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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dos Paul Feb 29. 2024

이단아

「시지프 신화」, 「이방인」


내일의 희망을 버리라는 반항아의 말에, 나는 무슨 대답을 할 수 있는가? 사형수라는 예정된 운명과 석방의 날만을 기다리는 죄수의 신분이 중첩되어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정신의 밤을 보내고 있는 나는 과연 반항해야 하는가? 


    신에게 묻겠다. 과연 무한한 반항은 죄의 원천인가? 이방인이 될 것인가, 노예가 될 것인가? 


    아! 차라리 본질이라는 것이 주어져 있었다면 참으로 좋았을 것을! 나에게 말단의 자리 하나만이라도, 그것이 연극일지라도, 자그마한 배역 하나, 역할 하나라도 구걸하여서 동전 한 푼이라도 받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을!


    나는 스스로 무대를 꾸며야 한다. 감독부터 음향, 의상, 각본, 연출, 연기 - 이 모든 것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골룸이 the precious thing,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소유욕에 침잠하였다면 나라는 저주받은 존재는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기에, 오히려 노예처럼 살길 자처한다.


    과연 해방인가? 그저 찰랑거리고 거추장스러운 인식표를 하나 매달고, 또 다른 인식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 혹은 자유라는 폭력 아래 놓여 어쩌지도 못한 채 수많은 유혹의 환상들에 눈을 멀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또 다른 감옥에 갇힐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간수의 모습을 상상해야만 하는가?


    부조리다! 불합리하며, 합당하지 못하며, 정의롭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하며, 정당하지 못하고, 부정부패하고, 당당하지 못하며, 사기에 가까우며, 억울하며, 부당하며, 시기를 불러일으키며, 분노를 일깨우는, 그러한 현실이다. 


    이러한 3류 소설 중 1부의 전환으로, 나는 언어적 표현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대한 반전의 접속사를 쓰고 싶다.


    모든 것이 낯설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완벽을 향한 첫걸음일 것이다. 


    카뮈의 언어를 빌리자면, 나는 반항함으로 존재한다. 그 외에 달리 존재할 이유는 없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해답이 될 수 있기에 섣부른 환희를 종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반항의 대상은 무한하다. 반항의 성질은 자기 지시적이다. 그것이야말로 순진무구한 환원주의에 내포되지 않는, 살아 숨 쉬는 지적인 동역학이다. 


    규정과, 판단과, 속단, 예단, 규칙, 규범, 규율, 규제, 통제, 명령, 폭정, 독재, 관습, 인습, 정의, 도덕, 윤리, 온갖 고결함과 고귀함을 표방하는 모든 음침한 움직임은 파괴받아 마땅하다. 


    다양한 외견으로 인해 하나의 일률적인 모습과 종합적인 판단이 구성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정의와 도덕이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인칭 시점 또한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시각 중 하나일 뿐이다. 


    출처의 동일성으로 인해, 단일한 고유 조상으로부터 도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상이한 종의 피를 수혈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과연 에둘러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까지 조화의 한 결론을 내보일 필요가 있는 것인가? 그것이 과연 본질의 자리를 꿰찰 수 있는 것인가? 


    매 순간 낯설어지는 것, 그저 한 조각의 편린으로 여기는 것, 끊임없이 본질을 향한 거부로 몸부림치는 것, 매 순간의 자신에게 충실할 것, 자기 지시적인 관성에의 반항, 가히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의 분수에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일 것이다.


    모순인가? 모순의 또 다른 형태의 표상이 바로 인간임을 인정하도록 하자.


    나는 조금씩 다가오는 거짓 해방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오늘도 산정()을 향하여 돌을 굴린다. 쉬운 길, 넓은 길, 평탄한 길을 택할 것인가, 어려운 길, 좁은 길, 고단한 길을 택할 것인가? 형벌의 주관자이자 모든 투쟁을 엿보고 조감하고 있는 그조차 알 수 없다. 나는 온갖 것의 해체를 명한다. 만일 이 모든 것이 바벨탑의 어리숙한 모조품이라면 가히 파괴되어 마땅하다. 하지만 그러한 외줄을 통과하게 된다면, 만에 하나 있을 그 숨겨진 운명을 직시해야 마땅할 것이다.


    여기서 내 일생의 삶을 아우르고 기둥이 되어주는 신앙, 창조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별개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나는 언제나 두 주제의 결부와 합치의 접근법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데, 이 두서없는 글 또한 그 과정의 일환으로 보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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