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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dos Paul Mar 31. 2024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코뿔소」

도입

'인간다움'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들은 무엇인가? 과연 인간을 다른 생물종과 구별된 존재로 만드는, 그러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직접 답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그보다는, 확실히 아닌 답안들을 제거해 나감으로써 더욱 답에 근접해 가는 이른바 소거법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확실히 아닌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외젠 이오네스코의 희곡 「코뿔소」은 부조리한 현실을 그려냄으로써 그것들을 제시하는 작품이다. 


작품 요약

    작품은 한적한 여름, 일요일 정오에 난데없이 출몰한 코뿔소 한 마리가 거리에서 부리는 난동으로 시작한다. 이로 인해 고양이 한 마리가 코뿔소에 의해 죽게 되는데, 작중 인물들은 코뿔소의 뿔이 몇 개였는지, 어떤 종이었는지 등과 같은 문제들로 논쟁을 벌인다.

    사실 사회에는 사람들이 코뿔소로 변하는 이른바 '코뿔소 병'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 병은 평범한 병과는 달리 본인의 선택에 따라 언제든지 코뿔소로 변할 수 있는 병이다. 모든 인물들은 코뿔소가 되는 쪽을 선택했지만, 주인공 베랑제만은 끝까지 코뿔소가 되기를 거부하며 저항한다. 


코뿔소의 특징

    인간들만이 존재하던 세계에 코뿔소라는 새로운 종족이 등장하게 되고, 이들은 폭력성과 집단성, 비인간성을 상징한다. 이러한 특징들은 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다양하게 표현된다. 코뿔소로 인해 고양이가 죽고 주인인 주부는 슬픔에 잠기며, 남편 뵈프가 코뿔소로 변하자 뵈프 부인은 덩달아 남편을 따라가 코뿔소가 된다. 데이지는 베랑제가 사랑을 고백하며 함께 인류를 다시 번성시키자는 요청을 뿌리치고 사랑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하며 코뿔소를 찬양한다. 장은 코뿔소로 변하는 쪽을 선택하며 휴머니즘을 비난한다.

    작품 초반에 인물들은 코뿔소의 뿔이 몇 개이며 무슨 종인지에 관해 논쟁을 벌이지만, 결국 코뿔소가 사회 전체를 뒤덮어 버릴 만큼 번성하게 되자 이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가게 주인: 아시아 코뿔소는 뿔이 하나고, 아프리카 코뿔소는 둘이라……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맞죠……."

뿔이 몇 개이든 간에 코뿔소는 단지 코뿔소일 따름이다. 그것들에게서는 폭력적이며, 무리를 지어 다닌다는 특성 밖에 발견할 수 없다. 개인의 가치를 짓밟는, 즉 부분의 특이성을 무시한 채 오로지 집단의 특성만으로 전체를 표방하는 것이 코뿔소 무리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명백한 폭력성과 인간성의 배반을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뿔소 무리는 한 사회를 집어삼킬 만큼 무서운 집단이기에 많은 이들이 그 부정적 현실에 편승하고 휩쓸리게 된다. 

    그러한 대표적 인물이 장이다. 장은 답답하다며 옷을 전부 벗어버리고 자신은 의사를 믿지 않는다는 등 정상인처럼 행동하지 않고 짐승과도 같아지며 코뿔소로 변해간다. 이러한 장면은 베랑제에게 문화인의 삶을 살 것을 누구보다 호소했던 장이 그랬기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이때 장이 말하는 '문화인'의 삶이란 문화 자체를 즐기며 향유하는 것이 아닌, 그저 유행과 시류를 따라가며 문화인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장은 사회가 코뿔소에게 점령당하자 이번에도 '문화인'처럼 살고자 코뿔소가 되기를 선택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현실을 쫓아가며 우월한 집단에 속하는 것뿐이다. 장이 베랑제를 향해 얼굴색이 노란 아시아인이라고 인종차별 발언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우리는 이런 장의 모습에서 집단을 나누고 자신을 특정 집단에 귀속시키는 동시에 타인도 그렇게 하는, 그러면서 집단 간의 우월성을 나누는 비인간적 집단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

    작가는 이와 같은 집단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풍자 요소들을 작품 곳곳에 심어 두었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신념을 넘어서서 그것을 표방하는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로 얽혀 있기 때문에, 서로 다양한 세계관과 가치가 충돌하고 맞물리는 현대 사회에서 그것은 일종의 포스트 모더니즘, 다원주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선형적이고 단선론적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빠져든다. 

