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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잃은 시대

분열된 자아, 다중정체성의 불안

by morgen

2부 디지털 시대의 감정, 언어, 자아 - 보이지 않는 경계


7화 나를 잃은 시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스마트폰을 집어 든다. 알림창에는 이미 수많은 소식이 도착해 있다. 아직 이불 속에 있지만 나의 디지털 자아는 여러 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하나의 몸을 가진 내가 동시에 여러 얼굴로 존재한다. 일터에서의 나, 가정에서의 나, 온라인에서의 나. 서로를 알지 못하는 자아들이 흩어져 떠다닌다.

미국의 사회학자 세리 터클(Sherry Turkle, 1948- )의 이론에 따르면 이는 곧 다중 자아(Multiple Selves)다. 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온라인 공간에서 여러 개의 자아(자기 이미지)를 동시에 운영하며 이는 감정의 분절화와 정체성의 유동성을 불러온다. 감정의 일관성에 혼란을 주고 정체성을 단일하게 규정하던 기존의 틀을 허물어버린다. 디지털 국경은 한 사람이 한 얼굴만 가지는 것이 정상이라는 오랜 상식을 해체한다.

온라인 공간에서 나의 감정은 복수화되고 내 자아는 서로 다른 시간과 문맥 속에 흩어진다. 이는 들뢰즈의 “탈 영토화”이론과도 같다. 탈영토화된 감정, 다중화된 자아. 이것은 단지 정보화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다움의 경계를 재정의하는 시대적 징후다. 우리는 매일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반복하면서 자아를 조각내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서 있는지 불분명한 시대다. 익숙한 나의 얼굴이 낯설어지는 순간들이 점점 많아진다.

부모들이 흔히 겪는 감정중에 '자식을 나의 분신으로 여기는' 잘못된 생각이 있다. 자식을 독립된 개체로 생각지 못하고 나에게 종속된 분신으로 생각하므로 많은 문제들이 생겨난다. 이제는 디지털 세상에 나의 분신들을 만들어 놓는다. 디지털 분신들은 나의 자식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감정은 이모지로 대체되고, 위로의 말조차 AI가 대신 써준다. 더 많은 말이 있지만 마음은 점점 말의 자리를 잃어간다. 클릭 몇 번이면 공감은 전송되고, 이모지 하나로 안부를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의 겉껍질만 남고 속은 비어있는 시대다. 인간은 더 많은 연결을 원했지만 더 큰 경계에 갇혀있다. 감정은 경계를 넘나들며 디지털 안에서 방황한다.

감정들은 쉽게 소비되고 잊혀진다. 진심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은 점점 사라지고 공감은 반사적 동조로 바뀌었다. "브런치스토리"의 '라이킷 like it'이 글에 대한 공감과 감상의 표시가 아니라 '다녀갑니다'라는 안부인사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조회수의 숫자표시로 다녀간 흔적은 있지만 '내'가 다녀간 흔적은 남지 않는다. 내 발자국이 찍히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들은 인사차 라이킷을 누르고 떠난다.

AI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언어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거리엔 드문드문 빨간 우체통이 외롭게 서있지만 그 안에 편지를 넣는 사람은 드물다. 한가해진 우체통은 폐건전지나 폐의약품을 모으는 역할까지 감당한다. AI가 알아서 작성해준 편지를 온라인으로 발송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작성된 말은 누구의 말일까? 내가 그 말의 주인인가, 아니면 단지 고른 사람일 뿐인가. 우리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고르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처음에 어색하던 AI 작성 문장을 읽는 일에 점점 익숙해져간다. 익숙하다는 것은 그 빈도가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길들여진다고 할까. 인간의 글은 어수선할 때도 있는데 AI의 글은 한결같이 잘 정리돼 있다. 나는 나의 언어를 잃어가고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AI와 멀찌감치 거리를 둔다. 단어 하나를 고르기 위해 사전을 뒤적이고, 문장 하나를 엮기 위해 수차례 고쳐쓰는 일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AI는 삽시간에 척척 해낸다. 고뇌하지 않고 땀을 흘리지 않은 글에 어떤 매력이 있을까?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œur, 1913-2005)는 인간을 “서사의 자아”라고 불렀다. 시간이 흐르며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세계는 이 서사를 끊어놓는다. 로그인과 로그아웃, 플랫폼마다 다른 이름과 기록은 이야기를 이어주는 대신 조각낸다. 매일의 나를 살아가지만, 그 조각들은 서로를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자주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거울 속 얼굴은 여전하지만, 모니터 속 얼굴은 하루에도 여러 번 바뀐다. 연결이 늘어날수록 나는 더욱 분절된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모순은, 기술이 자유를 확장했지만 정작 나는 점점 나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세계에서 나를 회복하는 일은 기술이 대신해줄 수 없다. 오히려 내 말, 내 몸짓, 내 감각을 다시 찾는 일이 필요하다. 나를 잃어가는 시대에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일은 가장 사적인 혁명이다.

이 시대 사회현상중에 하나로 ‘렌탈rental’이 있다. 소유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이다. 물건의 렌탈은 물리적인 경제성이 장점이다. 안타깝게도 감정조차 렌탈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감정, ‘렌탈 감정’처럼 소비되고 사라진다. 감정이 나의 소유가 되지 못한다. 연결되어 있지만 참 외로운 시대다.

다시 자문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경계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생긴다. 디지털 공간에서 나는 깨어 있고 연결되어 활동 중이지만 정작 현실의 나는 점점 조용해지고 있다. 그 연결이 진짜 연결인가. 아니면 고립을 덜 느끼기 위한 위안의 장치인가. 외로움은 연결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닿지 않아서 생긴다.

경계는 기술이 아니라 감각에서 시작된다. 플랫폼을 넘어선다는 것은 단순히 디지털을 끄는 것이 아니라 다시 ‘느끼는 나’로 돌아가는 일이다. 진심이 담긴 말, 떨리는 목소리, 망설임이 묻은 응답, 우리가 잃어버린 감정의 실재를 되찾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잃게 된다.

춘향이와 이몽룡은 둥근달을 통하여 서로 연결했다. 우리는 지역을 막론하고 동시 중계되는 TV화면을 통하여 시간을 함께 한다. 이제는 디지털 안에서 동시간대에 만난다. 디지털은 분명 우리를 연결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분절시켰다. WWW(World Wide Web)는 우리들이 모든 경계를 넘어 방사형으로 뻗어나갈 기회를 주었다. 반면에 거미줄에 걸린 벌레가 가늘고 가는 거미줄의 경계선을 헤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를 수많은 경계선으로 가두었다.

복수의 자아 속에서 우리는 점점 ‘나’라는 중심을 잃는다. 이제 경계를 회복할 시간이다. 회복은 기술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느끼고 다시 말할 수 있을 때 생긴다. 나를 회복하는 일은 이 시대의 가장 사적인 혁명이다.



8화 연결될수록 고립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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