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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은 감정도 가른다.

디지털 시대, 감정의 단절과 공유의 붕괴

by morgen

2부 디지털 시대의 감정, 언어, 자아, 보이지 않는 경계


6화 국경은 감정도 가른다.

비행기로는 몇 시간, 온라인 연결로는 단 몇 초면 닿는 시대다. 이상하게도 감정만은 여전히 국경을 넘어가기가 어렵다. 병상에 누운 어머니의 손을 잡을 수 없는 이민자, 화면 속에서만 손주를 보는 조부모, 카카오톡 메시지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남기는 무력한 조의, 장례식 대신 온라인 계좌로 송금하는 조의금. 이 모든 장면에서 국경은 공간의 선이 아니라 감정의 온도를 식히는 투명한 벽이었다. 시차는 단지 시간의 차이가 아니라, 곁에 있음과 부재의 차이였다. 화면 너머의 조문 메시지는 말을 남기지만, 손의 온기를 남기지는 못한다. 나는 그 무력감 속에서 배웠다. 감정은 텍스트의 정교함보다 함께 머무는 시간에서 살아난다는 것을.


외국에서 살며 가장 깊은 외로움을 느낀 순간은, 한국과 독일의 시차 7시간, 영국과의 8시간이 만들어낸 간극이었다. 내가 깨어 있는 한밤중, 누구도 전화를 걸어오지 않는다. 말갛게 깨어 있는 나를 아무도 모를 때, 침묵은 더욱 짙게 내려앉고 존재의 고독은 선명해졌다.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 순간, 내 곁에는 와이파이만 있었고, 감정은 전송 버튼을 눌러야만 건너갔다. 어떤 마음은 단어로 번역되기 전에 이미 증발해버렸다.


국경은 육체보다 감정을 가른다. 나는 오랫동안 그 단절의 한 복판에 있었다. 아니, 단절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거리,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디지털 세계에서 감정은 기호로 치환된다. 눈물 이모티콘, 웃는 얼굴, 깨진 하트, 더블 하트가 말을 대신한다. 하지만 그것은 기호일 뿐, 같이 웃는 얼굴도, 같이 앓는 몸도 아니다. 타인의 슬픔 앞에서도 “ㅜㅜ” 하나면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언어가 기호로 납작해질수록 감정의 결은 흐려지고, 마음은 경계의 바깥에 남는다.


AI가 위로의 말을 대신 써주고, 자동완성이 슬픔의 문장을 완성해준다. 말은 있다. 그러나 마음은 점점 흐려진다. 언어의 디지털화는 감정의 질감을 삭제한다. 마음의 깊이를 표현하던 언어는 짧은 응답과 압축된 반응 속에 납작하게 눌린다. 바로 거기에 경계가 있다. 기호로 긋는 선이다. 감정의 표면이 평평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경계를 느낀다. 디지털 속 감정은 모두의 것이지만 동시에 누구의 것도 아니다. 가상의 공간에서 이뤄지는 수많은 대화들,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만나는가? 아니면 각자의 외로움을 고립 속에서 마주할 뿐인가?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말이 있다. 감정은 늘 떠돌고, 어느 곳에도 오래 머물지 못한다. 물리적 경계를 넘지만, 정서적 소속에서는 부유한다.

온라인으로 소통하며, ‘자유롭게 산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진짜로 연결되어 있을까? 거리는 물리적이지만 감정은 어딘가 무중력 상태에 머문다. 하루하루 소속없는 삶을 살아가며 정체성 없는 감정 또는 외로운 연결을 경험한다. 경계는 지도 위가 아니라 감정의 주소 안에 있다. 국경의 선을 넘나들며 일하고, 사는 공간은 세계 어디든 될 수 있지만 정서의 근거지는 점점 사라진다. 고향은 지도에 있지만 마음은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 감정은 어디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디지털 세계에서 우리 감정은 늘 떠돌고 그 흔적은 로그인 기록만큼 덧없다. 어딘가에 속하지 않은 감정은 부유한다. 정체성이 없는 상태로. 경계는 소속 부재로부터 태어난다.


