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다. 먹구름이 가득 껴있고, 사용되는 색채 또한 어둡고 무거운 계열의 색들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어딘가로 걸어가는 듯하고, 말과 마차가 있는 걸 보아 무언가 짐을 나르고 있거나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침침한 분위기 속에서 한 가지 눈여겨 볼만한 점은 작품 정중앙에 있는 빛이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에서 유일하게 먹구름이 끼지 않은 곳이다. 그리고 좌측에 있는 조그마한 배와 마차, 말, 사람은 모두 저 유일하게 밝은 곳을 향하여 가고 있는 듯하다. 노동의 고단함과 파도의 풍파, 육체의 피곤함을 모두 짊어지고 이들은 왜 밝은 곳을 향하여 가고 있는 걸까. 저곳에 가면 반드시 이 짐들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을 거라는 장담을 할 수 있는 걸까? 저곳이 실제로 좋은 곳이든, 그렇지 않든, 자신의 삶과 처지를 변화시키려는 모든 노력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불확실한 미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대 가운데 끊임없이 가늠하고 예측하고 나아가는 모든 행위는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려는 숭고한 것들이다. 나는 어떤 것을 바라보고 오늘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문득 지금 내 모습을 돌아보고 점검하게 만든다.
그림 속 시간대를 추정한다면, 어느 때쯤 될까? 생각해 보건대 이른 아침 혹은 초저녁이지 않을까? 시간이 어느 때든, 흐릿한 주변 풍경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하게 칠해져 있는 선착장과 같은 건축물 위에 있는 사람들이 주는 인상은 하나인 듯하다. 작품 뒷배경에 보이는 궁전 같은 건물은 웨스트민스터 궁으로, 영국 국회의사당 건물이다. 진한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는 건축물 위에 사람들은 템스 강이라는 낭만적인 강가 위에 놓여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궁전과 낭만적인 강가를 주변에 두고 이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모네는 왜 이들에게 조화로운 색채를 채워 넣지 않고, 깜깜하게 만들어버렸을까. 어쩌면 이토록 화려한 주변 풍경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삶의 힘겨움과 무력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루하루 살아갈 힘조차 없이 어두운 현실 속에 침잠하는 이들을 아름다운 주변과 대비시켜서 더욱 극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모네는 정상에서 앙티브의 어떤 모습을 내려다본 것일까. 만약 앙티브의 풍경 만을 그려내고자 했다면, 그림 속 영역의 절반을 차지해서 풍경을 가로막는 나무는 오히려 치워두어야 할 것이 아닌가? 왜 모네는 나무를 그려 넣어서 풍경을 가로막았던 것일까.
그림 속 앙티브라는 도시는 거대한 산을 등지고 있다.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산에 비해 도시의 건축물들을 포함한 도시 자체의 규모는 한없이 작아 보인다. 순전히 평면적으로 작품을 바라보면, 앙티브는 산이 위에 있고, 바다가 아래 있어서 그 사이 오도 가도 못한 채 끼어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장엄한 자연의 위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지며 갈 곳을 잃는다. 때때로 인간은 지금껏 자신들이 이룩한 찬란한 인간문명을 찬양하고 치켜세우지만, 작품 속에서 그러한 자만은 순식간에 부끄러움으로 변모한다. 어쩌면 모네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가리고 싶었기에, 나무로 풍경을 가려놓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분명히 직시해야 할 현실이기에, 나뭇가지 뒤에 숨어 엿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 작품 속의 분위기를 비교해 보자. <폭풍속의 벨일>에 비해 <벨일의 암석>은 상대적으로 더 잔잔해 보인다. 조용히 움직이는 파도 속에서 벨일의 암석들은 그 견고함을 뽐내며 우뚝 서있다. 마치 누가 자신들을 꺾을쏘냐라고 말하는 것처럼, 거친 표면을 수많은 폭풍의 세월들의 흉터로 간직한 채 자리 잡고 있다.
반면 폭풍속의 벨일의 암석들은 거친 파도와 바람에 꺾여 부서지고 높은 돌기둥을 빼앗겨 버렸다. 나를 향해 닥쳐오는 저 폭풍을 나는 견뎌낼 수 있을까. <폭풍속의 벨일>과 함께 본 <벨일의 암석>은 마치 폭풍전야 속에 있는 듯하고, 몰락하기 전 낭만의 한때를 보냈던 역사 속의 패배자들을 연상시킨다.
