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장면들 3화
오늘 하루에는 굳이 적어둘 만한 개인적인 사건이 없다. 해야 할 일에 게으름을 부렸지만, 그럭저럭 시간은 큰 굴곡 없이 흘러간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오늘 발행할 연재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침에 이불 속에서 들은 어제 뉴스가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어젠 종일 밖에 나가 있어서 뉴스를 열어보지 않았었다.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자신의 위법에 대한 질문에 피청문자인 어머니의 답변이 자꾸만 나를 붙들고 있다. 성인이 된 아들의 사생활에 대해 술술 다 풀어놓은 어머니. 단순히 아들 한 사람의 사생활뿐이 아니라 며느리의 사생활이기도 하다.
나는 정치 고관여자는 아니다. 정치적인 평론이나, 사회적인 비판이나 그런 시각으로 청문회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피청문자의 자질이나 자격을 판단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식 셋을 키운 한 어머니로서 가슴 속에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작은 분노를 내비칠 뿐이다.
'인사 청문회'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국회의원들이 국민을 대신하여 질문을 하는 자리,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가, 그런데 나는 정책이나 능력의 문제로 듣지 못했다. 사소할 수도 있는 작은 부분만이 머리 속에 똬리를 틀고 남아있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이 멈췄다. 성인이 된 아들은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사적인 영역은 공적인 자리에서 어머니의 입을 통해 설명되었다. 결혼한 아들이니 며느리까지 덩달아 사생활이 노출된 것이다. 설명의 옳고 그름보다 그 순간의 어긋남을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문득 오래전 풍경 하나가 떠올랐다. 한국에서는 아들을 낳아 첫돌이 되면 발가벗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집안에 걸어두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의 몸은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자랑의 대상이었고, 사적인 경계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개념이었다.
사진 속 아이들은 자라 어른이 되었다. 그동안 흐른 시간이 쌓여 세월이 되었고, 더이상 발가벗은 아들의 사진을 벽에 걸어놓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자식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인권을 부모라고해서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되는 세상이다.
메리 카사트 <어머니와 아이 (타원형 거울)> 1899. 캔버스에 유채. 81.6 x 65.7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5번가 774번 갤러리 전시중.
메리 카사트의 그림 속에서 아이의 몸은 숨겨지지 않는다. 아이의 부끄러운 곳까지 드러난 채,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있다. 그 장면은 보호의 몸짓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한 노출이다. 노출은 아이를 세상에 내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한 노출처럼 보인다.
카사트의 아이는 보여지기 위해 벗겨진 것이 아니라 함께 있기 위해 드러나 있다. 시선은 관계 안에 머문다.
요즘에는 부모가 올린 자녀의 사진을 두고 자식이 초상권 침해를 이유로 법적 대응에 나서는 일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오스트리아에서는 한 10대 청소년이 자신이 어릴 때부터 SNS에 올라온 사진 때문에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낸 사례가 있다. 또 다른 경우에는 18살의 여성이 부모가 500여 장의 어린 시절 영상을 동의 없이 공유했다며
개인권 침해를 문제 삼았다는 보도도 있다. 자녀가 자신의 사진이나 영상을 무단으로 공개한 부모에게 삭제를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는 권리 논의가 활발하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어릴 적에는 사랑의 기록이었던 사진이 시간이 흐른 뒤에는 동의되지 않은 노출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부모는 본의 아니게 사생활 침해자가 되고 만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경계는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인사청문회'라는 공적인 공간에서 어머니가 말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 관계만이 아니라 독립된 한 인간의 사적인 역사다. 그 말들은 어머니를 변호하였고, 아들을 노출시켰다. 피청문자의 답변이 틀렸다고 몰아부칠 이유는 없다. 답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아들과 며느리는- 며느리의 친정까지 포함하여-공개방송에서 나라 방방곡곡에 울려퍼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어머니는 사전에 아들 며느리에게 '내가 할 수 없이 이러이러하게 답변을 할테니 너희들이 양해해 달라'고 동의를 구하긴 한 걸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여기 브런치에 발행된 글들에서도 시어머니의 만행을 적은 글들은 무수히 많다. 독자들은 글을 읽으며 함께 분노하고, 시어머니에게 마구 비난의 화살을 쏜다. 오늘 피청문자의 며느리가 브런치에 글을 쓴다면 그 글은 어떤 글이 될까? 독자들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까? 어머니 답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식의 일을 그렇게 노출시키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을 뿐이다.
아내들은 남들에게 자신의 답답함을 하소연할겸 측근에게 남편의 흉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자식의 흉을 털어놓지 않는다. 남들앞에 발설하지 않고 꽁꽁 숨긴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어떤 불이익을 당하드라도 내 자식의 낯빛이 흐려질 이야기는 꺼내놓지 않는다. 이것이 특별할 것도 없는 보통의 어머니상이다. 덮어주고 감싸주고 보호해주는 사람. 세상이 뭐라해도 나를 안아주는 사람이 바로 어머니이다. 심지어는 아버지에게까지도 자식의 잘못을 감추고 들키지 않게 같이 속여주는 것이 바로 어머니 아닌가.
이제는 다 공개된 거짓말이지만, 아들이 아직 자고있는 이른 아침에 남편이 전화를 걸어오면 나는 아들을 깨워 바꿔주지 않고(늦잠자는 것 아버지한테 탄로나니까) 지금 목욕중이라 바꿀 수 없다고 했다. 고백하자면 이런 거짓말을 얼마나 여러 번 하며 살았는지... 그저 어머니인 죄(?)로.
피청문자의 정치적 역량, 정책의 우수성, 그런 것을 따질 것도 없이, 나는 한 어머니로서 자식을 보호할 줄 모르는 그 어머니에게 분노한다. 모든 답변이 다 성실한 진실이라해도, 어머니로서 그렇게 답하면 안된다. 아들내외의 불화를 공개된 마이크를 통해 그렇게 다 발설하면 장관으로서의 자질 이전에 어머니로서의 자질도 많이 부족한 여자일 뿐이다.
나라의 중요한 이슈인 청문회 뉴스를 보면서 참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성숙한 사회인으로서가 아닌 평범한 어머니의 시선으로만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기억은 언제나 이렇게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긴 것과 다른 곳에 머문다. 어쩌면 기억은 사건이 아니라 경계에서 만들어지는지도 모른다. 말해도 되는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할 것 사이, 보여도 되는 것과 감춰야 할 것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멈춘다. 그 멈춤이 하루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남는다.
오늘 나에게 남은 장면은 어머니가 말하고 있었고, 아들내외는 말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이었다. 아들은 내일도 모레도 직장에 출근을 하여 동료들과 얼굴을 맞대야 한다. 동료들은 그가 아내와의 불화로 지금도 병원치료를 받는 남자라고 측은하게 여길 것이다. 며느리는 어디에 나서든 부부간에 불화를 일으킨 아내라는 눈총을 견뎌야 할 것이다.
중요한 일보다 사소한 장면이 기억나는 날이다. 판단 대신 질문이 남고, 질문은 쉽게 닫히지 않는다.
이 글은 정치적인 발언이 아니라, 한 어머니로서 다른 어머니를 본 시선을 적은 것입니다. 오해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사소한 장면들 - 생각이 열리는 순간
4화 - 꽃집 앞에서 발걸음이 느려질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