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하느님의 본성을 따라 지음받았다.
<소설 예수> 3권 새로운 약속
저자 ; 윤석철 출판 ; 나남, 456쪽, 2020/12/05.
1,2 권 출간에 이어 3,4 권이 나왔다. 3권의 리뷰는 문자 그대로 "리뷰review", 책 내용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려고 한다. 옮기고싶은 구절들이 많음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본성을 따라 지음받았다.
책 내용에는 카인과 아벨, 성전 정화, 희년, 요셉, 주인에게 달란트를 위임받은 종들, 과부의 헌금, 광야 이야기가 들어있다.
니산월 10일 아침 예수와 무리를 이룬 사람들이 성전 뜰에 모였다. 예수를 성전과 로마군의 압제에서 구해줄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움막마을 사람들과 예루살렘 아랫구역 사람들이다.
하얀리본 결사대는 성전을 더럽힌 대제사장과 지도부를 처단하려고 거사 계획을 세우고, 예수는 제자들에게조차도 계획을 말하지 않고 성전에 들어선다.
도성 예루살렘 이곳저곳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세상을 뒤엎겠다는 사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 현재 누리고 사는 것을 지키겠다는 사람, 자기가 가진 것을 몇 배로 키우겠다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하면, 다음 아침 끼니거리 때문에 어린 자식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누워 한숨쉬는 사람도 있다. 60쪽
무리들과 길을 가던 예수는 무화과 나무를 들여다본다. 그리곤 무화과 나무가 성전과 같다고 말한다.
“열매도 그렇고 나무도 그렇고.... 배고픈 사람은 한시도 더 기다릴 수 없는데...” 87쪽
성전이야말로 배고픈 사람 사정 모르고 덜 익은 채 매달린 무화과 열매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135쪽
하느님에 대한 예수의 설명은 항상 지금 여기 우리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과 하느님 말씀은 따로따로 떨어진 일이 아닙니다. ~ 하느님은 따로 어디 멀리 높은 곳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여러분 속에 계십니다.” 92쪽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동안 우리가 생각하던 하느님은 어떤 분이셨나? 소설은 예수의 입을 통해 하느님은 이런 분이라고 차근차근 설명한다.
“사람 사는 일이란 한가운데에 커다란 선을 하나 죽 그어놓고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쫙 갈라 나눌 수는 없습니다. ~~~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골고루 빛을 비춰주시는 하늘 아버지” 139쪽
“무서운 심판자, 벌을 주고 호령하고 꾸짖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 여러분이 집 앞에 이르기도 전에 내다보고 또 내다보다가 맨발로 쫓아 나오시는 분입니다.” 150쪽
“하느님의 형상은 생김새가 아니고 하느님의 본성, 사랑입니다. ~~ 하느님의 본성을 따라 지음받았으니 여러분이나 나나 바로 우리 안에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153쪽
한 사건에 대하여 여럿이 듣고 보고 겪은 사람이 있는 내용은 쉽게 파악할 수 있으나, 왜 그랬는지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예수는 "왜 그랬냐" 이유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를 묻는 것은 근원을 묻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 그러는지 궁금하면 성전에도 묻고, 제사장에게도 묻고, 로마군에게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왜 그런지 질문하는 것을 가로막는 일이 억압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묻지도 말고, 의심도 하지 말고 오직 정해진 대로 따르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 억압자입니다.” 158쪽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었다. 자신들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줄 메시아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마침내 그 메시아로 예수가 온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가 누구든지 우리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삶을 좀 어루만져주고 위로해 주었으면 좋겠어.” “그래! 맨날 우리더러 뭐 잘못했다, 뭐 고쳐라, 무슨 죄를 지었으니 회개하라,,,, 그런 말은 좀 그만 하고, 좋은 세상 온다고 희망을 주었으면...” 269쪽
시대를 보면 예언으로 전해져 내려온 종말의 날에 가깝고, 예수는 예언을 실현하는 사람 바로 메시아로 보인다. 아무리 여러번 메시아가 아니라고 예수 스스로 거듭거듭 부인했지만 ~~ 메시아를 요구하는 시대에 예수가 서있기 때문이다. 353쪽
“나는 여러분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들으십시오! 하느님은 메시아 한 사람을 내세워 세상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모두 함께 손잡고 이뤄야하는 나라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160쪽
유월절 명절에 성전에서는 빵을 나눠주면서 아랫구역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를 따라 성전에 따라 들어갔고, 빵을 주는 성전과 말씀을 주는 예수 사이에서 그들은 갈등한다.
