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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Jan 29. 2021

교회라면 징글징글하다는 지금 읽는 <소설 예수4>

책리뷰 <소설 예수4> 닫힌 문


<소설 예수> 4권 닫힌 문

윤석철 지음, 나남출판사, 2020.12.05, 472쪽


고귀한 스님이 땡중 소리를 듣는 것은 부처님의 잘못이 아니다.

어린 양들의 목자인 목사님이 먹사 소리를 듣는 것은 예수님의 잘못이 아니다.

사랑의 기독교가 개독교로 불리우는 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다.


종교집단은 어쩌다 코로나의 온상이 되었을까? 지금 교회는 왜 증오의 대상으로 꼽힐까? 크리스쳔들은 어쩌다가 예수쟁이로 불리우게 되었을까?

코비드19 펜데믹 시대를 살고있는 지금, 사람들은 “교회”라는 말만 들어도 진저리를 친다. 덩달아 “예수”까지도 외면당한다. 이 상황이 “예수”의 책임은 분명히 아니다. 예수 정신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교회, 하늘의 뜻과는 다른 길로 인도하는 목자들, 예수를 잘 알지 못하는 왜곡된 신앙에 매몰된 교인들의 책임이지 예수의 책임은 아니다.


<소설 예수>를 통하여 도대체 예수는 어떤 존재였나를 살펴본다. 경전이 두레박없는 깊은 우물이라 목을 축일 수 없었다면, <소설 예수>는 두 손을 모아 떠 마실수 있는 옹달샘처럼 친절하다. 물맛도 달다. 갈증을 달래준다.

 


니산월11일이 시작된 밤, 베다니 마르다네 여인숙에서 제자들이 강력하게 불만을 터뜨린다.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사람과 빵을 못받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의 갈등이 드러난다.

 “이번 유월절과 무교절 명절 기간 내내, 성전에서 특별히 우리를 불러 일을 시킬 때까지는 누구도 성안으로 들어오지 말고 여기 산자락에 그냥 머물러 있으라고 했지.” ~~~

“~ 예수 그 사람 따라 우르르 들어간 사람들 때문에 우리 모두 빵을 못 받게 생겼다고!” 17쪽

“말만 앞세우는 선생을 따를 겁니까? 그냥 엎드려 있으면서 성전에서 내려주는 빵을 며칠이나마 받아먹으며 지내겠습니까?” 19쪽

“제자란 누구입니까?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그 일을 따르는 사람이 제자 아니겠습니까?” 25쪽

사람들은 예수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 쫓은 것은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경건한 모든 유대인을 적으로 돌려 놓고 이룰 수 있는 하느님 나라는 환상이라고 말한다. 사전에 상의하지 않고 선생이 모든 제자들을 위험에 빠뜨렸다고 따진다.


 예수는 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았을까? 레위는 예수를 이렇게 이해했다.

“~ 성전이 자기들 본분이라고 붙잡고 있는 성전 제사와 성전을 운영하기 위해 걷는 성전세를 거부한다는 표시, 바로 성전이라는 체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신 것으로 저는 생각했습니다.” 24쪽


 예수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이해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지 않고는 하느님나라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해방은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니다. 해방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 “달 아래, 해 아래 있는 모든 사람! ~ 모든 생명이 겪는 억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제 몫대로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살아가는 것!”29쪽

이 대목에서 독자들은 <소설 예수> 저자가 강조하는 큰 줄거리를 뚜렷이 볼 수 있다. 예수는 모든 생명의 해방을 생각한다. ‘모든 생명’의 일은 메시아 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한 순간에 마법처럼 해결되지 않는다. ‘모든 생명들’이 함께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나간다는 의미이다.




<소설 예수>4권 닫힌 문 전체 줄거리

히스기야는성전 지하감옥에서 위수대 감옥으로 옮겨진다.

유다는 히스기야를 구출하는 일보다 계획된 거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라바에 반발하여 혼자라도 히스기야 구출에 나서겠다고 마음을 굳힌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다시 모여든 성전 지도자들은 유월절 준비하는 날(니산월 14일)까지 예수를 처형하기로 계획을 세운다. 니고데모는 예수가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할 동지를 모으기 시작한다.


