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생각은 언제 사람 사이에서 시작되는가
2부 생각은 언제 사람 사이에서 시작되는가
8화. 생각은 언제 말하지 못한 채 남는가
생각은 원래 말이 되기를 원한다.
떠오른 생각은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를 기다린다.
말이 되면 생각은 가벼워지고, 이해받으면 더 단단해진다. 우리는 생각을 한다기보다 어쩌면 생각을 건네고 싶어 한다. 혼자 있을 때 떠오른 생각도 누군가에게 말해 보기를 상상한다. 이 이야기를 하면 저 사람은 어떻게 웃을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은 그렇게 이미 누군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생각이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생각들은 입술 가까이까지 올라왔다가 조용히 방향을 바꾼다. 말이 되기 직전에 다시 마음속으로 돌아간다. 사르르 녹아 마음속으로 흘러들어가든, 꿀꺽 삼켜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든.
말했어야 했는데. 말을 왜 하지 않았지. 이미 늦은 생각이다. 말은 언제나 순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을 지나버린 말은 다시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말하지 못한 생각은 이상하게도 말해 버린 생각보다 더 오래 남는다. 밖으로 나간 생각은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하든, '미쳤지, 미쳤어...'하면서 후회를 하든, 이미 나를 떠난 것이다.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는 생각은 때때로 나갈 기회를 보느라 불안하다. 갇혀 있는 생각은 마치 결석처럼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나 여기 있어' 하고 살살 움직이며 다시 나를 괴롭힌다.
우리는 생각이 말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한다. 분위기 때문이었다고도 하고, 타인의 표정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말할 기회가 오지 않았다고도 한다. 하지만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 이유는 대부분 관계 때문이다.
생각을 말하기 전에 그 말이 만들어낼 관계의 변화를 먼저 상상한다. 이 말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까, 지금의 분위기가 깨지지 않을까.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참으면 될 것을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되지 않을까. 생각은 내용이 아니라 결과를 계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생각은 조용히 접힌다. 말하지 못한 생각들, 그것은 때로 지혜이기도 하고, 때로는 비겁이기도 하다.
이런 경험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종종 메시지를 써놓고 전송하지 않는 일, 긴 문장을 써놓고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지워버리는 일이 종종 있다. 문장은 사라지지만 생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삭제된 메시지는 사라지지만 생각은 마음속에 남는다.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은 마음속에 조금 더 오래 머문다.
말하지 못한 생각에는 묘한 온도가 있다. 조금 따뜻하고, 조금 아쉽고, 조금 늦은 온도. 그것은 종종 다른 시간에 다시 떠오른다. 잠들기 전 불을 끈 방 안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는 느린 오후에 문득 생각이 돌아온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 말은 지금은 더 이상 할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말하지 못한 생각은 시간 속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어떤 생각은 후회가 되기도 하고, 어떤 생각은 이해가 되기도 한다. 어떤 생각은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되기도 한다. 어떤 생각은 두터운 앙금이 되어 마음의 바닥에 깊이 가라앉기도 한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더 오래 남는 것은 말하지 못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한 메아리처럼 오래 울린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너무 솔직해서 말하지 못한다. 생각이 너무 발가벗은 것처럼 느껴져서. 너무 사소해서 말하지 못한다. 별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져 빈축을 살테니까. 너무 늦어서 말하지 못한다. 말의 유효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어떤 말은 그저 말이 되는 순간 무언가가 깨질 것 같아서 말하지 않는다. 마음속에 담아 두는 것이 위험해도 깨져 버리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안전해 보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될까봐 말하지 않는다. 문제는 푸는 것보다 만들지 않는 것이 더 편하고 쉬우니까.
앙리 마티스 <대화> 1908~1912. 캔버스에 유채, 177×217cm. 에르미타주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마티스의 <대화>를 보면 두 사람이 마주 서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그림 속 두 사람 사이에는 아마 많은 생각이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 사이에도 말이 되지 못한 생각들이 조용히 머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어떤 대화는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생각들로 이루어진다.
어쩌면 생각이란 모두 말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생각들은 그저 마음속에 머물기 위해 생겨난다.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조용하고, 더 깊고, 더 넓고, 더 높고, 더 오래 남는 생각. 말이 되지 못한 생각은 종종 마음속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다. 사람들 사이에서 생각은 항상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침묵이 생각의 마지막 형태가 된다. 침묵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지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말이 되지 못하고 남아있는 생각들, 그것이 생각의 실패는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생각이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는 선택 역시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또 하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 생각들은 누군가에게 전달되지는 않지만 우리 안에서 오래 살아간다.
생각은 늘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지만 그 생각을 침묵으로 남길지, 말로 꺼낼지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침묵은 어떤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의 병이 되기도 한다. 발설은 치유의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파장을 감당하기 어렵기도 하다. 어떤 생각은 악의를 키우기도 하고, 어떤 생각은 주변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쁜 생각은 깨끗한 유리에 흉한 얼룩을 만들고, 좋은 생각은 아름다운 풍경을 그린다.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아니,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어쩌면 그 생각 역시 아직 말이 되지 못한 채 마음속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
2부 생각은 언제 사람 사이에서 시작되는가
9화. 생각은 언제 오해가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