예수가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끌어안으려던 사람들, 움막마을 사람들이 제일 먼저 등을 돌렸다. 새 세상이 오기를 가장 절실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당장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고, 졸리면 드러누워 눈 붙이고 잠을 자야 한다. 207쪽
유대인들은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한 분 야훼 하느님을 섬긴다. 둘째, 그 하느님이 내려준 토라를 지킨다. 셋째, 하느님을 섬기되 오로지 예루살렘 성전에 나와서 제사드리며 섬긴다.~
~~ 그런데 사실상 황제 폐하를 섬기고, 로마의 법을 따르고... 225쪽
성전은 그냥 제사만 드리는 신전이 아니고 로마가 유대를 통치하는 공식 기구이기 때문이다. 정치와 종교가 하나로 통합된 기구였다. 241쪽
사람들은 유대 땅 예루살렘 성전산 위에 세워진 성전은 움직일 수 없는 성소로 섬겼다. ~하느님과 세상이 연결된 배꼽으로 믿었다. 249쪽
<희년>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가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의 가장 큰 부분이다.
“희년은 사람이 넘어졌을 때 손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는 일입니다. 희년은 굴러 떨어진 바위에 깔려 숨이 넘어가게 생겼을 때 바위를 밀어 치워주는 일입니다. 희년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밧줄을 던져주는 일입니다. 그것이 희년을 시행하는 일입니다. ~~ 결국, 세상에 세워진 어떤 가치나 제도보다 생명이 우선이라는 선언입니다.” 293쪽
예수의 가르침 중에 거듭거듭 강조하는 부분은 하느님은 모두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예지몽을 꾼 요셉의 예를 들면서 모두의 하느님임을 이야기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섬긴 하느님은, 히브리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경전을 떠나, 토라를 떠나, 성전을 떠나 이제부터 그는 오로지 하느님을 향해 걸어간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어떤 생명이든 생명을 위협하는 일은 하느님께 대적하는 일입니다. ~~ 사람을 종으로 삼는 일에 하느님은 언제나 반대하십니다.” 321-325쪽
포도원 주인이 종에게 돈을 맡기고 멀리 출타하였다가 돌아와서 그 돈을 어떻게 운용했는지 묻고 돈을 불리지 못한 종을 게으른 종이라고 꾸짖으며 내쫓는 이야기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이 이야기를 예로들어 하느님의 뜻을 설파한다.
첫번째 종은 추수 때 그 돈으로 밀을 사두었다가 식량이 떨어질 때쯤 곱절의 값으로 팔아서 원금이 2배가 되었다. 두번째 종은 빚놀이로 역시 원금의 2배를 만들었다. 그러나 세번째 종은 돈을 땅에 파묻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가져왔다.
만약 자기가 그런 경우라면 어찌할 것인가? 첫번째, 두번째 종처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돈을 늘려 주인에게 칭찬받을 것인가? ~~ 세번째 종처럼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못해서, 배고픈 사람 차마 등쳐 먹지 못해서 받은 돈 그대로 돌려주고 쫒겨날 것인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세 번째 종의 마음으로 새 세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을 변화시켜 가난한 사람에게 채워 주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입니다.” 332 - 336쪽
우월절 명절에 성전으로 몰려드는 인파, 그들은 왜 성전에 나왔나?
그들이 믿고 섬기는 하느님은 축복도 내리지만 저주도 내리고 벌도 내리는 하느님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유월절에 성전에 올라 제사드리지 않으면 당장 닥칠 저주의 벌이 무서워 나왔고,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생활형편이 나아지기를 기원하기 위해 나왔다. 341 - 342쪽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어떻게 섬겨야 하나?
"하느님을 섬긴다는 일은 세상 모두에게, 모든 생명에게 좋은 일이어야 합니다. 나 혼자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니고, 세상 모든 생명이 각 생명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누리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375쪽
예수는 성전의 무너짐을 예언한다.
“성문은 구분과 차별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고 동시에 끝나는 지점이 됩니다.”
“그런데요, 선생님! 어제까지는 성전이 경비대가 그 성문을 지켰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로마군으로 바뀌었습니다.”
“맞아요! 사람들 살아가는 일을 통제하는 권력이 성문을 지킵니다. 거룩과 권력이 한 몸이 된 셈입니다.” 386쪽
광야는 어디인가? 광야란 무엇인가?
작가는 예수의 광야 시험에 대하여 '수련'과 '수행'을 구분한다. 시험자들은 수련이라 말하고 예수는 수행이라 말한다. 수련은 한시적으로 단련하는 것이고, 수행은 일생을 통하여 삶으로 행하는 것을 뜻한다.
