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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Feb 29. 2024

조르주 상드 <내 생애 이야기>

책 리뷰

< 생애 이야기> 1-7조르주 상드 지음박혜숙 옮김. 2023. 나남.


이 책은 총 7권으로 리뷰는 통합하여 기록합니다. 인용은 각 권과 쪽 수를 표기합니다.


조르주 상드는 필명이고 본명은 아망틴-루실-오로르 뒤팽 Amantine-Lucile-Aurore Dupin이다. 남녀 차별이 엄연히 존재했던 그 시대에 성별을 위장하고 글을 쓰기 위해 조르주 상드라는 필명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조르주 상드의 이름에는 “불꽃같이 살다간 여자”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한 시대를 열정적으로 살면서 자신의 발자취를 뚜렷이 남긴 사람, 때로는 짙은 어둠속에서 때로는 환한 빛 속에서 자신의 삶을 굳건히 버텨낸 사람, 누구보다 앞장서서 새로운 길을 뚫고 헤쳐간 사람, 여자는 주로 남자의 그늘에서 존재하던 시절에 남자들과 동등한 세상에 뛰어든 여자에게 “불꽃같은 여자”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시몬 베이유(Simone Adolphine Weil, 1909년–1943), 소피야 코발렙스카야(1850–1891). 나혜석(1897-1948), 전혜린(1934-1965)에게 붙여진 수식어이다.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도 역시 불꽃 같이 살다간 여자이다. 가부장 시대에 세상에 뛰어들어 여성으로서 삶을 산화했다고 붙여진 ‘불꽃’인가…


조르주 상드 초상 by Thomas Sully, 1826


코뮤니스트 조르주 상드

이 책은 조르주 상드 가족 3대에 걸친 운명과 프랑스 역사의 한 세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혼란의 프랑스 혁명의 뒤안길에서 역사를 개인적 경험과 엮어 생생히 그려 보인다. 19세기 프랑스 사회를 총체적으로 반영한 역사 기록물이다. 역사의 거대 서사 속에서 엿보는 미시사가 아니라, 미시사를 통해서 거대 서사를 훑어보는 식이다. 조르주 상드, 그녀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이 낱낱이 드러난다.


1~3권은 가족 이야기, 유년기 겪은 나폴레옹 시대를 기록했다. 4~7권은 작가로서, 사회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기록했다. 6권과 7권에서 작가로서의 삶과 그에 얽힌 다양한 인물들에 대해 밝힌다. 자신이 살아온 시대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자서전이다. 본인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당대 문화와 예술, 전쟁과 혁명, 사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의 향연을 펼친다. 상드는 엄청난 독서로 그 어떤 남자보다도 깊이 있는 지성을 갖추었다.

책은 조르주 상드가 태어나기 전 상드의 조상들 이야기로 시작한다. 상드의 할머니는 폴란드 왕 오귀스트 2세(Augustas II, 1670-1733)의 손녀이다. 상드는 당시 아주 천한 계급이었던 새장수의 딸과 폴란드 국왕의 증손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특별한 가정환경 속에서 상드는 귀족들에게 반감을, 민중들에게 애정을 느끼며 성장한다. 

흙손이든 곡괭이든 낫이든 뿔피리든 간에  모든 것이 탑이나 종만큼 아름다운 상징물이  것이다.” 1 67.

상드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1808년 낙마사고)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시어머니에게 상드를 맡기고 파리로 갔다. 어린 상드는 애정결핍증에 시달리며 늘 파리의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할머니의 성에서 누리는 귀족의 삶을 경멸하고 가난한 민중의 삶에 관심을 쏟았다. 엄마가 있는 곳의 가난한 농부의 삶을 동경했다. <내 생애 이야기 4>의 글을 보면 상드가 농촌의 소박한 삶을 얼마나 미화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시끄러워도 깨지 않는 아이들이 코를 골고 자는 집에서 먹고 자는 것은 정말 축제와 같았다하얗고 두꺼운 시트들노란 서지 천으로  가리개닭소리마른 장작들 타는 소리특히 농부들의 친절에 우리는 반해 버렸다.” 4 69-70.

