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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ug 09. 2021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 태지원

책 리뷰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태지원 지음. 가나출판사. 2021. 320쪽


저자 태지원은 카카오 브런치북에서 ‘유랑선생’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8회 브런치북 대상에 당선되어 이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지친 마음에 힘이 되어주는 그림 이야기” 책이다. 작가 자신에게 위로가 됐던 그림들을 소개한다. 작가의 그림 읽기를 나를 사랑하기 힘든 밤, 상처가 아물지 않는 밤, 관계의 답을 몰라 헤매던 밤, 위로다운 위로가 필요한 밤, 내가 누구인지 혼란스러운 밤, 이렇게 5장으로 엮었다.  


수 십년이 지난 아주 오래전, 현진건 작가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가 있었다. 지금도 역시 ‘사회’는 우리에게 술을 권한다. 술을 마셔야만 잊을 수 있는 아픔은 상존한다. 아픔은 치료를 요구한다. 치료를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사회, 저자, 독자)가 겪고있는 아픔은 단순한 ‘치료’로 다 나을 수 없는 좀더 근원적인 아픔과 상처이다. ‘치유’가 필요하다. 현진건의 소설 제목을 차용해본다. <치유를 권하는 사회>. 치유가 필요한 사회에서 사회는 치유를 해주지 못하고 있다. 치유해야된다고 권하기만 한다. 치유는 개인 각자의 몫이 되었다.

타인이 할퀸 상처, 공동체가 안겨준 상처, 내 스스로 긁은 상처, 그 치유의 방법으로 저자는 그림을 택했다.

35편의 글들은 처음에 작가의 상황 - 현재 상황에서 회상하는 지난 날의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뒤를 이어 작가가 위로받은 명화를 미술사적 이론을 곁들인 작가의 감상을 기록한다. 그림 감상 후로는 작가가 그 그림을 보고 얻은 지혜(마치 문제의 해답같은)를 발표하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한 편 한 편씩 읽어가는 중에 ‘이건 내 마음을 훔쳐보고 쓴 글인가?’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공감가는 글들이 등장한다. 어떤 독자에게는 그런 부분들이 많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조금일 수도 있다. 나는 많은 글들에 공감했다.


모든 치유의 근본은 원인 알기로 시작된다. 지나온 시간들을 더듬어 보는 일이 원인을 캐는 중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삶의 궤적을 짯짯이 살피며 자신의 실체를 알아간다. 그리곤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그림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그림 밖으로 나왔을 때 작가는 무장해제한 가벼움을 느끼고 평화를 만끽한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역할이다. 글이 주는 힘, 그림이 주는 힘, 음악이 주는 힘, 춤이 주는 힘이다. 작가는 치유 방법을 참 잘 택했다.


초반부 “‘자학’보다 ‘자뻑’이 필요한 순간”에는 ‘나르키소스’가 등장한다. 겸손을 미덕으로 삼고 살아온 작가에게 나르시시즘은 멀리 해야할 교만이었다. 작가가 곁에 있다면, 겸손의 미덕도 있지만, 지나친 겸손은 오만이라는 말을 해주고싶다.

작가는 살아가는 기술을 이야기한다.

특히 사회생활을 할 때 적당한 겸손은 필수 덕목이다.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자연스럽고 은근하게 자기 장점을 드러내는 건 사회생활의 중요한 기술이다. 37쪽

작가에겐 이런 삶의 “기술”은 없는 듯하다. 진정한 겸손, 가끔은 삶을 불편하게 하는 겸손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림감상이 끝난 후 작가는 다행히 “자기 잘난 멋에 산다”는 말도  욕이 아닌 듯싶다. 자뻑의 시간을 가져야 살맛이 나는 법이니까.(39쪽)로 글을 맺는다. 스스로를 잘 치유해가고 있는 모습이다.


“불혹이 코앞이지만 나는 매일 혹한다.”에서 작가는 울퉁불퉁하고 뾰족한 ‘나’라는 장르(47쪽)로 자신을 표현한다. 매일 혹하는 사람, 자신의 장르를 명명한 사람, 이 어찌 매혹적이지 아니한가! 독자로서 평범함의 비범함을 깨닳았다.


