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장면들 4화
사소한 장면들 - 생각이 열리는 순간
4화 - 꽃집 앞에서 발걸음이 느려질 때
꽃을 사지 않고도 꽃집 앞에 오래 서 있을 수 있다는 건 마음이 이미 어딘가를 향해 열려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아직 주어지지 않았고 받을 사람도 없고 행동으로 이어지지도 않았는데 감정은 이미 시작된다.
며칠 전, 대형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데 며느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퇴근길에 꽃을 싸게 팔길래 한 다발 샀다는 말이었다. 집에 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두고 가겠다고 했다. 정말 추운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 중간에 내려 우리 집까지 걸어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 자기 집으로 가는 버스를 한 번 더 타야 하는 거리.귀찮은 걸음을 떠올리니 꽃다발보다 먼저 그 장면이 마음에 남았다.
노란 튤립 봉오리 열 송이가 팝콘같은 안개꽃 다발 속에서 봉긋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튤립 향은 진하지 않았는데, 훅— 무언가가 가슴 안을 스치고 지나갔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며느리도 꽃집 앞을 지나면 괜히 꽃이 사고 싶어지는 걸까. 나처럼.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집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불이 꺼진 거실, 아무도 없는 공기. 그런데 한쪽에 꽃이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공간의 결이 달랐다. 꽃은 말을 하지 않는데 집 안에 남아 있는 기척처럼 느껴졌다. 잠깐 들렀다 간 며느리의 마음이 책상 위에 다소곳이 놓여있었다. 받는 사람을 마주하지 않아도 꽃은 이미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꽃다발을 가슴에 안았다. 화병을 찾지도 않고, 사진을 찍지도 않았다. 그저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서 있었다. 꽃집 앞에서 늘 그러듯이.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장미의 영혼> 1908. 캔버스에 유채. 88.3 x 59.1Cm. 개인수집.
생각해보면 나는 꽃집 앞에서 꽃을 사기보다 꽃을 보는 시간이 더 길다. 살 이유를 찾기보다는 서 있는 시간이 먼저다. 받을 사람이 떠오르지 않아도,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그 앞에서는 몸이 먼저 느려진다. 꽃은 늘 누군가를 전제로 한다. 축하, 위로, 기념 같은 말들이 꽃보다 먼저 따라붙는다.
그래서일까. 받을 사람이 없을 때 꽃은 더 망설여지는 물건이 된다. 꽃집 앞에 서는 순간은 자꾸 생긴다. 아마도 그때 마음은 아직 방향을 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고 싶은 마음이 아직 목적지를 찾지 못한 상태. 그 상태가 이상하게도 편안하다. 아무에게도 향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은 잠시 자기 자신에게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겐 늘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 누군가가 확실해서 그립고, 누군인지 몰라서 그냥 그리움만 동동 떠다니는 그 누군가는 평생을 나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꽃집 앞을 지날 때면 누군가에게 꽃 다발 한아름 안기고싶고, 공중전화부스가 눈에 띄면 얼른 달려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이제 괜히 마음이 바빠지던 공중전화부스는 눈에 띠지 않는다. 걸음을 잡아두는 꽃집은 더 많이 늘어났다.
며느리가 두고 간 꽃다발을 보며 나는 다시 생각을 했다. 그 아이도 퇴근길에 꽃집 앞에서 발걸음을 늦췄을 것이다. 누군가를 떠올리기 전에, 그저 꽃이 눈에 들어왔고 몸이 먼저 반응했을 것이다. 꽃을 사야겠다는 결심보다 멈추어 서 있는 시간이 먼저였을지도 모른다. 꽃다발이 선물이라기보다 하나의 장면처럼 느껴졌다. 꽃집 앞에서 마음이 먼저 열렸던 순간의 연장처럼.
꽃을 화병에 꽂고 잠시 창가에 두었다. 꽃을 중심으로 집 안이 조금 환해졌다.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마치 꽃집 앞을 지나며 잠시 멈췄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처럼.
결국 우리는 꽃을 사지 않아도 꽃 앞에서 마음을 연다. 주지 않아도 이미 무언가를 내어놓는다. 꽃집 앞에서 발걸음이 느려지는 이유는 꽃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의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꽃집 앞을 지나게 될 것이다. 아마 또 멈춰 서겠지. 살 생각이 없어도, 받을 사람이 없어도. 늘 그랬듯 발걸음이 조금 느려질 것이다. 내 안에 '누군가'라는 항아리가 자리잡고 있는 한, 나는 아마 꽃집 앞에서 계속 발걸음을 늦출 것이다.
사소한 장면 하나가 하루를 오래 붙잡는 날이 있다. 오늘 나에게 남은 장면은 꽃을 받는 순간이 아니라, 꽃을 두고 갔을 며느리의 발걸음이었다.
그 느려진 걸음이 내 하루를 조용히 어루만져 주었다. 생각은 그렇게 꽃집 앞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순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사소한 장면들 - 생각이 열리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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