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언제 시작되는가

사소한 장면들 1화

by morgen


사소한 장면들 - 생각이 열리는 순간

1화 생각은 언제 시작되는가 — 먼저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바깥이다


먼 먼 옛날, 영국집 문에 뚤려있던 조그마한 우편물 투입구, 바람은 그 작은 구멍으로 비집고 들어오느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대고, 마침내 들어오는 순간 관악기의 소리통을 뚫고 나오는 소리를 냈다. 목관 악기가 아닌 금관악기 소리다. 그 바람소리가 멀리 떨어진 이곳에, 훌쩍 흘러간 세월을 쫓아와 지금 여기에 또 들려온다. 아니, 관악기 소리가 아닌 너무 팽팽하게 조율된 현악기의 비명인가? 현들이 불협화음의 소리를 지르고 있다.


생각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거의 없다.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어떤 환경이 먼저 나를 건드리고 그 다음에야 생각이 따라온다.


겨울의 끝자락에(봄의 첫머리는 아니다) 길섶의 흙에 좁쌀만한 초록색이 눈에 띄면 저절로 허리를 굽혀 가까이 바라보게 된다. '무얼까, 벌써?' 이런 생각은 땅쪽으로 몸은 낮춘 후에야 따라온다. '새싹'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꽃이 피는 계절에는 괜히 마음이 먼저 열린다. 아무 이유도 없이 걸음이 느려지고, 주변을 조금 더 오래 보게 된다. 갑자기 모든 것이 소중해지는 순간이다. 나는 아직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다만 웃고 있다. 그 시간에는 멀리서 들리는 소음이 하나의 소리로 뭉개진다. 소리를 들으며 생각이 시작됐다는 걸 나중에야 안다.

낙엽이 쌓인 길에서는 문장이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꾸만 돌아서고, 불필요한 말을 붙잡고 늘어진다. 마치 계절을 붙잡아두려는 듯. '가을, 너는 좀 더 내 곁에 있어야 해. 천천히, 느리게 가야 해.' 그럴 때 쓰는 글은 대체로 길고, 조금 쓸쓸하다. 계절이 먼저 문장의 방향을 정해버리고 나를 이끈다. (가을은 왜 빨리 가면 안되는가? 가을은 왜 느리게 가야하는가?)

첫눈이 오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진다.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지금의 이 감각을 누군가와 나누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아서. 눈이 금방 녹으면 안돼. 첫눈의 '첫'자에 힘이 빠지면 안돼. 그런 날에는 생각이 문장이 되기 전에 이미 감정이 먼저 움직인다.

가끔 꽃집 앞에서 이유 없이 멈춰 선다. 받을 사람이 없는 꽃인데도 한 다발 사고 싶어진다.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설명하려는 순간 감정이 금방 시들어버릴 것 같아서다.


생각은 늘 이렇게 시작된다. 의미나 주제에서가 아니라, 빛의 각도나 공기의 온도 같은 것에서.
우리가 중요하다고 부르는 것들은 대개 나중에 붙여진 이름들이다.


창가의 여인.jpg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창가의 여인> 1822. 캔버스에 유채, 44×37cm. 베를린 국립미술관, 독일


따뜻한 차에서 올라오는 향은 문장을 앞으로 밀지 않는다. 잠시 멈추게 한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문장을 쓰기 전에 늘 환경에 먼저 반응한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너무 낮으면 문장이 조심스러워지고, 비가 오는 날에는 괜히 과거를 더 들여다보게 된다.

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생각의 방향을 이미 정해놓는다. ‘무엇을 쓸까’보다 ‘지금 어떤 상태인가’를 더 자주 묻는다. 지금 이 계절에서, 이 빛 아래서, 이 공기를 마시며 나는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가.


우리는 흔히 생각을 능동적인 것이라 여기지만, 사실 생각은 대부분 반응이다. 먼저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바깥이다. 바깥이 조용히 문을 두드리면, 그제야 생각이 안에서 일어난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감각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환경이 열어놓은 틈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오늘도 나는 어떤 생각을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는다. 다만 창밖을 보고, 계절을 느끼고, 잠시 멈춘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생각은 이미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흔들릴 생각도 않고있는 나무에게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멍하니 있는 나를 건드려 생각을 깨우는 것은 바깥이다.

바람이 우우우웅~ 소리까지 내며 달려오면 나무는 우선 가지부터 움직인다. 그렇게 생각은 밖에서 건드리는 환경에 따라 시작이 된다. 생각은 늘 사소한 곳에서 시작된다. 그 사소함 덕분에 나는 문장을 쓸 수 있다.

저, 바람 소리, 바람이 달리는 소리일까, 나무가 우는 소리일까, 아니, 깊은 밤 숲속에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인가.



큰 계획도 없이 그냥 '생각'에 대해서 쓰려고 합니다.

자료 찾는 수고도 필요없고, 억지로 생각을 끄집어 내느라 애쓰지 않고, 그냥 편안한 글이 쓰고싶어서요. 생각보다 먼저 자판위의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여질지도 모르죠. 머리가 시키는 대로가 아니라 손가락이 자판을 두드리는 대로 한 번 맡겨보려고요. 그냥 그렇게 해보려고요. 이러다보니 '그냥'만 남발할지도 모르겠네요.

글이 너무 짧은 것같아 그림 한 점 곁들일까 합니다. 짧지만 긴 여운으로 남기는 글을 쓸 재주는 없을테니 그림이라도 곁들이려고요.



1부 사소한 장면들 - 생각이 열리는 순간

2화 아무 이유없이 마음이 가라앉는 시간

—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정체 - 비, 흐린 오후, 갑자기 느려진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