성전에서 예수는 훗날 <랍비 유대교>를 시작한 <자카이의 아들 요하난>을 만난다. 성전 솔로몬의 주랑건물 안에서 두 사람은 토라를 포함한 모든 압제에서 해방하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대하여 토의한다.


베다니 마르다네 여인숙에서 그날 밤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병을 열어 예수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그건 메시아를 세우는 의식이다.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 가문), 다음 대제사장 자리를 노리는 시몬 칸데라스(바이투스 가문), 자리를 유지하려면 이번 유월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는 빌라도 총독, 이들 틈에서 제사장 야손은 자신의 득실을 저울질한다. 소설 초반부에 묘사한 이들의 권력을 위한 암투는 예수당시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상황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지금과 일치한다.


야손은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손에 쥐고 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재물을 밝히고, 어떤 사람은평판과 달리 여자를 너무 탐하고,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답게 경건하게 살았다.” 32쪽.

정보를 손에 쥔 자는 그 정보를 노출시키지 않는다. 필요할때마다 이번엔 어느것을 꺼내면 좋을까를 궁리하고 결정되면 슬쩍 꺼낸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그렇치 않은가.


예수는 성전뜰에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며 자신의 길을 지키고, 히스기야가 붙잡혀있는 상황에서 바라바는 거사의 중요성을 장황하게 하얀리본 동지들에게 설명한다.

다윗왕이 나라를 세울 때까지 어려움을 겪으며 도망도 나녔듯 우리도 어려움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다윗의 칼에 피가 묻었듯 우리도 손에 피를 묻히는 일에 주저하지 말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 거사만 생각합시다! 73쪽

거사보다는 구금되어있는 히스기야를 구출해야한다는 동지들의 의견도 거세다. 히스기야, 그가 누구인지를 상기시킨다.

"~~~히스기야 동지의 아버지는 약탈당하던 농민들의 한을 풀기 위해 일어섰던 갈릴리 세포리스의 유다 농민군이었습니다. 로마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받고 시체도 들짐승 날짐승에 다 뜯겨 사라진 사람, 그의 아들이 바로 히스기야 동지입니다." 75쪽 "~~~우리는 한 목숨으로 연결돼 있어서 그렇습니다. 히스기야 동지만 죽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모두 죽는 겁니다." 76쪽


작가는 예수를 혁명가로 묘사하고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묵직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소설의 문장들이 무겁고 굳어있지만은 않다. 굶주림에서 벗어날 길 없는 사람들과, 부모자식 형제자매의 관계를 묘사하는 부분을 읽으면 마치 한국전쟁 전후의 우리나라 정서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착각이 일어날 정도로 촉촉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예수가 거닐었던 마을들을 그림처럼 펼쳐보여주므로 독자들은 그 시대 그 장소로 끌려들어가 예수와 함께 나란히 길을 가게 된다. 그리고 예수의 생각이 곧 독자의 생각이 된다.

사람들은 세상의 배꼽(2권의 제목으로 쓰였슴)이라는 예루살렘을 가기 위해 그 험하고 가파른 길을 걸어오른다. 그러나 하느님은 배꼽 따로, 머리 따로, 발 따로 세상을 나누지 않았음을 예수는 믿는다. 하느님은 예루살렘이라는 배꼽에서만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고 그는 믿었다. 87쪽


예수는 빵 한 덩어리 때문에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들의 눈물에 가슴이 아팠다. 예수가 생각하는 하느님 나라는 추상적인 나라가 아니다. 예수가 꿈꾸는 하느님 나라는 이렇다.