    인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각 시대, 나아가 특정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각 정권은 저마다의 이상향과 탁월한 인간상을 제시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작품에서는 코뿔소가 그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실 앞에 순응하는 것은,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가 내세우는 인간상에 부합하고자 애쓰는 것은 다른 사람의 기대에만 부응하며 타의적으로 사는 것이다. 마치 다른 사람을 등에 업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는 구성원에게 모나지 말 것을, 현실 앞에 순응할 것을 은밀하게 요구한다.


    그러나 베랑제는 그러한 삶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틈에서 사는 것이 편하지 않은, 산다는 것이 비정상으로 보이는 사람이다. 그는 집단성과 자신의 개별성의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 가장 근본적인 사실인 자신의 존재성조차 의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랑제는 명백한 현실인 코뿔소 무리 앞에서 끝까지 인간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지만, 하찮은 이상주의자처럼 보일 뿐이다.

    베랑제는 노동의 고됨 속에서, 또한 문명인, 사회인이라는 껍질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구로 술을 사용한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용도로 술을 마시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온 결과는, 사회가 그에게 씌운 껍데기는 다름 아닌 술주정뱅이, 알코올 중독자이다. 그런 베랑제를 향해 장은 알코올이 현실의 삶을 억압한다고 말하며 은근히 현실에 순응할 것을 부추긴다. 


    과연 우리는 현실에만 치중해야 하는 것인가? 그러한 현실을 홀로 대면하는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를 하나의 이상적인 인간상에 일치시키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주시하는 그 모든 요구로부터, '우월한 인간'은 결코 못 되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회가 요구하는 폭력적인 획일화와 통일성에 대한 요구에 맞서서, 보잘것없고 힘없는 한 명의 이방인에 불과한 나는 도대체 그 거대한 코뿔소 무리에 맞서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그러한 상황에서 나라는 한 명의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세상에 유일한 인간인 나는 꼭 삶을 계속해서 영위해야 하는가? 더 이상 자손을 이어갈 수도 없고, 그저 천천히 죽어갈 운명인 나에게 산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토록 불합리한 현실 앞에서 나 또한 코뿔소가 되는 것이 합리적인, 편한 선택은 아닌가? 나 또한 불합리해져서, 차라리 이성이라는 것을 포기하고 아예 이 세상에서 제거해 버림으로써 모든 인간적인 가치를 소멸시키는 것이 차라리 나은 것일까? 스스로에 대한 일체의 의문과 회의적 시선을 제거해 버리고 자기기만에 빠져 침묵하며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닐까? 


인간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산다는 것은 곧 반항하는 것이며, 발악하는 것이다. 나를 억누르고 짓누르는 시대 정신과 이데올로기의 강제성에 의한 것이 아닌, 스스로 나 자신을 완성시키려는 주체성의 부르짖음이다. 누구도 노예처럼 살고 싶지는 않기에, 주체적으로 살아가기를 원하기에 인간은 반항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만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이라는 것이 작품에서 도출해 낼 수 있는 하나의 해석이다. 


    비인간성과 인간성은 수많은 선택의 기로들 중 최후의 막다른 길,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이데올로기가 지향하는 핵심 가치에 찬성할 것인지, 반대할 것인지의 양자택일의 심판대 앞에서 과연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갈린다. 하찮게만 보이지만 축복받아 마땅하고 그 자체로 소중한 대상인 '인간'을 택하느냐, 아니면 인간을 가장한 '집단'을, '인간'이 아닌 다른 가치를 택하느냐에 따라 갈리는 것이다. 이는 반항하는 베랑제, 수긍하는 장의 모습과 더불어 장과의 관계를 더 중요시하는 베랑제와, 베랑제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코뿔소의 등장과 그것이 비이성적 사건이라는 것에만 집중하는 장과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사람들은 저마다 관심사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다양하다. 베랑제는 자신의 친구 장과 아름다운 직장 동료 데이지와의 관계가, 노신사는 주부의 환심을 사는 것이, 카페 주인은 돈을 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와중에 코뿔소로 인해 고양이가 죽어 주부가 슬퍼하자 사람들 모두 이 문제로 의기투합되는 듯했으나, 결국에는 코뿔소의 모양과 뿔, 종에 관한 문제로 서로 언쟁을 하다가 흩어지고 만다.

