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하나의 객체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나'라는 존재를 언급할 때 그 존재는 어떤 대상들로 설명될 수 있을까? 더욱 엄밀하게, '나'라는 한 명의 인간을 저기 있는 수많은 '나'들과 구분하게 만드는 뚜렷한 특징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가?
나아가, 무슨 근거로 '나'는 소중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맺고 있는 수많은 관계들로 정의될 수 있으며, '나'는 그 관계들로 인해서 특별해지고, 소중한 존재로 일컬어진다. 관계가 무엇인지는 구태여 정의하지 않겠다. 사람마다 관계를 인식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별들을 떠돌다 끝내 지구에 도착한 어린 왕자는 여우를 만난다. 여우는 <길들인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묻는 어린 왕자에게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어린 왕자는 자신을 길들여달라는 여우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둘은 친구가, 서로에게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이야기다. 보통 길들인다는 말은 어떤 목적을 위해 무언가를 익숙해지게 한다는 뜻으로 상하가 명확한, 일방적인 단어이다. 어른의 시선으로 보면 길들인다는 말을 여우를 가축으로써 기르는 뜻으로 이해했을 법 하지만, 생텍쥐페리는 길들임을 서로에게 동등한 친구 관계로 바라보고 이야기 속에 녹여낸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느껴지는 감각적 요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 즉 나름대로 부여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각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신체적 특징이나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일련번호로 수많은 '나'들을 구별할 것이다. 이 또한 하나의 방법이지만, 이러한 자연적이고 인위적인 방법들로는 '나'를 소중한 존재라고 말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키가 크기 때문에, 누군가는 얼굴이 잘생겼기 때문에 소중하다고 말한다면 그 기준에 대해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나'를 생물학적으로, 인위적으로 분류하고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는 나에게 어떠한 특권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길들여지는 순간 서사가 만들어지고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완성된다. 나는 그에게 특별하고, 그 또한 나에게 특별하다.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가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친구란 관계이며, 관계란 길들이는 것이다. 남이 보면 그저 그런 존재에 불과하지만 그가 나에게 부여해준 의미로 인해, 우리가 정한 의례로 인해 우리의 존재와, 공간과, 시간이 특별해진다. 수많은 아이 중 하나에 불과했던 어린 왕자는 여우에게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아이가 되었고, 수많은 여우 중 하나에 불과했던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여우가 되었다.
그러나 관계는 어렵고, 때로는 슬프다. 어린 왕자와 장미처럼 어떨 때는 관계로 인해 불행해질 때도 있다. 서로를 향하는 말들로 인해 오해가 쌓이게 된다. 또한 만남은 반드시 헤어짐을 전제로 한다. 이별은 언제나 슬프고 괴롭다.
여우는 자신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아주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말을 하지 말되,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라는 것이다. 어린 왕자는 장미에게 유리 덮개를 씌워 주고, 바람막이로 바람을 막아주며, 벌레를 잡아주었다. 또한 그의 불평을, 허풍을, 침묵을 들어주었다. 상대방을 위해서 불편을 감수하고 인내하는 것이야 말로 사랑이다. 사랑은 힘들고 어렵기에 더욱 숭고하며 값지다.
여우는 어린 왕자와 헤어지게 되자 울음이 나온다고 말한다. 이때 여우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어린 왕자의 말에 자신은 저 밀 색깔을 얻었다고 말한다. 평소에는 밀밭을 보아도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던 여우지만, 어린 왕자가 그를 길들이자 금빛 밀을 보고 어린 왕자를 떠올리게 된다.
헤어짐은 슬프고 눈물을 머금게 하지만 헤어짐 전에는 만남이 있었고, 만남으로 인해 '나'는 소중해지고 특별해진다. 그렇기에 관계는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그러한 관계들로 정의되는 '나'는 소중하다.
'너'는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소중한 존재이고, '나' 또한 그러하다. 생텍쥐페리는 이러한 관계의 소중함을,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