"사람이 어찌 한 번 고통을 겪었다고 세상 모든 고통을 다 겪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광야는 매일 들어가고 매일 머물고 매일 다시 걸어 나오는 곳입니다." 410쪽
예수는 시험을 다 이겼다. 시험을 이기고 통과했다기 보다는 스스로 시험에 대하여 깨달았다. 하느님의 참뜻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으로 광야에서 사람들 속으로 걸어들어왔다.
태초부터 있었던 하느님을 광야에서 만나려고 굶주리며 찾았다. 예수가 태어날 때부터 말 걸고 지켜보던 그 분, 새삼 그 말씀을 듣겠다고 쉰 날이 넘고 예순 날이 넘도록 광야에서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은 사람이 먹어야 살 수 있도록 만드셨다. 하느님을 섬기고 따른다고 먹지 않고도 배부르지는 않다.
~~한 사람이 모두 먹어치우면 하느님도 배고프시다.
~~하느님은 세상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엎을 만한 큰 일에만 관계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 살아가는 매일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분이었다. ~~사람들과 함께, 처음부터 함께 계셨던 분이었다. 432 - 437쪽
메시아든 왕이든 그건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하느님은 제일 힘센 사람을 뽑아 씨름판에 내세우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 나서서 세상을 구하고, 혼자 나서서 이스라엘을 압제에서 해방하고, 혼자 나서서 세상을 바꾸는 일은 하느님의 방식이 아니다. 439쪽
책의 내용중에 발췌해서 알려주고 싶은 구절이 아주 많다. 그 욕심대로 리뷰를 쓰자면 책을 거의 반쯤은 옮길 지경이다. 주마간산격으로 인용문을 나열했다. 앞으로 예수는 어떤 길로 발걸음을 내디딜까? 작가는 예수의 입을 통하여 무슨 이야기를 이어갈 것인가? 자못 다음 호가 기다려진다.
읽다가 멈춰서 긴 시간동안 나 자신을 성찰한 부분이 있다. 내 삶 속에 기둥으로 삼아도 좋을만한 구절이다. 이투레아 산 속에서 히스기야에게 준 현인의 가르침이다.
“창끝에 저항하면 그곳에 단단함이 생기고, 결국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러나, 한없는 부드러움이라면, 마치 창끝으로 물을 찌르듯 허공을 찌르듯, 작은 자국 하나도 생기지 않는다.” 162쪽.
내 가슴엔 얼마나 굳은 살이 많이 박혀있는가, 수 십년 전에 찔린 굳은 살이 아직도 무르지 않고 단단히 박혀있다. 이제 그 굳은 살을 녹여햐할텐데...
<소설 예수> 3권 “새로운 약속” 전체 줄거리
가야바의 집에서는 성전 지도부가 모여 그날 저녁 무렵 예수가 성전 뜰에 들어왔던 일을 가지고 의견이 분분했다.
니산월 10일 아침,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간 예수는 제물을 파는 장사꾼과 환전상들을 내쫓는다. 제자들중 아무도 예수의 행동에 합류하지 않고, 예수를 따라 들어왔던 사람들이 예수를 떠나 사라진다.
예수의 과감한 행동에 놀란 <하얀리본> 부두목 바라바는 예수를 거사에 끌어들이도록 유다에게 지시한다. 유다는 히스기야를 구출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전은 알렉산더의 제안에 따라 히스기야를 성전 뜰 남쪽 <왕의 주랑건물>위에 올려 세워 놓고 <하얀리본>의 혼란과 내부분열을 획책한다.
예수는 성전과 기존 체제는 개혁의 대상이 아니고 무너뜨려야 할 대상으로 파악한다.
예수는 유대광야의 시험과 수행을 거치며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일에 하느님도 함께 땀 흘린다는 것, 메시아 한 사람으로 세상을 구하지 않는다는 하느님의 뜻을 다시 되새긴다. 경제적 궁핍이 어떻게 사람을 압제에 굴복하도록 만드는지 조상 요셉이 7년 풍년과 7년 흉년 동안에 저지른 일을 통하여 사람들을 가르친다.
성전 이방인의 뜰에서 예수는 하느님이 직접 희년을 선언했다고 가르친다. 군중 속에 성전측 사람들이 끼어들어 예수가 희년을 선언할 때 군중을 선동한다. 예루살렘 성안 주민들은 점점더 고조되는 긴장에 몸을 사린다.
예수는 성전이 무너져야 함을 얘기한다. 헤롯왕이 지은 건축물 성전 뿐만 아니고, 하나의 신 (야훼), 하나의가르침 (토라), 하나의 성전 (예루살렘 성전)의 허구를 꿰뚫어 본다. 결국 이스라엘이 믿었던 신은 지배자들이 자기의 욕망을 하늘에 투영한 그림자라고 생각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