    이때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점은 무엇인가? 바로 코뿔소에 의해 고양이가 죽어서 그들의 지인인, 나아가 한 사회의 구성원인 주부가 슬픔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이들이 해야 할 것은 현장을 수습하고 주부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도대체 코뿔소가 어떠하든 그것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코뿔소가 도대체 왜 나타났고, 그 코뿔소가 뿔이 몇 개였는지, 종이 무엇이었는지와 같은 질문이 아니다. 이것들은 추후에 사건이 진정되었을 때 진상을 파악할 때 제기되어야 한다. 

"가게 주인: ……좀 논리적이긴 한데……. 그렇지만 고양이가 우리 앞에서 코뿔소에게 짓밟혀 죽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그놈이 뿔이 하나든 둘이든, 아시아 코뿔소든 아프리카 코뿔소든 상관없이 말이야."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태도는 오늘날 약자, 소외받는 자, 피해자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하는지 그 태도를 돌아보게 만든다. 누군가는 카페 주인처럼 이것을 기회삼아 술 한잔 더 팔아보려 할 것이고, 누군가는 노신사처럼 주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누구는 논리학자처럼 감정적 위로 보다는 충고를 하며 이성적으로 될 것을 종용할 것이다. 

    작품 속 모든 이들은 피해의 복구와 상황의 개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방금 지나간 코뿔소가 예의 그 놈이었는지, 뿔이 하나 달린 놈이 아시아 코뿔소인지, 아니면 아프리카 코뿔소 인지와 같은 논쟁에 휩싸여 격정을 낸다. 결국 피해자는 고립되고 홀로 남는다. 

    과연 우리는 오늘날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누군가는 이성을, 누군가는 돈을, 누군가는 사랑을, 누군가는 감정을 앞세울 때, 어쩌면 우리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 그 무엇보다 지켜내야 할 것, 즉 인간성을 놓치고 있지는 않는가? 고통받는 자를 가장 먼저 돌아보고 보살피는 감정적 대응이 결여되고 있지는 않은가? 인간과 다른 가치를 선택해야 할 때, 인간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기서 우리는 감정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감정을 결여시킨 채 승리한 이성의 비웃음을 듣게 된다. 감정이란 이성보다 못한 것이며, 감정은 문제를 전혀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냉소 말이다. 그러나 이성, 즉 논리를 표방하는 이들의 결말이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논리라는 것은 그저 도구일 뿐이다. 식칼을 조리용으로만 사용하면 그것은 훌륭한 결과를 낳지만, 흉기로 사용하면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도구라는 것은 본디 그것을 만든 목적, 즉 본질이 있기 마련이다. 그 목적을 벗어나 사용하는 이상 항상 좋은 결과를 담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논리는 개별적인 이성에 영향을 받지 않고 객관적인 규칙을 통해서 이성적이라고 생각되는 결과를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도구이다. 때문에 특정 결과를 정당화하기 위해, 합리화하기 위해 논리를 사용한다면 그 목적에 벗어난 것이므로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

    작가는 논리학자와 노신사의 대화를 통해 위와 같은 이성의 오용을 조롱한다. 이들은 삼단 논법을 말하면서 전혀 삼단 논법을 적용할 수 없는 명제들로부터 잘못되기 짝이 없는 결론을 도출해 낸다던가, 자신들의 논의로부터 나올 수 있는 자명한 명제를 가정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자기 입맛대로, 모순적으로 논리학을 사용한다. 때문에 논리학은 그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은밀한 목적을 정당화하려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이며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격이다. 