“그때, 나 왜 그렇게 바보 같았을까” 에서 작가는 과거의 상황을 후회하는 일이 반복돼왔던 괴로움을 고백한다.

작가는 어느 날 TV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옛날 자기 모습을 회상하며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한 연예인의 말에 그의 남편이 “그때는 또 그럴 이유가 있었던 거야.”라고 응대한 장면이었다. 작가는 드디어 과거를 후회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예전의 나를 미워하는데 오랜 시간 마음을 쓰고 있다면 이제 과거의 나를 그만 구박하고 마음에서 놓아주어야 한다. —-그때 당신에게는 그럴 이유가 있었다고. 67쪽

뒤에 나오는 글 “과거의 기억이 나를 아프게 할 때”

에서 이미 과거로부터 벗어나 미래로 달려가는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라는 접속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바꾸면 된다는 것을 깨닳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상처받았다. 그래서 나는 행복해질 수 없다.” —- “과거의 나는 상처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야기를 바꿀 힘이 있다.” 85쪽


“SNS 속 타인의 그럴듯한 삶이 부러워질 때”에서 작가는 경쟁 레이스에서 앞서려고 힘겹게 달리던 자신을 돌아봤다. 트랙위를 전력질주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숨가쁜 삶의 모습을 본다. 나도 그랬었고,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행복은 상대적인 비교값이 아니라 절대적인 내 감정이라는 명언은 언제나 뒷전에 숨어있다. 상대적인 행복감은 불안하다. 상대적이란 원래 층위가 있고, 층위는 비교할 기준이 되니까.

작가는 앙리 마티스의 <삶의 기쁨>에서 삶의 원초적 기쁨을 발견하고 경쟁 레이스를 멈춘다. 경쟁을 멈췄을 때 드디어 절대적 행복을 알게 된다. 책의 후반부에 있는 “불행 배틀은 위로가 아닙니다”도 같은 맥락이다.

행복이 상대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불행도 상대적이지 않다. 각자가 감당해야할 자신의 절대적인 불행이 있는 것이다. 중량의 무게를 비교했을 때 내 것이 더 가볍다고 내 불행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너의 어려움은 객관적으로 작고 사소한 것인데, 내 것에 비하면 좁쌀만한데 투정하지 말라.”는 말은 공감이나 위로, 조언 그 무엇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218쪽. 작가는 어설픈 위로의 방법을 지적한다.


스스로 설정한 이상형의 인간이 되고자 자신을 통제하고 힘겨운 노력을 하던 작가는 각 상황들을 면밀히 살피며 해결하는 지혜를 가졌다. 본인의 아픔을 치유했을 뿐더러 독자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민다. 타인의 눈치보지 말고 자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편하게 살라고 조언한다. 마침내 등불을 찾아든 작가의 선한 영향력이 많은 사람들이 겪는 어둠을 밝혀준다.

우울이 당신을 사로잡을 때는 그것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 93쪽

다른 사람의 말에 크게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 나를 중심에 세우면 타인의 말에 크게 속이 상하지 않게 된다. 125쪽

나를 부정적으로 단정짓는 사람들의 말에 지나치게 흔들릴 필요가 없다. —- “나를 다 알고있다고 생각하나요? 삑! 그건 당신의 착각입니다.” 151쪽  

‘인간관계의 손절’이 간단하고 쉬운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존감을 지속적으로 잡아먹는 사람과의 관계는 물리적•심리적으로 끊어내는 게 좋다. 192쪽   

운명이 어퍼컷을 날린다고 느껴지는 시기가 당신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 —- 주인공이 상황을 이겨내고 극복하여 해피엔딩에 이른다는 스토리는 위인전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211쪽   


“내 안의 어린 아이를 허하라.”에서는 피터 브뤼헐의 <아이들의 놀이>를 올려놓았다. 친절하게도 놀이 부분을 확대해놓기도 했다. 배경이 외국인데 놀이는 우리것과 유사하다. 그림을 보기만해도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맴돈다. 어린이는 사람들 마음의 빗장을 여는 열쇠다.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의 원초적 본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작가는 놀이에 열중한 어린이들처럼 어른들도 자신이 즐길 수 있는 놀이를 하라고 권한다. 참 좋은 방법이다.