작품 속에서는 어머니와 아들로 추정되는 관계가 총 두 쌍 등장한다. 하단에 등장하는 모자와 우측에 등장하는 모자다. 두 모자는 작품 속 제목인 양귀비 들판을 거닐고 있다. 작품 하단의 모자는 우측의 모자에 비해 공간적으로 앞에 서있는데, 나는 마치 이들이 지나온 길마다 양귀비가 핀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들이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꽃이 피고 아름다운 들판이 만들어지는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모자가 이들이 지나간 길을 다시 밟으며, 피어난 양귀비를 감상한다. 지나가기만 해도 좋은 향기가 나고 아름다운 일들이 벌어지는,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다른 이들에게 행복을 주고 즐거움을 주는, 그런 사람.
잔잔한 호수 위에 한 척의 보트가 떠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보트는 작업을 하는 스튜디오로 사용되는 듯하다. 인상적인 민트색으로 칠해져 있는 스튜디오의 내부는 까맣게 칠해져 있어서 그 구조를 들여다볼 수가 없다. 잔잔한 호수에서 주변을 바라보며 순간의 인상을 담아내고 있는 모네를 상상하게 된다.
작품은 막 해가 뜨고 있는 해돋이의 순간을 그려내고 있다. 흐릿하게 보이는, 연기를 내뿜는 배들이 보이는 걸로 보아 선착장과 같은 곳인 걸로 생각된다. 이러한 작품의 중앙에는 다른 구성 요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진하게 칠해져 있는, 작은 배를 타고 있는 인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해가 밝아오고, 새로운 아침이 다시 시작되어 모든 이들은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배는 물건을 실어 나르고, 다른 곳으로 여정을 떠난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작디작은 배를 타고 물 위를 건너고 있는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지, 저 해는 누구를 위해서 뜨는 것인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강가 위 철교에는 컨테이너 박스를 실어 나르는 듯한 모습이 보이고, 그 아래에는 요트가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듯하다. 모네는 이 풍경을 그림에 모두 그려 넣지 않고, 풀과 나뭇잎들로 조금 가려서 채워 넣었다. 어찌 보면 철교와 요트라는, 성격이 다른 두 물체가 한 작품 안에 있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다. 누군가가 요트를 타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때, 누군가는 딱딱하고 차디찬 철교 위에서 일을 하고 있다. 이러한 괴리를 온전히 담을 수 없기에, 자연으로 이 모습을 조금이나마 가리지 않았을까.
지극히 단순한 구성이다. 꽃병에 국화꽃 여러 송이가 담겨 있다. 그게 다다. 이러한 단순한 그림임에도 오묘한 생동감이 다가온다. 꽃병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마치 불에 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국화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발버둥 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인상을 준다. 꽃병 속의 꽃은 그저 가만히 담겨서 바라보이는 대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처절한 운명과 존재의 고통을 불타고 있는 꽃병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해가 지는 일몰에 비치는 수련을 표현한 작품이다. 모네는 가히 색채의 마술사라 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답고 조화로운 색채를 그림에 채워 넣는다. 일몰의 노을빛이 수련 사이로 흘러가는 듯한 몽환적인 인상을 준다. "예술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모네는 자신의 말을 작품을 통해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다. 아름다운 모습을 담고 있는 자연을 자신의 마음의 창문으로 투과시켜서 그려낸 모네의 예술은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진다.
<양산을 쓴 여인>에서는 여인과 왼쪽의 아이로 총 두 명이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는 인물들의 표정이 대략적으로나마 그려져 있고, 맑은 하늘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듯하다. 모네는 바람을 시각화시켜서 마치 여인을 휘감고 있는 듯한 모습을 그려내었다. 왼쪽의 아이는 순진한 모습으로 볼을 붉히며 서있다. 여인을 휘감고 있는 바람은 마치 이들이 곧 어딘가로 떠날듯한 묘한 인상을 준다.
그에 반해 <야외에서 인물 그리기 습작 : 양산을 쓰고 왼쪽으로 몸은 돌린 여인>에서는 여인 한 명 밖에 등장하지 않고, 여인의 표정은 묘사되어 있지 않다. 제목처럼 여인은 왼쪽으로 몸을 돌리며 서있다. 여인은 대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아이가 등장했던 왼쪽 작품과는 달리, 어디로 가버린 건지 없는 아이를 떠올리고 있는 건 아닐까. 혹여 아이가 머나먼 곳으로 떠나버렸다던지, 그러한 이야기를 작품 속에 새겨 넣으며 홀로 양산을 쓰고 서있는 여인을 해석해 본다. 표정이 그려져 있지 않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너무나 분명하게 상상된다.
카미유는 모네의 연인의 이름이다. 카미유는 모네의 힘든 시절을 모두 함께 한 사람이다. 그토록 소중하고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그림으로 그려 낸 모네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병으로 죽은 카미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네의 심정이 작품 중앙에 횡으로 길게 그어져 있는 붓질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작품 속 카미유의 얼굴은 마치 해골과도 같이 말라 있다. 자신이 본 그 인상을 그려내는 것이 자신의 화법이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던 모네가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