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장면들 5화
사소한 장면들 – 생각이 열리는 순간
5화 - 생각은 왜 늘 밤에 더 길어질까 --- 낮과 다른 시간의 감각
밤이 되면 같은 생각도 낮보다 더 길게 이어진다. 생각이 깊어져서라기보다 멈추지 않아서 그렇다. 밤에 길어지는 생각은 더 중요한 생각일까, 아니면 더 남겨진 생각일까.
낮에는 생각이 일을 닮아 있다. 밤이 되면 생각은 기억을 닮는다.
낮의 생각은 목적이 있고, 닫히고, 해결을 향한다. 밤의 생각은 목적이 없고, 길을 잃고, 굳이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다. 낮에는 생각이 길어질 틈이 없다. 해야 할 일이 생각을 대신하고, 말해야 할 문장이 생각을 앞질러 간다. 낮의 생각은 늘 어디를 향해 있고, 어떤 결론을 요구받는다. 밤이 되면 질서가 조금 느슨해진다. 불을 하나씩 끄고, 하루의 소음을 정리하고나면 생각은 더 이상 서둘 필요가 없다.
그래서일까. 같은 생각인데도 밤에는 유난히 길어진다. 밤의 생각은 낮처럼 목적을 갖지 않는다. 무언가를 해결하려 들지도 않고, 정리된 문장으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이미 지나간 장면을 천천히 다시 데려온다. 그때 하지 못한 말, 그냥 지나쳐 버린 얼굴, 의미를 붙이지 못했던 감정들이 밤 속에서 살곰살곰 기어다닌다. 뒤늦게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있잖아, 네가 스케쥴 바뀌어서 안 온 날, 평소처럼 오는 요일이길래 네가 좋아하는 두부졸임과 불고기를 해놨었어." 그날부터 지금까지 하지 않고 가둬뒀던 말을 슬쩍 혼잣말로 뱉는다. 잠자리에 누워서 하는 짓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앞으로의 일들을 미리 당겨오기도 한다. 이러니 생각은 밤에 길어질 수 밖에. 어제 일과 오늘 일과 내일 일까지 모두 몰려오니까. "아, 오늘 잊지 않으려고 초콜렛을 어제밤에 가방에 넣어두고 잤는데, 오늘 만났을 때 깜박 잊고 꺼내지도 않았네. 낼 모레 만나면 잊지 말고 꼭 줘야지." 뭐 이런 하찮은 것까지 끌어들여 생각을 어제에서 오늘로, 낼 모레까지 길게 늘어트린다. 밤에는 말이다.
나는 가끔 밤에 떠오른 생각이 낮보다 더 중요해서 이렇게 길어지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다 곧 고개를 젓는다. 중요해서가 아니라 낮에는 미처 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밤에야 비로소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패티 메이어 <생각하는 여자> 캔버스에 유채. 61 x 51cm. 그런디 아트 갤러리, 랭커셔주 블랙풀, 영국.
낮의 생각은 일을 닮아 있고, 밤의 생각은 기억을 닮아 있다. 꿈(어젯 밤 꿈 말고, 앞날의 희망)을 펼치기도 한다. 낮에는 생각이 나를 끌고 가지만, 밤에는 생각이 나에게 머문다. 밤의 생각은 결론 없이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뜬금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휙 돌아버리기도 한다. 무슨 영감을 받은 파생 작품도 아닌 것이 오랜 시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말하자면 저 위에 있는 "앞날"이라는 단어 말이다. 앞이라... 이상하다... 앞은 한자로 앞 前(전)인데, 前(전)날은 왜 앞날(미래)이 아니고 과거일까??? 훗날은 분명히 미래를 말하는 것이지. 그런데 後(후)는 뒤後(후)란 말이야. 왜 그럴까? "먼 훗날 우리 ♬" "앞날의 희망을 ♪" 앞날과 훗날이 같은 뜻이라니...(나는 기준 시점도 모르는 바보인가...)
밤이 되면 시계를 덜 보게 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생각이 어디쯤 와 있는지만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생각은 그저 흘러갈 수 있는 만큼 흘러간다("의식의 흐름"같은 거창한 것은 아니고).
가끔은 이미 끝난 하루를 다시 붙잡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굳이 다시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을 왜 또 떠올리는지 나 자신에게 묻기도 한다. 하지만 밤의 생각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 더 머물 수 있는 시간을 원할 뿐이다. 복권을 사고싶은데 어디서 파는지 몰라. 사람들이 쳐다보면 챙피해서 못 살거 같아. 그런데 복권에 당선되면 ㅇㅇ네도 듬뿍 주고, ㅇㅇ네도 주고, ㅇㅇ네도... 이런 헛된 꿈을 꾸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밤의 일이다. 복권이 당선되는 밤이면 나는 세상에서 최고로 인심좋은 기부왕이 된다.
밤에 길어지는 생각을 애써 줄이지 않기로 했다. 낮처럼 생산적일 필요도 없고, 말이 될 필요도 없다. 문장이 되지 못한 채 남아 있어도 괜찮은 생각들이 밤에 있다. 어쩌면, 생각은 언제나 밤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하루가 조용히 물러난 뒤에야 비로소 자기 속도를 찾는 것처럼. 여기서 "잦아"가 나를 다시 낚아챈다. "잦다"의 다양한, 상이한 쓰임. "잇따라 자주 있음"을 뜻할 때의 이미지는 매우 활발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잠잠해지고 가라앉는" 뜻일 때는 서서히 벌어지는 느린 느낌이다.
보이스 피싱에 걸리면 재물을 잃고, 언어의 낚시에 걸리면 까만 밤이 하얗게 밝아진다. 생각을 생각하는 글을 쓰다보니 참 재미있네!
PART 1 "사소한 장면들 – 생각이 열리는 순간"을 끝내며 나는 이 생각을 그대로 두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 한다. 생각은 혼자 있을 때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람과의 거리 속에서도 다시 시작될 테니까.
생각은 언제 사람과의 거리에서 시작되는가
6화. 생각은 언제 사람을 의식하기 시작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