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 준비생 가이드 [5] 기존 해석틀에 갇히지 말자
작문 시험의 불가피함과 그 대처 방안에 대한 대강의 설명은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다. 이번엔 실제 출제된 주제를 가지고 검토해보자. 2014년 <동아일보> 작문이다. 주제는 ‘역지사지’다. 과거 사례를 보면 2013년 ‘화장(化粧)’, 2016년 ‘올림픽’, 2017년 ‘3분 뒤에 내가 있는 곳에 핵폭탄이 떨어진다는 경보가 발령됐다. 마지막 3분 동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1600자, 90분) 출제 경향을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저 순발력을 발휘해 상황에 맞게 대처해야 한다.
(다만 상식 시험을 실무 면접으로 돌리는 <동아일보> 전형 특성상, 2013년의 ‘화장’을 ‘Make-up’이 아닌 다른 뜻으로 해석해 답안을 작성했을 경우 어떤 평가를 받았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분명히 한자로 ‘化粧’이라고 명기해뒀기 때문에 이를 잘못 이해하고 글을 써냈을 경우 적어도 감점 요인이 됐을 것이다.)
우선 내가 현장에서 쓴 답안을 검토해보자.
주제 : 역지사지
제목 : 문학, 가장 아름다운 역지사지의 예술
멀리서 보면 풍경이지만, 가까이에선 삶의 매 챕터가 치열한 생존의 뻘밭이다. 이는 20대 후반 찾아온 뒤늦은 실감이다. 그동안 나는 줄곧 구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한가한 도시민의 눈으로 낙후된 농촌과 저개발국의 풍경을 ‘관람’했다. 저기,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보인다. 아래로 치닫는 중력에 저항할 힘을 잃어버리신 듯 보인다. 그러나 더 이상 이는 내게 한가한 풍경이 아니다. 밥을 벌고, 그로써 삶을 버텨내는 엄정한 삶의 실체다.
내가 지팡이에 몸을 기댄 할머니의 눈으로 조금이나마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은 팔할이 문학 덕분이었다. 문학은 타인의 고통에 감응해 쓰인다. 그랬을 때 비로소 위대한 문학이 탄생한다. 작가는 내가 아닌 타인, 그러니까 다른 캐릭터를 상상해 창조하고 거기에 자신을 이입해 사건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그것을 읽으면서 간접적으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이내 공감하고 질문하게 된다. ‘내 주변에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들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본디 윤리학의 근본 질문이 아닌가. 문학이 숭고해지는 순간은 ‘가해자vs피해자’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윤리학적 딜레마를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타인의 마음을 이해해보는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역지사지의 예술이 될 수 있다. 역지사지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문학을 통해 새로 뜬 눈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면 세상의 허다한 ‘단언’과 ‘단정’이 얼마나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알게 된다. 2012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모옌은 <개구리>에서 60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이야기를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그렇게 칼 같이 나눌 수 있냐고 집요하게 묻는다. 성석제 작가는 최근 출간한 장편소설 <투명 인간>에서 한국의 근대화가 과연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볼 수 있는지 물었다. ‘투명인간’처럼 잘 보이진 않지만 1인분의 삶을 충실히 살아낸 주인공 ‘만수’와 같은 인물들도 중요한 역할을 해내지 않았냐는 것이다.
나는 <개구리>로 가해자의 입장이 되어보고, 혹시나 피해자로 나 자신을 둔갑해 타인을 손가락질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됐다. <투명인간>으로 시금치와 가지, 나물을 좌판에 벌여놓고 장사하는 역전 할머니의 노곤한 삶 앞에도 고개를 숙이게 됐다. 이렇게 나는 문학을 경유해 너로 넘어가 타인을 이해해 보려했고, 더 나은 삶과 사회를 고민할 수 있었다.
이 세계는 사태를 해석하는 나름의 판단 체계를 구비해두고 있다. 예컨대, 법률적 판단, 경제적 판단, 정치적 판단, 종교적 판단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삶은 심연이기에 이 공식적 판단체계로는 인간사 진실을 모두 수습해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이해하기 위한 마지막 도구로 문학적 판단을 선택한다. 그렇게 마지막 진실을 구해낸다. 그래서 나는 문학을 읽는다. 그래서 나는 문학을 사랑한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역지사지로 타인을 이해해보려는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예술행위다.
무난한 글이라고 판단한다. 튀지도 않고 그다지 가려지지도 않는 글. 보다시피 작문에서 흔히 기대할 수 있는 독창성은 없다. 젊은 응시자만의 신선한 관점이나 감수성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놀라운 건 어찌 됐든 이 정도만 쓰면 작문은 통과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놀랐다. 그러니까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린 김훈이 아니지만, 기자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용기를 잃지 말길 바란다.
