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 준비생 가이드 [4] 채점자의 결핍을 노리자
대책이 없다. 주제도 예측 불가, 형식도 자유롭다. 차라리 범주를 줄여줬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도 않다. 뜬금없이, 맥락도 없이 ‘지하철’이다. 논술 시험이 끝나고 좀 한숨 돌렸나 싶은데 ‘섬’에 대해서 쓰란다. 우린 평생 도시에 살았는데. 차라리 ‘봄’, ‘여름’ 등 계절이 주제어로 나오면 좀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물들다’는 또 뭔가. 언론사 작문 시험에 대한 이야기다.
논술 시험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언론사는 왜 작문까지 보는 걸까? 수험생도 채점자도 피곤한 일인데 말이다. 물론 모든 언론사가 작문을 보는 것은 아니다. 방송사들은 대부분 생략한다. 신문사 중에서도 전문지보단 종합지에서 실시한다. 말보단 글에 비중을 더 두면서 사회 전반을 다루는 종합지의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논술 하나로도 어느 정도 응시자의 수준을 가늠할 순 있다. 기자는 논리 대 논리로 취재원과 맞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취재한 사실을 무리가 없도록 기사로 적어내는 것이 주된 업무이다. 때문에 논리 글쓰기, 논술이 더 중요한 건 분명하다. 더군다나 한국처럼 논리보다 감정이 강한 사회에선 기자들에게 더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글쓰기의 진검 승부는 작문에서 가려진다는 점에서 이는 불가피하다. 물론 배점은 논술이 더 큰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작문은 예측불가능성과 형식의 자유 때문에 응시자의 글쓰기 능력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종합지 입장에선 버릴 수 없는 카드다. 선배들은 작문을 보면 그 사람이 세상을 보는 감수성 뿐만 아니라 온도, 관찰력, 논리, 문장력, 독창성, 독서력 등을 보다 쉽게 알 수 있다고 한다.
과연 그렇다. 필기시험 쯤은 이제 높은 승률로 통과하는 장수생들도 가끔 미끄러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대부분 작문에서 허점을 보였기 때문이다. 논술은 연습을 통해 통제가 가능해지는 순간이 온다. 논제는 대강 예측이 가능하지 않은가. 종합지 중 절반 이상은 구체적 현안에 대한 찬반을 묻는다. 전문지들은 더 그렇다. 해당 전문지가 당시 가장 관심을 두고 보도하는 전문 분야 주제가 주로 출제된다. 유형 학습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작문은 그렇지 않다. 때문에 글쓰기를 좋아하거나, 주변에서 글 좀 쓴다는 평가를 듣는 응시자의 경우 종합지 작문 시험에서 뜻밖의 위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저 친구는 별로 공부도 안 한 것 같은데 어떻게 붙었지?’ 싶을 때가 대부분 그렇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리고 약간은 불공평하게도 채점자들은 이런 친구들을 더 좋아한다.
우선 언론판을 잘 모른다는 것 자체가 장점일 수 있다. (선배 기자들은 백지 상태의 지원자들을 더 좋아한다. 언론에 대한 편견이 없다보니 가르치기 좋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흡수력도 좋다고 본다.) 거기에다 문장력도 뛰어나고 독창적인 시선까지 타고났으니 탐낼 수 밖에 없다. 이는 언론사가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 신입을 뽑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를 바꿔 말하면 연습으로 다져져 현장에서 한 호흡에 큰 고심없이 써내려간 논술에 대해선 큰 신뢰를 보내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실성’엔 점수를 줄 순 있지만 아웃라이어가 아닌 이상 논술에서 편차가 크지 않다. 더불어 기자에게 필요한 설명하기 힘든 어떤 ‘성정’이나 ‘기지’를 평가하기엔 논술만으론 한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보건대, 작문을 잘 쓰는 응시자들이 향후 기자가 됐을 때 르포 기사에서 잠재력을 터뜨릴 가능성이 높다. 르포 기사는 가장 쓰기 힘든 기사 유형에 속한다. 르포를 잘 쓰는 기자가 좋은 기자란 말에 동감한다. 르포 기사의 정점을 보고 싶다면 <한겨레> 박유리 기자가 쓴 르포 기사를 검색해보길 바란다.)