그 고픈 배를 먼저 채워주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말로 가르치는 일은 그들에게 가해지는 가장 잔인한 고문이다. ~~~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지고 메추라기가 천막으로 날아 들어와 먹이가 되는 그런 놀라운 세상 말고, 자기 먹을 것 자기 손으로 만들고, 힘들어 못 만드는 사람이 있으면 옆에 있는 사람이 도와 함께 빵을 나눠먹는 세상! 93쪽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는 나라입니다.  ~~~ 이루며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기다리고,

하느님이 보내주신 메시아가 번뜩 나타나 이 땅위에 세우리라고 생각했던 그런 하느님 나라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세상입니다. 112-115쪽

하느님 나라는 제국이 아닙니다. 특별히 사랑해서 어떤 나무를 크고 강하게 우뚝 세우는 나라가 아니고, 겨자풀도 살아가는 세상을 말하는 겁니다. 119쪽

예수의 관점은 늘 억압하는 지배자 세력과 억압당하는 사람에 있었다. 이방제국과 이스라엘에 머무르지 않았다. 하느님은 세상을 심판하여 파멸시키시는 분이 아니라고 믿었다. 억압받는 자들을 해방시키시는 하느님이라고 믿었다. 그 일에는 때가 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장 큰 줄기가 시간이었다. 시간이라는 줄 위에 세상을 걸어 놓으셨다. 182쪽


사람들은 예언자들이 말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잘못으로 인해 하느님이 로마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벌을 내리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라고 강조한다.

하느님은 여러분이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언약을 맺은 그날부터 하느님은 고통에서, 억압에서, 세상 끝날을 맞은 것처럼 캄캄한 절망에서 여러분을 끌어올리고 일으켜 세우는 분입니다. 221쪽

하느님은 떠난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지, 끝까지 쫓아가 벌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 하느님을 무서운 분처럼, 분노하는 분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건 지배자들이 파놓은 함정입니다. 225쪽

하느님은 어디 높은 곳에 앉아서 사람들이 잘하는지 못하는지 그 옆에 분노의 불화로를 끼고 내려다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 눈을 뜨면 내 옆사람도, 내가 이를 갈며 미워하던 사람도 나와 똑같이 하느님께서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230-231쪽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불리는 바리새파 학자 요하난 벤 자카이와 예수는 제국, 성전, 예언, 하느님 나라, 예수 이후의 미래에 대한 여러 주제들을 문답으로 이어간다. 요하난은 예수가 성전에서는 하느님 모독으로, 로마총독은 로마에 대한 반란 선동과 포고령 위반으로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되리라고 예상한다.

요하난은 예수가 처형되고 나면 사회변혁과 해방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을 갖지 못했고, 그 방법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 예수가 추구했던 외부지향(outward)의 사회변혁 운동을 포기한다고 보았다. 하느님 나라를 이룬다는 명분으로 내부운동(inward)으로 전환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대신 예수에 대한 가르침으로 변질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예수운동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 운동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개입에 의한 세상의 종말과 우주적 구원(Cosmic salvation)으로 성격이 바뀔 것이 분명하다면서 지금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대신 논리를 갖춘 유대인 학자가 제자들을 이끌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조직의 변화 과정을 들어 설명하면서 예수에게 갈릴리로 물러나 다시 준비하라고 권한다.(234 - 296쪽 요약)


성전 경비대는 예수를 잡아들이기로 하였으나 뜻밖에 요하난이 나타나 원할히 처리되지 못했다.

성전 경비대를 투입하려던 순간에 뜻밖에 요하난 선생님이 성전에 올라와 예수 그자를 찾았습니다. ~~ 그랬다. 요하난이 예수를 만난 그 무렵 성전 경비대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을 덮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382쪽

바이투스 가문의 수장 칸데라스, 안나스 가문의 대제사장 가야바, 총독 빌라도, 이들은 각자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예수를 어떻게 처리할 지 갖은 꾀를 다 내고 있었다.

예수가 일으킬 소란을 통하여 권력을 강화하려는 사람, 권력의 둑에 어떻게 하든 구멍을 내보려는 사람, 유대에서 가장 강력한 두 정치권력이 가야바의 집 접견실에서 불꽃도 연기도 없이 은근히 불붙고 있었다. 387쪽


책의 후반부에서 작가는 헤롯에 대해 서술한다. 예루살렘의 건축은 유대 고유의 양식이 아닌 로마식 건축이었고, 성전 정문에는 황금독수리를 세웠다.