하고싶지만 유치하다는 이유로,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일에 시간 낭비하기 싫다는 이유로 한사코 피하고 있는 일이 있는가. —- 당신 안의 어린 아이를 이따금 허하자. 유치해지는 만큼 건강해질 것이다. 251쪽

키덜트가 되라는 조언은 “직장 사춘기가 왔습니다.”에서 “딴짓”으로 이어진다. 어린이들이 놀이에 열중하는 것처럼 어른들도 자신의 취미활동을 하라는 조언이다.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기가 오면 딴짓을 시도해보라는 것이다. 작가는 ‘글쓰기’를 답답한 일상의 돌파구로 삼았다. 글쓰기, 작가에게 이것은 딴짓이 아니라 효과만점의 치료제인 것 같다. 이렇게 훌륭한 책 한권을 엮어냈으니 말이다.


책을 읽기 시작한 처음엔 작가가 상처입은 사람으로 보였다. 읽어가면서 상처를 드러내놓고 치료와 치유에 정성을 쏟는 작가를 발견했다. 후반부로 가면서 상처의 겉을 치료하는 방법, 속깊은 아픔을 치유하는 방법을 독자에게 알려주는 조언자로 변화된 작가를 만났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어디 깊이 숨겨둔 곳에서 찾아낸 등불을 앞세워 들고 미래로 미래로 걸어가는 작가의 당찬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소개된 명화들의 설명은 부족함이 없다. 그것만 따로 떼어서 엮어도 한 권의 미술 교양서가 될 만큼 내용이 충실하다. 다만 그림 게재에 편집의 아쉬움이 약간 남는다. 글의 문제가 아니다. 편집의 문제다.

가로가 긴 형식의 그림을 세로형 책에 담는 건 당연히 불편하다. 특히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39쪽)이 그렇다. 실내의 노란 벽과 거리의 어둠을 대비시켜 도시의 고독을 표현한 그림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빛의 부분 노란 벽 일부가 잘려나가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가 감소된다. 아쉽다.

마리 콜랭의 <오셀로와 데스데모나>(105쪽)에서도 주변의 어둠이 잘려나가 두 인물이 너무 확대 돌출돼 보인다. 이것은 작가의 글 내용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경우다.

그러나 작가의 설명글에 언급된 부분을 자른 것은 편집자의 부주의이다.

왼쪽의 아기 천사 뒤에는 돌로 된 기둥이 하나 자리 잡고 있다. 기둥의 꼭대기에는 두 개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한쪽은 젊은이의 모습이, 다른 한쪽에는 노인의 얼굴이 드러나 있다. 젊음과 늙음, 인간이 늙어가면서 시간이 흘러감을 의미한다. 315쪽

안타깝게도 젊은이의 얼굴이 잘려나갔다.




그림에 대하여.

요즘은 누구나 다 사진을 찍는다. 전문, 비전문의 구분이 없다. 풍경이 멋지면 바로 그 앞에 선다. 촬영하는 사람은 풍경과 사람을 줌인 기능으로 당겼다 밀었다 조정해가며 배경과 인물이 가장 잘 배치됐을 때 셔터를 누른다.

화가도 마찬가지다. 그림을 구성할 때 주제(인물, 사물, 오브제)를 돋보이게할 배경의 범위를 정한다. 하찮아보이는 가장자리 끝도 그림의 범위로 계산된 것이다.

예를 들자면 명함판 크기의 사진에서 증명사진 크기로 자른 것의 얼굴은 붕 떠서 돌출돼 보인다. 애초 증명사진으로 인화한 사진의 얼굴은 목과 어깨가 포함된 균형잡힌 모습이다. 배경의 중요함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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