귀족들의 허풍과 “가짜 기품”을 경멸하였지만, 할머니로부터 다양한 고급 교육을 받은 상드는 예술에 대하여 수준높은 안목을 가지게 된다. 할머니의 성에서 살던 경험은 사회활동에 훌륭한 밑거름이 된다. 부르주아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어릴 때부터 책에서 위안을 찾았고 루소, 볼테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몰두했다. 이러한 문학적 영향은 글쓰기뿐만 아니라 그녀의 세계관과 삶에 대한 접근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귀족 친척들을 등지고 소설가의 길을 택했다.


상드는 사회주의에 빠져들었으나 시류에 덩달아 휩쓸려들어간 것은 아니다. 코뮤니즘Communism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논지가 있다. 논란이 되는 사유재산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떳떳이 밝힌다.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나만의 것을 소유하려는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코뮤니즘의 사유재산에 대한 상드의 논리는 이렇다.

아이에게는 자기가 직접 경작하고 사랑할  있는 땅으로 4제곱피트 정도의 땅이 필요하다.” ”아무리 코뮤니스트라고 해도 개인 재산은 인정해야 한다.” 4 72

코뮤니즘 사상너무나 옳아서  위대한  사상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우리는 자유나 노동에 있어 집단을 위한 것과 개인으로 존재하는  필요한   가지로  의미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4 73.

땅의 균등 분배에 대하여 상드는 코뮤니스트로서 용기있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 방식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오직 폭력적 방식으로만 가능” 7 149-150.

상드는 자신의 진보적 사상을 “기독교적으로 고양된 정신”이라고 했다.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글을 보자.

그것은 예수가 설파한 평등의 원칙을 향한 거친 투쟁이었다그것은 어느 때는 빛나는 빛으로 어느 때는 불타오르는 횃불로손에서 손으로 우리의 시대까지 왔다그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도 다른 성인들에 의해서도   많은 화형식과 사형과 순교자들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파괴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파괴되지 않을지난 세기의 불신앙에 대한 항거였다.” 1 108-109.


상드는 스스로 공화주의 신봉자였는데 대혁명(1789년 봉기)을 거치며 큰 상처를 받았다. 혁명에 승리한 쟈코뱅의 끔찍한 공포정치를 목격하며 치를 떨었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을 뿐 폭력은 잠들지 않았다. 기세등등한 혁명군은 잔혹했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는 당시의 극심한 공포정치를 경험하며 그의 저서 <미학편지>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교육이 중요하다고 외쳤다. 암울하고 참혹한 시대를 상드는 이렇게 기록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 편을 순교자라 여기며 그에 합당한 명예와 대우를 달라고 아우성치던  끔찍한 시절에 사실 순교자는 양쪽 모두에 있었음을 우린 알아야 한다한쪽은 과거 때문에 순교했으며다른  편은 미래를 위해 순교 당했을 뿐이다 들의 언저리에 있던 사람들은 뭐가 문지도 모르고 고통을 당해야 한다.” 1 110.

1830년 7월 혁명과 그에 따른 사회 불안을 배경으로 자신의 글을 통해 여성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 교육 개혁과 같은 대의를 옹호했다. 참정권을 잃은 사람들의 권리를 열렬히 옹호하는 사람으로 떠올랐다.