문제는 작문은 공부를 한다고 해도 일정 수준을 단기간에 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연습한다고 누구나 김훈 작가가 될 순 없는 것 아닌가. 그런 글을 연습을 통해 현장에서 써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 역시 그래서 작문이 가장 어려웠다. 일정 수준 근처에 빠른 시간 안에 닿고 싶은데, 가진 능력 자체가 부족하다보니 늘 한계에 부딪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작문 주제가 평소에 연습해둔 것이거나 그 언저리에서 출제되길 바라는 정도였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난 합격했다. 시험은 역시 운이 팔할이 넘는다. 이는 언론사가 반드시 김훈 수준의 에세이을 원하는 것은 아님을 반대로 증명한다. 아주 평범한 수준에서, 약간의 독특한 시선을 얹으면 충분히 필기 정도는 통과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가장 들기 쉬운 주제가 무엇이 있을까. ‘별’이라는 주제가 주어졌다고 해보자.
(내가 이 글에서 논하려고 하는 작문 형태는 일반적인 에세이다. 시나리오나 소설, 서간문 등의 형식으로 쓴 한편의 문학작품에 가까운 작문에 대해서 난 이야기할 수가 없다. 능력이 안되기 때문이다. 기회가 있어 이들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기자 지망생 중에 문학을 해야하는 사람들 정말 많다. 너무 잘 쓴다. 그런 작문만큼은 범접 불가다.)
'별'을 받아들고 펜을 바로 집어드는 수험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일순간 시험장에 ‘하~~’라는 탄식이 흘러나오며 많은 수험생이 천장을 바라보거나 하릴없이 펜을 돌려보며 얼마간 무의미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초침은 흐르고 마음은 급해진다. 그럴 땐 역시 우리 뇌 속에 선험적이거나 경험적으로 체득된, 자주 읽거나 경험한 서사를 떠올리게 된다.
이럴 경우 크게 지극히 평범한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해보자. 어린 시절 별을 보던 기억을 감수성이 묻어나는 문체와 묘사에 담아 서술하다가 마지막 문단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보존하자고 역설하는 것. ‘별=스타’란 점에 착안해 셀레브리티, 유명인으로 연결시키고 화려하게 빛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강조하는 내용. 황순원의 <별>이나 윤동주 시에서 나오는 별의 이미지를 차용해 문학적 소양을 드러내면서 이를 사회적 메시지로 승화시키는 것.
세 경우 모두 필기를 통과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엔 작문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문이라 할 수 있는 독창성 영역에서 큰 점수를 받기 어렵다. 때문에 문장력으로 승부를 봐야하는데, 문제는 이런 글들을 채점자들이 대개 지루해한다는 데 있다. 그러다 예컨대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다’라는 첫 문장을 만나면 기대감을 살짝 품게 된다. 그러다 응시자가 어릴 적 별 관찰기를 별의 탄생과 소멸기와 접목해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이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통찰을 사회적 메시지로 끌어올리는 글을 보면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그것은 기자들(혹은 채점자들) 대부분이 이른바 ‘문과’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지금이나, 혹은 어느 한때 문장 좀 쓴다는 소리를 들었던 베테랑이다. '문장 좀 쓴다는 사람들'이 곧잘 범하는 오류들, 예컨대 화려한 수식어로 생각의 빈곤함을 덮는 등의 교묘한 기술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현장에서 10년 이상 구른 이들은 그런 비어있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원자들 역시 대부분이 ‘문과’ 출신이다 보니 쓰는 답안들이 일정한 유형 안에 갇힐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서로가 지겨워지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면서도 의미 있는 정보와 통찰을 전해주는 글을 자연스레 좋아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그 부분을 겨냥하면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자연과학 공부를 열심히 하자는 뜻은 아니다.
앞서 논술문을 검토할 때 설명했듯, 다른 영역에서 싸워야한다는 것이다. 나도 잘 하지 못하면서 이런 이야기하기가 민망하지만, 채점자들의 성향을 이해하고 실전에 임하자는 말 정도로 받아들여줬으면 한다. 채점자들의 결핍을 알고 승부를 보자는 의미다. 다시 말해 요즘 말로 ‘힙’한 학문, 인용, 설명, 통찰이 담긴 문장으로 글을 완성하면 필기 합격으로 가는 길이 쉬워질 거란 뜻이다.
그에 관한 자세한 방법은 다른 포스팅에서 설명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