<동아일보>는 보통 감독관이 밀봉한 봉투에서 작문 주제가 적힌 A4 용지를 꺼낸 뒤 칠판에 테이프로 붙인다. 일순간 현장에서 ‘아~~’하는 탄성이 나온다. 그 탄성이 그리 작진 않았는지 다른 고사장에서도 시차를 두고 새어나온다. 다들 비슷한 감정이라는 뜻이다. 역지사지가 나올지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럼에도 역지사지는 수험생에게 그나마 쉬운 주제였다고 생각한다. 2013년 ‘화장(化粧)’처럼 범위가 제한적이지도 않았다. 자신이 해석하는 방향에 따라 어떤 경험이든 역지사지에 맞춰 쓸 수 있었다. 평소 역지사지와 비슷한 부류의 주제로, 예컨대 ‘경청’, ‘오해’, ‘눈물’, ‘행복’ 등으로 연습을 해둔 글을 조금만 비틀어서 역지사지에 맞게 수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그럴 경우 독창성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어떻게 써야할까. 현장에서 나 역시 도무지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주제가 역지사지. 글이 상투적이 되기 쉽다. 교훈적인 내용으로 맺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만은 피하자. 과거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섰던 경험, 봉사나 기부 등은 녹이지는 말자. 상당수 지원자가 그런 경험을 쓸 것 같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당시 읽었던 장편소설 두 권이었다. 그 감동을 역지사지라는 키워드로 맞춰서 풀면 될 것 같았다.
다시 쓰라면 이렇게 쓰지 않을 것이다. 앞선 글에서 밝힌 것처럼 자연과학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역지사지를 해석했을 것이다.
우선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일을 하다 쌍방의 고집 때문에 틀어진 경험을 간략히 서술한다. 이어 최근 뇌과학에서 밝혀낸 ‘0.5초 지연’ 현상으로 기억과 감각, 자아에 대한 해석이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음을 설명한다. 결론에선 잘못을 알고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뇌신경학적인 자기기만임을 인정하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역지사지라고 풀었을 것이다.
또는 정반대로 눈을 돌려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던 사례를 언급한다. 진화생물학 관점에서 내가 이 땅에 태어나 발 딛고 설 수 있게 만들어준 자연에 감사함을 우선 밝히고, 우연과 필연으로 논의를 확장해 그 박탈감을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를 동원해 풀어나갔을 것이다.
앞선 글에서 강조했듯 자연과학적 통찰이 작문의 모범이 되어줄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이미 학문의 대세가 인문사회학에서 자연과학으로 넘어간 지 오래이니 보다 ‘힙’한 학문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채점자들의 결핍 혹은 갈증 또한 여기에 있으니 작문 주제를 해석할 때 사용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글이 한층 풍부해질 것이라는 점을 제안하고 싶었다.
물론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유감없이 펼쳐 상대방의 마음을 가져가는 글을 쓸 수도 있겠지만, 난 단지 그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한 영역에 설 수 있는 방법을 말해보고 싶었다. 그것이 꼭 자연과학적 통찰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다만 기존의 문사철에만 머물진 않길 바란다는 뜻이다. 그것이 당신의 평범한 답안에서 약간의 독창성을 가미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효과적인 길이라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글쓰기 강의에서 작문은 나 자신 혹은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유심히 관찰하고 여기서 얻은 통찰 혹은 새로운 관점을 사회적 시선으로 확장하며 끝을 맺으라고 조언한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런데 내가 선배들과 출연한 한 ‘글쓰기’ 관련 팟캐스트에서 선배들(실제 채점위원이었다)은 이렇게 지적했다. 나 역시도 새겨둘만한 비판이었다. 자기 사례에 과도하게 빠져들게 될 위험성!
채점을 하다보니 출제자들의 글이 너무나 신변잡기에만 머문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사례가 자신에게만 특별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응시자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는 것, 더 중요하게는 이를 사회적 메시지로 옮기는 과정에서 논리의 비약이 자주 생긴다는 것이다.
나는 “요즘 언론사 준비생들 뿐만 아니라 취업 준비생들의 삶이 너무 힘들다. 그래서 그런 것 같다”고 답변했지만 선배들의 지적은 타당하다. 이 작문이 ‘기자의 글쓰기’라는 점에서 말이다. 자신의 경험이 극적으로 다가온다고 해도, 그 안에서 머물거나 빠져들지 말고, 객관을 유지하는 것은 작문에도 필요하다. 그러니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짧게 요약하고 이를 새로운 세계관으로 해석하는 데 더 비중을 두면 이같은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 자신도 부끄럽다. 감각이 둔한 나는 일상에서 새로운 느낌을 잘 받지 못하기도 하고 곧잘 잊어버리기까지 한다. 예술 작품을 좋아하고, 해당 분야에서 3년간 일까지 했음에도, 여전히 ‘아! 그렇구나’ 수준에 머문다. 그래서 나 자신이 답답할 때가 많다.
와중에 세상을 보는 논리적이면서도 사실에 입각한, 그러면서도 기존의 인문학적 성찰에 신빙성까지 부여해주는 새로운 세계관이 등장했다. 이것이 자연과학에 국한된 현상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취향에 맞게 새로운 영역을 자신만의 준거점으로 가져가보자는 뜻이다. 기자의 글쓰기는 개인의 사연을 나열하기만 해서는 곤란하고, 더불어 기존 해석을 되풀이하는 것 역시 상투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실전 사례를 통해 이를 더 검토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