상드의 친구들

상드의 친구들은 19세기 주목할만한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다. 서로 존중하며 우정을 다지고, 지적 자극을 받아 영감을 얻고,  또한 상드가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었다.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와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화가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랑 친분을 맺었다. 여러 문학가들과 교류도 활발했다. 알프레드 드 뮈세(Alfred de Musset, 1810-1857),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 발자크(Honore de Balzac, 1799-1850),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 생트 뵈브(Charles Augustin Sainte-Beuve, 1804-1869), 알프레드 드 비니(Alfred Victor de Vigny, 1797-1863),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1768-1848), 졸라(Émile Zola, 1840-1902)등 프랑스 작가들이 있다. 그리고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헨리 제임스(Henry James), 브라우닝(및 그의 아내), 도스토옙스키(Dostoevsky), 투르게네프(Turgenev) 등 수많은 다른 나라의 작가들이 상드의 친구였다. 그녀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조각가 알렉상드르 다미앙 망소(Alexandre Damien Manceau)는 그녀에게 사랑과 우정을 모두 선사하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상드는 플로베르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영향도 받았으나 둘의 성향은 달랐다. 플로베르는 위풍당당하게 자신의 냉소주의를 광고했다. 그는 젊었을 때 인생에서 도망치기로 결정했다고 상드에게 고백했다. 상드는 어렸을 때 인간 존재의 공포에 충격을 받았지만, 자신이 소환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와 결단력을 다해 삶에 맞서기로 결심했다.

상드는 언론, 정치, 연극, 문학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언론에 글을 썼을 뿐만 아니라 피가로 직원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 1848년 혁명 이후 선전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어떻게 그토록 활동적이고 다채로우며 대담한 사생활을 즐기면서도 다작의 글을 계속 쓸 수 있었을까? 신이 부여한 에너지인 것 같다. 아마도 상드는 이렇게 맹렬히 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생애 이야기>는 복잡하고 때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개인적인 관계를 숨김없이 담담하게 드러낸다. 낭만주의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Alfred de Musset), 작곡가 프레데릭 쇼팽(Frédéric Chopin) 등 당시의 저명한 인물들과 깊은 관계를 형성한다.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

상드와 쇼팽은 8년간 함께 살았다. 상드는 쇼팽의 천재성을 사랑했다. 

"쇼팽의 천재성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 깊은 감수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단 하나의 악기로 무한의 언어를 이야기하게 했다." 7권 278쪽.

"또 모든 사람은 대단한 거장들보다 더 광대하고 더 완벽하고 더 똑똑한 이 천재가 제바스티안 바흐보다 더 개성있고 베토벤보다 더 힘차고 베버보다 더 극적이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그 세 사람을 다 합친 사람이며 또 그 자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취향이 더 섬세하고 더 엄숙하며 더 고통스럽게 가슴을 찢는다. 그를 능가하는 사람은 오직 모짜르트뿐이다." 7권 279쪽.

세상에 떠돌던 쇼팽과의 관계는 상드의 <내 생애  이야기>와 다른 부분이 많다. 상드가 쇼팽을 유혹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이 조심했다. 자서전에 쓴 글이 옳지 않을까? 모성애적인 사랑으로 병약한 쇼팽의 곁에서 그를 간호했다. 

나는 사랑에,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열정에 대항하기에는 아직 여전히 젊었다. 젊은 나이와 나의 상황과 여성 예술가, 특히 잠깐의 기분 전환 같은 것은 끔찍하게 생각하는 여성 예술가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의 충동은 나를 매우 두렵게 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소홀해지는 것은 결코 용인하지 말자는 결심을 하니 나는 쇼팽에게 느끼는 따뜻한 우정조차도 작지만 매우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다.” 7권 294쪽.

쇼팽과 상드의 관계는 이렇다.

우리 둘 사이는 그렇게 뜨겁지도 않았고 그렇게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 그와 취향, 예술관, 정치 성향, 좋아하는 것도 다른 나는 그의 어떤 것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7권 310쪽.

"나는 그의 어떤 것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에 형광펜으로 밑줄 쫘악 긋는다. 이런 일이 어찌 그리 힘든단 말인가! 결혼생활중에 상대방을 바꾸기 위한 노력은 출혈이 심하다. 오히려 내가 배우자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쉽다.이것은 상처에 딱지가 앉을 즈음에야 깨달을 있는 진리(?)이다. 


