


유월절 거사를 일으킬 사람이나 거사를 막을 사람에게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고 있다. 분봉왕 안티파스, 그의 최측근 신하 알렉산더,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잡아 처형할 궁리를 한다. "알렉산더는 치밀했다. 이스라엘의 법과 전통을 들어 예수를 천하에 몸쓸 사람으로 정죄하고, 성전 재판을 통해 야훼 하느님께 죄를 지은 사람으로 선언한 다음, 로마의 법을 어긴 사람으로 총독에 의해 처형하면 ~~ 민심과 토라와 로마의 법으로 처형한 사람을 그 누가 감히 다시 입에 올릴 수 있을 것인가?"296.

니산월 12일 낮,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 처형으로 다스릴 것을 다짐한다. 히스기야도 같은 방법으로 처형할 것이다. 도대체 예수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성전 정보조직 책임자 제사장 야손의 말을 빌려보자.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소. 제물을 팔지 못하게 하면서 성전 제사를 방해했소. 그대는 성전이 신성불가침이라는 것을 모르오?"333. 신성불가침은 성전이 펼치는 치명적 공격이다.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토라를 지키는 일은 유대인들이 야훼를 섬기는 대표적인 일이다. 제사에는 기념의식의 과거를 위한 제사가 있고, 미래로 향하는 제사가 있다. 토라를 지키는 일은 (과거로부터 이어져왔지만) 삶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재의 일이다. 어떠한 제사에서도 사람들은 희망의 미래로 나아가지 못했고, 토라는 오히려 삶의 올가미가 되었다.


니산월 12일 해가 완전히 져서 어두운 시간, 베다니 마을 마르다네 여인숙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성전 뜰에서 남들의 눈길을 의식하여 예수곁에 다가오지 못했던 예루살렘 아랫구역 사람들이 예수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빵과 포도주도 넉넉히 준비되어 있다. 형편이 어려워 저녁을 굶는 베다니 마을 사람들도 초대되었다. 배고픈 어린 아이들은 음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수는 어떠한 의식보다 배고픈 사람에게 먼저 먹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느님의 신비와 농부들의 땀방울과 빵을 만든 손길이 하나로 합쳐져서 이 귀한 빵이 되었습니다." "이 한 조각에서 모든 사람이 조금씩 찢어 손에 들고 있다가 모두 받은 다음에 입에 넣으십시오."387.

그 저녁은 예수와 함께 하는 마지막 식사였고, 오늘날의 성찬의식이 되었다.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그 자리에서 토라의 경계가 무너졌다. "유대사람 갈릴리 사람, 베다니 사람 예루살렘 사람, 건강한 사람 아픈 사람, 구분하지 않고 빵을 넘겨주고 넘겨받고, 포도주를 마시도록 대접을 들고 기울여 주니 토라에서 그렇게 애써 구분하고 지키려고 했던 거룩의 경계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389.

"토라에서 애써 구분했던 더러움과 깨끗함의 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고 넘어온 사람들인 것을. 그것은 그들 마음 밭에 씨가 뿌려졌다는 의미였다."401.


대산헤드린의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여서 (도적떼) 하얀 리본과 예수의 처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대산헤드린은 무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수의 처형에는 대산헤드린의 인정이 필요하다. "대제사장의 선출과 성전 지도부 구성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왕이 임명하든 총독이 임명하든 대제사장을 임명할 때는 반드시 대산헤드린의 추인이 필요합니다. ~~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그런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411. "성전이 그를 체포하여 대산헤드린에 고발하고, 대산헤드린 재판 후에 총독에게 다시 고발하겠다는 계획입니다."415.


니고데모는 예수를 처음 만났던 날 예수에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의 의미를 물었었다. 니고데모는 마지막 식사를 하는 저녁 "다시"의 의미를 깨달았다. "태어난다는 것은 탯줄로 이어졌던 어머니에게서 분리돼 세상에 나온다는 의미다. 생명은 어미 몸에 붙어사는 기생에 머물러 있을 수 없고, 분리되어 떠나야 자기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419. "예수의 분리는 위로부터 분리됨이라는 것을 느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에게 일어날 일은 위로부터 분리되어 태어난 후, 사람이 살아가야 할 그곳으로 떠나는 일이라 생각됐다.420.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 가야바의 아들 마티아스는 예수를 갈릴리로 돌아가라고 회유한다. 예수가 회유당할 사람인가. "예루살렘 성전, 그들이야말로 사람들이 내지르는 고통의 소리, 한숨이 하늘 아버지에게 이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사람들이다. 제사만 열심히 드리면 모든 것이 원만하게 유지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불 같은 분노를 금방 쏟아부으려는 하느님을 겨우겨우 말렸다고 어깨를 으쓱거리는 사람들이다."427.

13일은 <소설 예수> 6권에 기록된다.


<소설 예수>5권을 읽은 후 아직 남은 책이 2권이다. 이야기에 집중하는데 스포일러spoiler를 만나면 재미가 뚝 떨어진다. 그러나 예수의 이야기는 이미 결과가 알려진 것 아닌가. 스포도 이런 스포가 없다. 결론을 안 채로 읽어가는 책이라니... 스토리의 재미에서 반전을 빼놓을 수 없는데, 세상에 뻔히 알려진 예수의 이야기에 작가는 어떤 반전 스토리를 지어내기가 참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독자로서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었고, 책장은 훌훌 쉽게 넘겨졌다. 책을 읽어오는 동안 신비로움을 느꼈다. 이것은 20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야! 이러한 느낌이 현실 소설을 읽는 재미가 되어 책장을 덮을 때까지 긴장감이 늦춰지지 않았다. 스포도 문제가 되지 않고, 반전이 없어도 재미있다. <소설 예수>는 작가의 첫 문학작품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감정을 간지럽히는 서정적인 문장, 꾸며낸 이야기와 실제 역사가 탄탄히 짜여진 벨트위에 독자를 올려놓고 성큼성큼 걷게하는 이야기 구성의 노련함이 있다. 이야기의 컨베이어벨트는 독자를 2000년 전으로, 현재로 자유자제로 끌고 다닌다. 책장을 덮으며 내가 2000년 전으로 돌아가 예수를 직접 본 듯한 여운이 있다. 그러나 나는 현재의 시간안에 서있다. 책속에 기록된 이러저러한 몇명의 이름이 그 이름을 바꾼 현대의 실제인물로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독서란 무엇일까? 작가의 창작 의도를 캐고, 행간에 숨겨진 글자까지 돋보기를 들이대어 찾아내는 행위일 것이다. 그런데 그 어려움이 나의 일상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면 독서는 의미없는 일이 아닐까. 눈만 혹사하는 일일 것이다. <소설 예수>는 참 잘 썼네, 별것도 아니네, 이런 단순한 평과는 거리가 있는 책이다. 예수가 뿌린 씨앗이 내 안에도 심겨져있고, 그것이 발아되고 자라는 구체적인 과정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닫도록 작가의 강력한 요구가 따라붙는, 독자가 <소설 예수>를 집어들기엔 무겁고 버거운 책이다. 그러나 마치 서정시처럼 아름다운 문장은 끈을 놓치않고 따라붙으며 무거운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어쩜 그리도 참 아름다운 문장을 지어냈는지! 종교서적, 기독교 책이라는 선입견을 내려놓으면 점점 짧아지는 현대소설의 경향을 벗어난 대하소설의 맛을 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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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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