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장의 흑백 사진

by morgen

두장의 흑백 사진


여행의 목적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나는 새로운 도시에 가면 꼭 서점, 문구점, 뮤직숍, 그리고 식품점을 찾아본다. 서점에는 읽지도 못할 그 나라의 책들이 빼곡하지만 큰 서점은 영어책 진열 코너가 있으니 거기서 구경한다(영어도 잘 못 읽으면서). 서점이나 문구점에는 엽서나 포스터도 판매한다. 특히 빈티지 아트엽서와 포스터 진열코너는 내가 빠뜨리지 않고 꼭 찾는 곳이다. 보는 순간 내 마음을 움직여 구매한 엽서가 있다.


1. Posting letter into mailbox


누군가를 돕는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앞에서 손잡고 끌어주는 것, 뒤에서 힘껏 밀어주는 것. 우리가 남에게 무슨 부탁인가를 할 때 이런 말을 쓴다. "인도해주세요." "밀어주세요." 인도해달라는 것은 순종을 의미하고, 밀어달라는 것은 자기가 앞장 서겠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자녀들을 키울 땐 어떤 방법일까?
이론처럼 교과서적으로 쉽게 되는 일은 아니지만, 이 끌어당김과 밀어부침의 시기를 잘 판단하고 그 힘을 조절하는 것이 자식 키우기의 지혜인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의 손목을 꽉 붙잡고 힘껏 앞으로앞으로 끌고 달려간다. 잘 쫓아오는 자식도 있고, 마지못해 허덕허덕 질질 끌려오는 자식도, 부모의 끄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아예 손을 놓고 뒤쳐지는 자식도 있다. 나는 그 지혜가 부족하여 늘 시행착오를 한다. 조금 지나면 금방 알아차릴 일을 그 당시엔 왜 그렇게 눈이 머는지 정말 안타깝다.


얼마 전에 본 흑백사진이 잊혀지질 않는다.

어른이 키작은 여자 아이를 안고, 그 여자 아이가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장면이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거기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분명히 그 여자 아이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내가 우체통에 넣어 주었을 것이다. 나는 친절히 그 애를 돕고싶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그 애를 돕기는 했지만, 그 아이에게 성취감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애가 할 수 있는 말.

"엄마, 어떤 할머니가 편지 넣어줬어요."

만약 내가 사진의 남자처럼 키작은 애를 안아서 직접 우체통에 넣도록 해줬다면 그 아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엄마, 내가 편지 보냈어요."

키작은 애를 번쩍 안아서 우체통에 손이 닿도록 도와준 사람은 왜 대신 넣어주지 않고 힘들게 안아주었을까? 대신 넣어주는 것이 훨씬 더 쉬운데.

아이들도 어른 못지않게 스스로 이뤄나가는 "성취감"을 갖고싶어 한다. 그것을 어른들이 빼앗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제 스스로 해냈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큰가를 우리는 다 알고 있으면서 정작 일상에서는 아이의 성취감을 빼앗는 경우가 많다.

그날, 키작은 여자애는 의기양양하게 말했으리라.

"엄마, 내가 편지보냈어요."


엘리베이터를 타면 자주 목격하는 일이다.

아이를 안아서 층 번호를 직접 누르게 해주는 엄마, 애가 누르려는 것을 말리고 자신이 누르는 엄마.

좀더 어렸을 때를 돌아보면 첫 숟가락질을 할 때가 있다.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주변에 흩날리는것이 훨씬 더 많은 그 과정을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서 숟가락을 빼앗아 먹여주는 엄마가 있고, 다 퍼내버려도 그냥 놔두고 제가 해보도록 지켜보는 엄마가 있다.

걸음마를 시작하면 아이는 한 걸음에 한번씩 넘어져도 제가 걸어다니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때 아이와 함께 나가면 바쁜 마음에 아이를 번쩍 안고 가는 엄마가 있고, 수없이 자꾸만 넘어지는 아이를 그냥 일으켜주기만 하는 엄마가 있다. 이 무렵의 아이는 돌 전후의 나이인데, 그렇게 작은 아가들도 자신이 스스로 해보고싶은 욕구와 해본 후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엄마는 대처하는 법이 다르겠지만, 지켜보기만 해야 할 때 나서지 말고, 뒤에서 밀어주야 할 때 앞에서 끌지 말고, 앞에서 끌어당겨야 할 때 뒷짐지고 방관하지 말아야 하는 엄마의 역할, 그 지혜를 얻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 뿐 아니라 모든 양육자들)



2. The third man


"부모의 발자취를 따르지 말고 말을 따르라"

남편은 가끔 아이들에게 이 말을 하면서 자신이 부끄럽고 슬프다고 한숨을 쉰다. 자식에게 “나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오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는 과연 몇이나 될까?


“The Third Man”이라는 흑백사진을 보았다.

양복 입은 두 신사가 뒷짐을 지고 앞에서 걸어가는데, 바로 그 뒤에서 아주 작은 어린아이가 짧은 팔을 뒤로 돌려 뒷짐을 지고 있는 모습이다. 아이의 앞에서 가고 있는 그 신사들은 뒤의 아이가 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따라오고 있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사진을 보고 일어난 의문이 내 자신에게 답을 요구한다.

나는 도대체 알고나 있는 건가? 내 아이들이 나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라는 인간, 내 아이들이 닮아도 괜찮은 사람인가?

아니다. 뜯어고쳐야 할 것들이 너무너무 많은 나를 닮으면 큰일이다.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잡고 들어앉아있는 욕심 보따리, 심술 보따리, 그게 뭐 좋은 거라고 내 아이들까지 닮는단 말인가. 안될 말이다. 내 아이들은 꽃잎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맑고 청결한 마음을 가져야지.

설거지 통에 그릇 잔뜩 담가두고 스마트폰 붙들면 한도끝도 없는 웹 서핑, 이것도 나를 닮으면 큰일이다. 어머님이 말씀하실 때 다소곳하지 못하고 퉁명스레 말대답하는 나, 이것도 애들이 닮을까봐 걱정이다.

“엄마하는 대로만 해라!”

이 말을 어디에 쓸 수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본이 될 일이 없다.

나는 하기 싫으면서 아이들에게는 권하고, 내가 하지 못한 것을 애들에게 요구하고, 내가 멋대로 살든말든 애들은 잘 되기를 바라고... 어림도 없는일이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데, 나는 실물보다 더 예뻐보이는거울을 원하고있다.

거울 밖에 있는 나는 어찌 생겼든간에 거울 속에 비치는 나는 좀더 아름답고 멋지게 보이기를 바란다.

세상에 그런 거울이 있을까? 내 마음에 다시 새겨둔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 들어있는 내가 영 못마땅하다. 다시옷 매무새를 바로하고 거울 앞에 선다.


치아가 부실한 늙은 훈장이 제자들에게 했다는 말.

“나는 <바담 풍(風)> 해도 너는 <바담 풍>해라”

선생은 간절히 바란다. 뒷부분의 발음은 <바람풍>으로 들리기를. 나도 내 아이들에게 간절히 바란다.

나를 본받을 일은 없더라도, 제발 내가 가르치는 말은 따라주기를! 아, 가엾은 내 아이들. 엄마의 말보다는 엄마의 행동을 따라하기가 더 쉬운데, 나는 자꾸만 말과 다른 행동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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