쇼팽과의 연애도 유명했지만 파리 무대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여배우 중 한 명인 마리 도르발(Marie Dorval, 1798-1849)과의 연애는 파리가 떠들석했다 . 그들은 1833년 1월에 만났는데, 당시 상드는 20대 후반이었고 도르발은 30대 중반이었다. 악의적인 소문이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소문을 퍼뜨리기만 할 뿐 아니라 과장되게 덧붙이고 심지어는 지어내기까지 한다. 소문을 즐기는 것이다.


코랑베

상드가 아주 어릴 때부터 마음 속에 지니고 있던 친구이다. 환상 속의 가상 인물이지만 코랑베는 조르주 상드의 인생에, 그녀의 작품에 종종 관여해왔다. '코랑베'는 아무 의미없는 이름이다. 꿈속에서 만나 우연히 주어진 이름일 뿐이다. 누구나 그런 존재 하나쯤 가슴속에, 뇌리에 지니고 있지 않나? 꿈속에서 만났는데 현실보다 더 또렷한 존재, 가끔은 내 안에서 튀어나와 실제의 삶을 간섭하는 존재. 상드의 코랑베는 잊혀졌다가 다시 떠오르다가 또 잊혀졌다가 그렇게 상드의 생에 끼어든다.

"이 인물은 어린 시절 몇 년동안 내가 만들어 낸 신이었고 한동안 나의 신앙이었으며 숭배의 대상이었다는 말만 하고 싶다." "내가 모든 열정으로 마음속에 품은 것은 예수님이었고 코랑베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보다 더 인간적이고 효과적으로 내게 하나님을 해석해준 존재로 굳게 믿고 있다." "만약 코랑베가 정치에 관여했다면 잔인한 러시아가 죽어 가는 폴란드를 삼키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이 사회에 관여했다면 강한 자들에게 약한 자들이 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부자들의 변덕에 가난한 자들의 몸과 마음이 휘둘리도록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교황보다 더 크리스천 같은 존재였다." 6권 252, 253쪽.


상드는 의미있는 인간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우리들 모습은 어떠한가? 단순한 잡담을 넘어 삶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나눌 대화친구가 있는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은 훌륭한 자양분이 되어 서로를 고양시킬 것이다. (관계가 시작되면서부터 귀찮아지겠지만!)

전혀 귀찮지 않은 브런치 이웃 작가들(상대적이거나 일방적이거나)과의 관계를 잠시 생각해본다. 책을 손에 잡기는 애매한 짧은 시간의 틈새에서 브런치 글들을 자주 읽는다. 이혼, 퇴직, 고부갈등... 이런 이야기들이 많다는 불평을 간혹 접하지만 그것도 삶의 한 부분이니 따로 떼어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브런치에는 다양한 장르의 글들이 있다. 다른 문화와 요리와 예술 등등. 시야를 넓히면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삶에 대한 더 넓은 시각을 얻게 된다. 유명한 사람을 측근으로 두지 않더라도 주어진 환경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기회는 내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조르주 상드 초상  by Charles Louis Gratia (c. 1835)


상드의 신앙심

상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예수가 설파한 평등의 원칙을 실현하고자 노력한 기독교 사회주의 혁명가이다.

상드는 10대 중반, 반항적인 상드를 길들이기 위한 할머니의 조치로 앙글레즈 수녀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너무나 잘 적응해서 나는 그곳에서 지금껏 내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4권305쪽.

행복했다고는 하지만 노앙의 할머니 집과 수녀원 생활은 크게 달랐다.

수녀원에 유폐된 생활, 파리의 공기 그리고 지속적인 신체 발달과 성장하는 몸에는 치명적으로 생각되는 절대적인 금욕생활은 나를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곳에서 과거도 후회하지 않고 미래도 꿈꾸지 않으면서 단지 현재의 행복만 생각하며 3년을 보냈다.” 4권 306쪽.

