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장면들 2화
비는 늘 내리기 전에 먼저 감정을 건드린다. 하늘이 낮아지고, 공기가 눅눅해지고, 아직 떨어지지 않은 물방울들이 공기 속에 미리 풀려 있는 날. 그런 날이면 마음이 이유 없이 가라앉는다. 아직 비는 오지 않았는데, 감정은 이미 젖어 있다. 말은 조금 느려지고, 하루의 윤곽은 흐려진다. 괜히 창밖을 자주 보게 되고, 아무 일도 없는데 하루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때의 가라앉음은 슬픔이라 부르기엔 너무 얕고, 우울이라 하기엔 아직 멀다. 다만 감정이 자기 무게를 찾는 중인 상태. 이 시간을 비가 오기 전의 마음이라고 부른다.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가라앉은 감정은 조금 다른 얼굴을 한다. 천천히, 눈치 보듯 내리는 비는 마음을 더 깊이 가라앉히지도, 그렇다고 끌어올리지도 않는다. 그저 가라앉아 있던 감정을 조용히 적신다.
이슬비 속에서는 생각이 길어진다. 문장은 돌아서 나오고, 기억은 쓸데없이 정직해진다. 그 시간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대개 지금과는 상관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미 지나간 일, 아직 오지 않은 일, 굳이 떠올릴 필요 없던 장면들.
(옛날 옛날 먼 옛날, 연애편지에 쓰는 이런 말이 있었지. 가라고 가랑비, 있으라고 이슬비, 보고싶어 보슬비, 지금 창 밖엔 보슬비가 내리네.… 연애편지를 대필도 하던 옛날 이야기.)
한여름 소나기가 내리면 감정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나는 부슬부슬한 비보다 소나기를 더 좋아한다. 갑작스럽고, 거칠고, 망설임 없이 쏟아지는 비. 비는 가라앉은 감정을 붙잡지 않는다. 소나기가 내리는 동안 마음은 더 이상 아래로 향하지 않는다. 잠시 방향을 잃어버린다.
비가 모든 소리를 덮어버리고, 세상은 잠깐 비의 속도에 맞춰진다. 감정은 생각할 틈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이럴 때면 아주 오래된 영화 한 장면이 떠오른다. <남과 여>에서 남자가 빗속을 달리던 장면. 말은 없고, 와이퍼 소리와 비만 화면을 채우던 순간. 남자는 자동차 경주 선수의 속도로 달린 것이 아니다. 여자를 향한 사랑의 속도로 달렸다. 열차를 따라잡은 것은 운전 실력이 아니고 사랑의 힘이 밀어부친 속도다. 열차보다 더 빠른.
(<남과 여>; 프랑스 영화. 1966년. 클로드 를루슈 감독, 아누크 에메, 장루이 트랭티냥 출연)
운전하는 사람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비가 쏟아지는 날 차를 타고 목적없이 어디론가 가는 것을 좋아한다. 비가 좋다. 눈보다 비가 더 좋다.
칠드 하삼 <비오는 한밤중> 1890. 캔버스에 유채, 54 × 46.4 cm. 휴스턴 미술관, 미국
비가 그치면 세상은 눈에 띄게 달라진다. 먼지가 씻겨 나간 거리, 윤곽이 또렷해진 나무들, 조금 가벼워진 공기. 변화는 마음에도 그대로 옮겨온다. 아무 이유 없이 가라앉아 있던 감정은 설명도 없이 어딘가로 사라진다. 돌아보면 가라앉았던 마음은 비 때문이 아니었다.
비가 오기 전부터 이미 시작된 상태였고, 비는 감정을 밀어 올리거나 씻어내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나는 이제 가라앉음을 굳이 밀어내지 않는다. 비가 오기 전의 마음은 곧 비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니까. 감정은 그렇게 스스로를 정리할 시간을 환경을 통해 요구한다.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가라앉는 시간은 삶의 오류가 아니다. 그건 비가 오기 전의 공기처럼 필요한 과정이다.때로는 한여름 소나기처럼 모든 것을 한 번에 바꾸기도 한다. 생각은 변화의 사이에서 열린다.
비가 오기 전에도, 비가 내리는 동안에도, 비가 그친 뒤에도. 감정은 늘 비보다 먼저 움직인다.
비는 왜 갑자기 내게로 왔을까? ‘비’에 대해 쓰겠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었었는데… 자판 위에 손을 올려놓으니 내 손가락은 이렇게 비를 얘기하네. 왜지?
아하! 안성기, 라디오스타, 비와 당신… 그렇게 비가 나를 찾아왔구나. 생각이란 참 묘하다. 비데오 필름 되감기처럼 뒤로도 잘 가고, 다시 돌리면 앞으로 씽 달려가고, 그리고(글 쓸 때 접속사를 자제하라고 하지만), 기억의 몇 조각 징검다리를 건너 이렇게 안성기의 죽음은 나에게 ‘비’로 내려왔다.
생각은 늘 문을 열고 있다.
사소한 장면들 - 생각이 열리는 순간
3화 오늘 하루에서 유독 기억나는 장면 하나 — 중요한 일보다 사소한 장면이 남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