헤롯왕은 야훼 하느님의 백성을 헤롯왕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헤롯의 나라로 바꾼 사람이다. ~~~ 로마라는 신전과 황제라는 새로운 신을 이스라엘에 모셔온 사람이 헤롯이다. 407쪽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통치한 33년의 재위기간 동안 그가 이룩한 일들은 지난 1천년 동안 이스라엘 남북왕조와 제국들이 남긴 상처를 씻어내고도 남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했다. 유대의 왕으로 헤롯이 이룬 공로는 그가 저질렀던 숱한 잔혹행위와 폭정을 덮고도 남는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409쪽.

이런 문장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헤롯왕 시대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어리석은 우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로부터 2천년이 지난 지금은 무엇이 달라진 게 있단 말인가.  


헤롯은 성전을 약탈하려는 로마군을 가로막고 나서는 담대한 왕이었다. 이스라엘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는 이집트에서 쌀을 들여오는데 왕의 군대가 호위하도록 했고, 예루살렘 형제들에게 그 쌀을 나눠주어 헤롯을 칭송하는 함성이 기드론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렸다. 이렇게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난 헤롯이기에 그의 잔인함은 슬그머니 가려지고 파묻혔다. 헤롯은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면서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보호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꿈꿨다.


<소설예수> 4권의 마지막은 예수에게 기름붓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로 맺는다. 작가는 기름의 향기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향기는 부드러우면서도 깊었다. 박하 냄새도 나고, 아주 잘 익은 올리브에서 조심스럽게 짠 품질 좋은 기름 냄새도 나고, 아라비아 사람들이 세상 끝 산속에서 캐낸 엷은 분홍색의 값비싼 향료석을 태울 때 나는 냄새도 섞여있다. 444쪽

마리아는 하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고 말했다. ~~~ 본 사람, 듣는 사람마다 각자 그들 마음 속에 어떻게 받아들였든 그건 니산월 12일이 시작된 밤, 베다니 여인숙에서 일어난 일이다. 446쪽.

예수를 일컫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를 하느님으로 여기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한자로 음역하여 '기독'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예수교, 기독교, 다 같은 뜻이다.

기름부음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바로 장레의 절차를 뜻하기도 한다.

사람이 죽으면 사흘 후에 몸에 향유를 바르고 장사를 치른다. 469쪽 마지막 쪽


마리아가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은 몸에 향유를 바른 의식이기도 하니 다음 5권에서 예수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사뭇 궁금하다. 책은 7권까지 나오기로 예고되어있으니 다음 권에서 예수를 장사지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들려줄 작가의 이야기는 무엇일지...

신약성경은 예수가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의 행적을 알린다. 그러나 이 책 <소설예수>는 예수가 직접 등장한다. 이미 팩트가 된 역사 속으로 들어가 그 시대에 예수가 걷던 길을 되짚어보는 이야기이다. 예수가 생각하는 하느님 나라, 예수가 무리들에게 가르치는 하느님 나라는 지금 기독교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  나라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그 다름을 모른 채 지금 이 시대에 행하여지는 기독교의 잘못된 행태가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사는 것 같다.

이 책은 예수의 행적을 역사적 고증과 함께 소설의 형태로 그려낸다. 이 책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다면 적어도 현실에서 벌어지는 기독교의 잘못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 하느님 나라의 핵심은 사랑이다. 코비드 19 펜데믹 시대에 감염의 온상이 된 교회들을 향하여 사람들은 외친다. 당신들 행동은 사랑이 아니라고. 우리는 예수를 믿지도 않고 예수를 알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예수라면 지금 당신들처럼 이렇게 처신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대중들은 교회를 향하여 외쳐댄다.

안타깝다. 사람들이 성경이 아니더라도 <소설 예수>에서라도 예수를 바로 알게되면 좋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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