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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Jul 03. 2020

두 장의 흑백 사진

두장의 흑백 사진


여행의 목적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나는 새로운 도시에 가면  서점, 문구점, 뮤직숍, 그리고 식품점을 찾아본다. 서점에는 읽지도 못할  나라의 책들이 빼곡하지만  서점은 영어책 진열 코너가 있으니 거기서 구경한다(영어도   읽으면서). 서점이나 문구점에는 엽서나 포스터도 판매한다. 특히 빈티지 아트엽서와 포스터 진열코너는 내가 빠뜨리지 않고  곳이다. 보는 순간  마음을 움직여 구매한 엽서가 있다.


1.  Posting letter into mailbox


누군가를 돕는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앞에서 손잡고 끌어주는 것, 뒤에서 힘껏 밀어주는 것. 우리가 남에게 무슨 부탁인가를 할 때 이런 말을 쓴다. "인도해주세요." "밀어주세요." 인도해달라는 것은 순종을 의미하고, 밀어달라는 것은 자기가 앞장 서겠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자녀들을 키울 땐 어떤 방법일까?
이론처럼 교과서적으로 쉽게 되는 일은 아니지만, 이 끌어당김과 밀어부침의 시기를 잘 판단하고 그 힘을 조절하는 것이 자식 키우기의 지혜인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의 손목을 꽉 붙잡고 힘껏 앞으로앞으로 끌고 달려간다. 잘 쫓아오는 자식도 있고, 마지못해 허덕허덕 질질 끌려오는 자식도, 부모의 끄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아예 손을 놓고 뒤쳐지는 자식도 있다. 나는 그 지혜가 부족하여 늘 시행착오를 한다. 조금 지나면 금방 알아차릴 일을 그 당시엔 왜 그렇게 눈이 머는지 정말 안타깝다.


얼마 전에 본 흑백사진이 잊혀지질 않는다.

어른이 키작은 여자 아이를 안고, 그 여자 아이가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장면이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거기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분명히 그 여자 아이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내가 우체통에 넣어 주었을 것이다. 나는 친절히 그 애를 돕고싶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그 애를 돕기는 했지만, 그 아이에게 성취감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애가 할 수 있는 말.

"엄마, 어떤 할머니가 편지 넣어줬어요."

만약 내가 사진의 남자처럼 키작은 애를 안아서 직접 우체통에 넣도록 해줬다면 그 아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엄마, 내가 편지 보냈어요."

키작은 애를 번쩍 안아서 우체통에 손이 닿도록 도와준 사람은 왜 대신 넣어주지 않고 힘들게 안아주었을까? 대신 넣어주는 것이 훨씬 더 쉬운데.

아이들도 어른 못지않게 스스로 이뤄나가는 "성취감"을 갖고싶어 한다. 그것을 어른들이 빼앗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제 스스로 해냈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큰가를 우리는 다 알고 있으면서 정작 일상에서는 아이의 성취감을 빼앗는 경우가 많다.

그날, 키작은 여자애는 의기양양하게 말했으리라.

"엄마, 내가 편지보냈어요."


엘리베이터를 타면 자주 목격하는 일이다.

아이를 안아서 층 번호를 직접 누르게 해주는 엄마, 애가 누르려는 것을 말리고 자신이 누르는 엄마.

좀더 어렸을 때를 돌아보면 첫 숟가락질을 할 때가 있다.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주변에 흩날리는것이 훨씬 더 많은 그 과정을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서 숟가락을 빼앗아 먹여주는 엄마가 있고, 다 퍼내버려도 그냥 놔두고 제가 해보도록 지켜보는 엄마가 있다.

걸음마를 시작하면 아이는 한 걸음에 한번씩 넘어져도 제가 걸어다니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때 아이와 함께 나가면 바쁜 마음에 아이를 번쩍 안고 가는 엄마가 있고, 수없이 자꾸만 넘어지는 아이를 그냥 일으켜주기만 하는 엄마가 있다. 이 무렵의 아이는 돌 전후의 나이인데, 그렇게 작은 아가들도 자신이 스스로 해보고싶은 욕구와 해본 후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엄마는 대처하는 법이 다르겠지만, 지켜보기만 해야 할 때 나서지 말고, 뒤에서 밀어주야 할 때 앞에서 끌지 말고, 앞에서 끌어당겨야 할 때 뒷짐지고 방관하지 말아야 하는 엄마의 역할, 그 지혜를 얻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 뿐 아니라 모든 양육자들)



2. The third man


"부모의 발자취를 따르지 말고 말을 따르라"

남편은 가끔 아이들에게 이 말을 하면서 자신이 부끄럽고 슬프다고 한숨을 쉰다. 자식에게 “나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오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는 과연 몇이나 될까?


“The Third Man”이라는 흑백사진을 보았다.

양복 입은 두 신사가 뒷짐을 지고 앞에서 걸어가는데, 바로 그 뒤에서 아주 작은 어린아이가 짧은 팔을 뒤로 돌려 뒷짐을 지고 있는 모습이다. 아이의 앞에서 가고 있는 그 신사들은 뒤의 아이가 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따라오고 있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사진을 보고 일어난 의문이 내 자신에게 답을 요구한다.

나는 도대체 알고나 있는 건가? 내 아이들이 나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라는 인간, 내 아이들이 닮아도 괜찮은 사람인가?

아니다. 뜯어고쳐야 할 것들이 너무너무 많은 나를 닮으면 큰일이다.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잡고 들어앉아있는 욕심 보따리, 심술 보따리, 그게 뭐 좋은 거라고 내 아이들까지 닮는단 말인가. 안될 말이다. 내 아이들은 꽃잎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맑고 청결한 마음을 가져야지.

설거지 통에 그릇 잔뜩 담가두고 스마트폰 붙들면 한도끝도 없는 웹 서핑, 이것도 나를 닮으면 큰일이다. 어머님이 말씀하실 때 다소곳하지 못하고 퉁명스레 말대답하는 나, 이것도 애들이 닮을까봐 걱정이다.

“엄마하는 대로만 해라!”

이 말을 어디에 쓸 수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본이 될 일이 없다.

나는 하기 싫으면서 아이들에게는 권하고, 내가 하지 못한 것을 애들에게 요구하고, 내가 멋대로 살든말든 애들은 잘 되기를 바라고... 어림도 없는일이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데, 나는 실물보다 더 예뻐보이는거울을 원하고있다.

거울 밖에 있는 나는 어찌 생겼든간에 거울 속에 비치는 나는 좀더 아름답고 멋지게 보이기를 바란다.

세상에 그런 거울이 있을까? 내 마음에 다시 새겨둔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 들어있는 내가 영 못마땅하다. 다시옷 매무새를 바로하고 거울 앞에 선다.


치아가 부실한 늙은 훈장이 제자들에게 했다는 말.

“나는 <바담 풍(風)> 해도 너는 <바담 풍>해라”

선생은 간절히 바란다. 뒷부분의 발음은 <바람풍>으로 들리기를. 나도 내 아이들에게 간절히 바란다.

나를 본받을 일은 없더라도, 제발 내가 가르치는 말은 따라주기를!  아, 가엾은 내 아이들. 엄마의 말보다는 엄마의 행동을 따라하기가 더 쉬운데, 나는 자꾸만 말과 다른 행동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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