AI는 인간을 흉내내어 말하고 때로는 사람보다 더 사람같이 말한다. 그러나 그 말에는 체온이 없다. 감정이 없다. 어느 순간, 읽고 있는 글을 인간이 쓴 것처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다. 언어의 주인 자리를 기계에게 내준 인간은 말하는 존재인가, 말하게 되는 존재인가. 존재의 중심이 점점 흔들린다. 이제 말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언어의 AI화는 인간 고유의 감정 표현마저 위탁하려 한다. 그러나 그 어떤 정교한 알고리즘도 사랑하는 이를 향한 눈빛의 떨림, 목소리의 맥박, 망설임 속의 따뜻함을 대체하지 못한다. 감정은 코드화 될 수 없다. 말은 번역되지만 마음은 번역되지 않는다. 경계는 바로 그 차이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다시 감정의 회복을 말해야 한다. 말이 아닌 침묵, 단어가 아닌 몸짓, 텍스트가 아닌 존재, 감정은 비로소 그 안에서 살아난다. 스마트폰 화면 너머의 누군가를 향해 그저 기다리는 마음, 얼굴을 마주보지 않아도 그리움의 공기를 공유하는 감각, 그것은 국경을 넘고 경계를 넘는 감정이다.


물리적 국경을 넘어 여러 나라에서 살아본 이들은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이제는 “당신은 진짜 인간인가요?”라는 질문도 곧 나올 것이다. 아니, 이미 벌써 나와있다. 방문한 싸이트에서 방문자가 ‘인간’인지 ‘로봇’인지 묻고 확인한다. 그런데 ‘인간’이라고 당당하게 대답하고 ‘인간’이라는 인증을 받아도 사실은 그 방문자가 ‘진짜 나’인지를 관리자는 정확히 모른다. 나는 이미 여기저기에 존재하고, 물리적으로 제재하지 않는 수많은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으니 말이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와 펠릭스 가타리(Pierre-Felix Guattari, 1930-1992)는 “탈 영토화 Deterritorialization” 개념을 통해 기존의 정체성과 경계가 해제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디지털 공간 속에서 우리는 특정한 국가, 장소, 신체에 고정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정체성을 재배치한다. 감정조차 탈영토화되어 과거에는 특정 관계나 상황에 붙들려 있던 마음의 움직임이 이제는 온라인 플랫폼을 타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흐른다. 나의 감정이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다.


외국 생활의 긴 세월 동안 나는 정서적 소속을 잃은 부유(浮遊)를 경험했다. 국경은 물리적으로는 넘어설 수 있었지만, 감정의 고향은 점점 희미해졌다. 고향은 지도에 있지만 마음은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감정은 어디에 뿌리내릴 수 있을까. 디지털 세계에서 흔적은 로그인 기록만큼 덧없었다. 정체성이 없는 감정은 늘 떠돌았고, 경계는 바로 그 소속의 부재에서 태어났다.

국경은 육체보다 감정을 더 깊이 가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감정은 동시에 국경을 넘어선다.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 전송된 짧은 안부가 누군가의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그리움의 공기가 공유되기도 한다. 감정은 언어의 실패 속에서, 때로는 침묵과 기다림 속에서 살아난다.

우리는 말의 자동화, 표현의 편리함 속에서도 ‘진짜 감정’의 공간을 회복해야 한다. 경계 밖에서도 통하는 감정, AI가 흉내 낼 수 없는 감정, 그것은 오직 인간 사이에서만 오간다. 디지털의 경계,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다시 감정의 회복이 필요하다.


감정은 길을 잃는 듯 보이지만, 언제나 다시 길을 찾는다. 국경을 넘어 떠도는 감정은 결국 누군가의 마음에 닿으며 새로운 자리를 만든다. 그렇다면 경계란 단절의 벽이 아니라, 감정이 건너야 할 다리인지도 모른다. 그 다리를 건너는 순간, 우리는 다시 인간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법이 무엇이란 말인가…


7화 나를 잃은 시대 - 분열된 자아, 다중정체성의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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