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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dos Paul Jan 19. 2024

「달력과 과학」

이정모

이 세상은 관습과 약속, 합의 등으로 가득 차 있다. 누구든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고 있다면: 느끼고 있든, 그렇지 않든 사회로부터 혜택을 받고 있다면, 이것들을 거스른 채 살아갈 순 없을 것이다. 사회란 무릇 수많은 합의와 약속 아래 세워진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관습과 합의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약속은 다양한 방면에서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학문에서는 기호, 혹은 표기(notation)이며, 각 개체에게는 이름, 번호 등이 그 예시이다. 그러니까 서로의 편의를 위해 지금부터는 이렇게 부르기로 하자라는 식의 합의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주로 통용되는 표현들이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 혹은 집단에 따라서 새롭게 약속할 수도 있다. 수학의 경우 책마다 사용하는 기호가 다른 것이 이 경우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본질 자체는 모두가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일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상대방의 의사에 달려있다.


    그러나 이런 행동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마치 대원칙과도 같은 범사회적 합의들이 몇 가지 있는데 법률이나 달력과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누군가 다른 이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한 뒤 법정에서 '나는 다른 이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이 법에 저촉된다고 규정하지 아니하였다'라고 진술한다면 대한민국에서는 심신 미약으로 감형될 노릇이다. 


    달력도 법률보다 더 큰 규모의 약속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모월 모일에 이러이러하기로 하였으니 그렇게 알라'고 하였을 때는 상대 국가와 모월 모일이라는 때가 물리적으로 언제를 가리키는지 약속이 되어 있다는 전제가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만일 국가들이 서로 다른 시간 체계, 즉 달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에 따른 사회적 혼란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4장 <그레고리우스 달력>은 새롭게 반포된 그레고리우스 개혁 달력을 종교적인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독일 지역에 초래된 혼란과 그 영향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그 규모에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내용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구성원으로서의 의무이고, 그 본질과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구성원으로서 지녀야 할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합리적이고 훌륭한 합의를 만들기 위해 수반되어 온 수많은 고민들과 치열한 세월의 흔적들을 살펴보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큰 즐거움과 통찰을 준다. <달력과 권력>은 고대 문명에서 각각 만들어져 온 달력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대에 하나의 달력으로 수렴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또한 어떤 목적에서든, 새로운 달력을 만들고자 했던 혁명가들의 시도가 결국에는 실패하게 되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패턴과 리듬을 깨뜨리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달력은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들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종교, 경제, 문화, 정치, 나아가 개인의 생일에 이르기까지 달력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범사회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달력을 만들고자 한다면 이 모든 항목을 필히 고려해야 한다. 이때 13일에 금요일에 나타나는 것을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거나, 홀수는 짝수보다 더 큰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로마 미신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상기하라! 몇 번의 시도 끝에, 아마 당신의 혁명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달력은 그 태생 상 정밀한 관측에 의거한 천문학적 사실들에 의해 절대적으로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태양력 기준 1년의 길이는 약 365.2422 일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자연수로 1년의 길이를 정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자투리'들이 남게 되고, 때문에 윤년의 도입은 필연적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이러한 자투리에 해당하는 기간은 축제을 열거나 한 해를 정리하는 기간으로 정하였는데, '송구영신'의 정신이 공통되게 들어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끝이 있으면 새로운 시작이 있다는, 영원한 종말을 거부하고 역동적인 출발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세계관이 대부분의 문화권에 들어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확실한 건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가 무언가 사고를 단순화시키고 통찰 비슷한 것을 준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모든 문화권이 농경 사회였기 때문에 달력은 곧 시기적절하게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확한 달력을 만드는 것은 그 국가, 나아가 문화권이 강대해지는 길이었다. 때문에 달력을 만들고 수정하는 일은 대부분 국가의 간부들이나 권력을 잡은 지도층 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였으며, 이는 종종 민중들에게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도 명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독자적인 역법을 가질 수 없지 않았던가. 물론 세종대왕에 이르러 <칠정산>의 편찬으로 조선만의 역법을 가지게 되었다. 


    한 가지 재밌었던 점은 주먹으로 각 달에 며칠이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이 로마 시절 사용하였던 율리우스 달력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출처: <달력과 권력> 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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