상드는 수녀원 기숙학교에서 악동이었다. 지하계단으로 내려가 지하 탐험을 하고, 지붕위로 올라가 다락방 유리를 깨기도 하며 악동놀이를 즐겼다. 유리창에 십자 창살이 있고, 커튼으로 빛을 가리운 감옥 같은 기숙사에서 탈출놀이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10대 소녀들의 악동놀이가 아닌가. 


상드는 성당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한다. 성당문이 닫힐 시간이었다.

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미로움을 숨쉬고 있었다. 그것은 코와 함께 영혼으로 쉬는 숨이었다. 갑자기 내 온 존재에 알 수 없는 떨림이 일어났다. 눈앞에 현기증이 일었는데 무슨 하얀 서광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누군가 내 귀에 “Tolle, lege!”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메리 앨리시아가 내게 말하는 줄 알고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5권 120쪽. 

나는 내 마음이 그동안 원했던 것처럼 내 영혼이 믿음으로 가득 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황홀해서 나는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렸다. --- 한 번도 직접적으로 소통해 본 적이 없었던 어떤 이상적 존재, 곧 정의와 사랑과 성스러움으로 가득한 존재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5권 120쪽.

상드는 영성체험을 했다. 이후 상드는 오직 사랑만 하며 살기로 결심한다. “나는 사랑한다. 고로 나는 믿는다”고 데카르트의 문구를 패러디했다. 이거 참 아이러니 아닌가. 데카르트는  하나님 없이도 이성을 가진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는 명제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던진 것인데, 상드는 이 문구를 인용하여 깊은 신앙심을 나타내다니. 17세기 데카르트를 지나 18세기엔 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볼테르(Voltaire, 1694-1778)의 데이즘(deism)을 따랐다. 데이즘은 이신론理神論, 또는 자연신론自然神論으로 “신은 자연 속에 있다”는 볼테르의 철학적 주장이다. 교회에 나가지 않고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논리적 근거를 남긴 것이다. 

남장을 하고 담배를 피고, 이혼하고, 동성인 여자(마리 도발)를 사랑하고, 질투하고, 자유분방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하는 상드의 평판과 깊은 신앙심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상드는 신앙적 고뇌를 기도로 이겨내려고 애썼다.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과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같은 시인들이 방탕을 부추기고 경건을 조롱하던 시대였으나 상드의 신앙적 고뇌는 치열했다.

나는 여러 번 밤에 어둡고 조용한 성당에 들어가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깊은 명상에 빠지곤 했다. 나는 신앙적 열정에 빠졌던 젊은 시절처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곤 했다.” 7권 99쪽.

끊임없이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기도 했지만 또 이해할 수 없을 때는 하나님을 부정하게 하기도 했다. 생각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처럼 내 삶도 많은 변화를 겪고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보았지만 그 깊은 내면은 늘 한결같았다. 즉, 믿음에 대한 필요성과 지식을 향한 갈증 그리고 사랑의 기쁨은 늘 그대로였다.” 7권 121쪽.


인물과 시간과 장소가 결합된 스토리텔링.

<내 생애 이야기>는 한 여성의 일생을 그린 자서전이면서 이야기 속에 사회 논평과 문학 탐구가 녹아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독자는 상드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부분을 많이 발견할 것이다. 

내 삶에 집중하기도 힘든데 타인의 자서전을 읽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상드는 독자앞에 이 책을 내놓으며 무엇을 요구한 것일까? “당신 자신의 삶을 돌아보세요.”라고 속삭이는 것같다. 자신을 발견하고, 사회적 규제에 도전하고, 자아 실현을 위해 노력하라는 격려의 뜻이 담겨있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관을 형성한 역사적 철학적 주제도 함께 다룬다. 독자는 역사적 배경으로 프랑스 혁명과, 혁명이 사회에 미친 영향, 격랑의 역사 속을 헤쳐가며 살아온 19세기 여성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던 내 시대의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탐구가 시작되는 독서이기도 하다.  


