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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니에드만 May 05. 2018

<폴란드4> 읽지 못할 쿤데라

이제 막 퇴사한 前 신문기자의 폴란드 여행기 4.

새벽부터 일어나 폴스키 버스로 왕복6시간.


폴란드 최대 가톨릭 성지이자 영혼의 안식처라 불리는 쳉스트호바에 다녀왔다. 바로 이 ‘다녀왔다’란 말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체력, 시간, 돈을 필요 이상으로 투자했던가. 녹초가 됐다. 사실 나뿐 아니라 우리나라 여행(여기선 '관광'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겠다) 대다수는 유명지에 ‘가봤다’란 말을 주변에 하기 위해 그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쳉스트호바를 다녀오면서 이번 여행만큼은 그러지 말자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아무리 입소문이 많이 난 곳이라도 내 마음을 흔드는 구석이 없다면 가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처럼 폴란드를 겪어 보자고 생각했었다. 작품에서 패터슨(애덤 드라이버)은 아직 등단하지 않은 시인이자 성실한 버스 운전수로 나온다. 어제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오늘이 연속되는 일상이지만, 그는 거리의 말과 빛깔을 섬기며 ‘시’를 찾아낸다.


물론 내가 아무리 걸어도 ‘시’를 발견하진 못하겠지만 구시가를 또 걸어보았다면, 그 골목들이 새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장기 여행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바르샤바 대학 인근의 'LIBER'서점 전경 ⓒ토니 에드만

지친 마음을 달래려 서점에 들렀다. 바르샤바엔 골목길마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서점들이 흩어져 있다. 한국에서 읽었던 신간들도 제법 이곳 폴란드 장정들로 만날 수 있었다. 바르샤바가 여전히 낯설다보니 긴장이 좀체 풀리지 않고 있지만 이런 만남의 순간만큼은 마음이 다소 가라앉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의 느슨한 연대감 같은 것이 분명히 작용하기 때문이리라.

바르샤바 신시가 일대 한 서점 ⓒ 토니 에드만

한국에서도 지난해 출간돼 큰 반향을 일으켰던 J.D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는 방문하는 서점마다 가장 눈이 많이 가는 곳에 놓여 있었다. 매해 노벨상 후보에 오르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들도 인기다. 지난해 인상깊게 읽었던 콜슨 화이트헤드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이곳에서 발견한 건 정말 뜻밖이었다. 이 소설은 한국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지난해 소설 부문 최고의 책으로 꼽혀도 손색없을 정도로 탁월한 작품이었다.

폴란드판 J.D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

놀라웠던 건 이곳에서도 페란테 Fever(페란테 열병)가 불고 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 은둔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이 모두 번역돼 있었다. 헨닝 만켈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 역시 훌륭한 에세이지만 한국에서 조명받지 못했는데, 북유럽 대표 작가답게 폴란드에선 당당히 그의 작품들이 매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엠마누엘 카레르의 <리모노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르샤바 폭격을 주제로 한 영화 <피아니스트>를 연출한 폴란드 거장 로만 폴란스키의 전기, 폴란드 사회학의 거장 지그문트 바우만의 대표작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밖에도 별도의 설명이 필요없는 전 세계 베스트셀러 저자들, 예컨대 스티븐 핑커, 줄리언 반스, 올리버 색스, 오르한 파묵, 에릭 홉스봄, 토니 주드 등의 대표작들 역시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북유럽 대표작가 헨닝 만켈의 책이 전시돼있는 모습 ⓒ토니 에드만

난 그 중에서 밀란 쿤데라의 <커튼>을 샀다. 25즈워티, 한국 돈으로 8000원, 저렴한 편이었다. 물론 폴란드판이라 읽진 못한다. 그저 소장용이다. 해외 나갈 때마다 그 나라 판본으로 나온 쿤데라 작품을 한 권씩 사왔다. 실용적으론 전혀 무익한 취미지만 돈이 크게 들지 않으니, 소소한 덕심을 발휘하는 데 큰 무리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어린 왕자>를 각 나라별로 수집한다고 한다. 난 쿤데라의 작품들을 모은다. 지금까지 11개국 판본을 샀다. 30개국이 목표다.

밀란 쿤데라의 폴란드판 <커튼>, 25즈워티로 구매했다 ⓒ토니에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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