상드가 속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상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아보자. 상드가 여자로서 어떤 역경을 물리치고 생에 도전을 했는지. 아래는 라사르트 마을에서 상드가 끔찍한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당시 그 지방의 어떤 여자도 하인의 엉덩이에 업힐망정 말을 타는 여자는 없었다. 복장도 남자아이들의 운동복을 입는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아마존 복장에 둥근 모자는 정말 흉측하게 여겨졌다. 시체의 뼈를 공부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었고 사냥은 질서의 파괴였고 공부를 한다는 것도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또 아버지의 친구였던 사람들의 아들들과 내가 친분을 유지하면서 어린 시절 친구로 지내고, 또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멍청한 소녀처럼 얼굴도 붉히지 않고 그들과 악수를 하곤 하는 일이 시골에서는 정말 몰염치고 타락이고 아무튼 모든 나쁜 행실이었다." 5권 300쪽.

"또 나는 클라우디우스와 그 형제들과 만나 총으로 과녁 맞추기 놀이를 하곤 했다. 어떤 때는 말을 타고 성당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신부님은 내가 주교단 주변을 어슬렁거릴 때 나를 쫓아내셨다." "나는 난폭한 사람으로 소문이 나서 부러진 팔과 쪼개진 머리를 보면 즐거워하는 여자였고, 피를 보는 걸 좋아해서 데샤르트르는 그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를 불러 즐겁게 했다고 했다. --- 그들은 소문을 즐기는 것 같았다. 막상 그런 정신 나간 소리들을 들었을 때 나는 그저 헛웃음을 지으며 그런 소리들이 후에 너무나 큰 고통이 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5권 301-302쪽.


<내 생애 이야기>는 외부 사건의 서술뿐 아니라 상드 내면의 감정까지도 독자에게 전달한다. 파리의 활기찬 거리부터 고요한 시골까지 다양한 장소를 풍경화처럼 그렸다. 마치 세밀화 그림처럼 장소의 모습과 거기에 떠도는 소리들과 심지어는 어떤 냄새까지도 다 담아낸 이야기 책이다. 상드의 시대로 건너가 그녀의 옆에서 함께 경험하는 느낌을 준다. 

19세기 여성이 맹렬히 도전했던 사회적 규범, 개성을 표출하고 자유를 얻는 조르주 상드의 삶은 21세기를 살고있는 우리들(여성 뿐 아니라 남성까지, 인간 모두)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가? 나는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아직도 주창하고 투쟁해야할 정도로 여권女權은 많이 부족하지만 정작 우리가 집중해서 주창해야 할 일은 여권에 앞서 인권人權이라 생각한다. 인권이 보장된 사회라면 여권은 자연적으로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 열정적인 삶이 상드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더욱 강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제약이 있으니 자기 표현의 노력을 남성보다 더 많이 했어야 했지만, 성취를 향한 보편적인 인간의 욕구는 남녀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프랑수아 레옹 시카드François-Léon Sicard의 조루주 상드 조형, 1906년, 룩셈부르크 공원, 파리



프랑스 노앙Nohant 상드의 집 1층에 있는 상드의 사무실. 책상과 도서관.


<내 생애 이야기>는 인생의 어려움이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목적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새해 첫 달은 참 바쁜 달입니다. 많이 늙었지만 아직 부엌을 벗어나지 못한 주부로서 가족 모임에 많은 시간을 부엌에서 보내고, 애들이 좋아하든 부담스러워하든 눈치없이 끼어들어 함께 노느라고 바빴답니다. 어쩌다 보니 손에 잡은 책 조르주 상드의 <내 생애 이야기> 7권 전질을 다 읽었네요.  '여자의 일생'입니다. 자서전이니 일생의 통과의례가 다 들어있지요. 출생, 유아기, 청소년기, 성년, 결혼, 출산, 그리고 이혼... 이런 순서는 무시했습니다. 게으름 탓에 7권을 한꺼번에 뭉뚱그려 리뷰를 썼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생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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