"노신사: 논리학은 여러 가지 양상을 띠는군요!"
"논리학자: 논리학은 한계가 없지요!"
(…)
"뒤다르: 모든 게 논리적이지. 이해하는 것, 그건 곧 정당화하는 것이지."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정의는 논리로 대표될 수 있다. 정의롭지 못하면 곧 논리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은밀한 속내를 정당화하려는 속임수에 불과하며, 결국 논리학자와 뒤다르도 코뿔소가 되고 만다. 


    세상에는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방식이 존재하며, 그것을 영위하기 위해 가지는 개인의 신념 또한 다양하다. 따라서 주관적 차원에서 이 방식들은 정당화될 수 있다. 서로 충돌하는 듯할 수도 있으나 이 신념들은 서로를 배격하지 않고 서로에게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기에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살아가며 함께 공존할 수 있다. 베랑제는 누구나 나름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고 말하며 장에게 사과한다. 장이 점점 코뿔소로 변하며 사람을 멀리하고 증오하는 모습과는 달리 베랑제는 자신 곁에 있는 사람을 중요시한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또 다른 사람이다.

    이러한 입장이 장과 뒤다르, 보타르와 같은 작품 속 인물들의 입장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이들은 다른 방식들과 신념들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직 자신의 방식,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모든 영역을 지배해야 하며, 또한 선과 악을, 정상과 비정상을 뚜렷하게 구분하며 사람들이 어떤 집단에 속하는지 철저하게 조사한다. 이들은 사람을 부정하며, 집단을 긍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흑백 논리는 반드시 비인간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선과 악의 뚜렷한 경계를 긋는 것, 정상과 비정상의 명확한 구분은 반드시 어떤 가치 판단의 일환일 수밖에 없기에, 필연적으로 어떤 전제를 요구하기에 인간에게 본질적인 선과 악이란 그저 개인의 신념에 따른, 각자의 윤리관에 따른 주관적 판단이 전부이다. 따라서 서로가 생각하는 정의는 다를 수 있으며 때때로 그것이 충돌하기도 한다. 

    이때 우리에게는 각자의 신념을 논리로써 정당화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닌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며 함께 조화로운 사회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생활적인 측면에서 모든 사회는 다양한 개인들이 모여서 화합을 이루며 살아가는 공동체이기에 서로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룰을 정해야 하는데,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법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우리는 휴머니즘의 편에 서서, 인간성을 말살하는 모든 시도를 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떠한 편법이나 변명, 궤변도 통하지 않는다. 한때는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라고 믿었을지라도 언제나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었듯이, 코뿔소 무리가 미쳐 날뛰고 있을지라도 인간적인 가치, 휴머니즘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틀림없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인간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


    장이 코뿔소로 변하는 장면에서 그는 자연으로 되돌아갈 것을 부르짖으며 인간의 도덕을 자연의 것으로 바꾸려 한다. 오늘날 우리는 종종 자연에서 도덕을 찾으려고 한다. 자연 질서를 가져와 인간 질서에 대입하여 둘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인간은 자연과 구조가 같지 않다. 오늘날 인간과 동일한 이성을 가지고 있는 생물종이 존재하는가? 인간의 이성은 말 그대로 오로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른 어떤 것들도 아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이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떠한 것에서도 아닌, 자연으로부터도 아닌 오로지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질서와 규범을, 도덕을 찾아야 한다. 인간의 도덕은 자연과 다르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 수천 년에 걸쳐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수립한 현재의 문명은 가히 찬란한 것이다. 

    때로는 비인간적인 가치, 혹은 자연 회귀가 더 행복해 보이고 좋아 보일지라도, 그것에 순응하는 것이 당장은 편해 보이는 길일지라도, 비교적 내가 비정상으로 보일지라도 반드시 직시해야 할 분명한 것은 바로 인간적인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포기한 순간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고 필자는 과감하게 주장한다. 인간이라면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기에,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아닌 것이다. 


    물론 자연의 한 질서 또한, 즉 코뿔소들의 삶 또한 하나의 방식이지만 그것은 다른 인간의 삶을 침해하고 방해하지 않는 경우에만 존중받을 수 있다. 그것이 공동의 추구하는 절대적 가치, 법 위의 법인 인간성을 훼손한다면 배격되어야 마땅하다. 그것을 저버린 코뿔소의 도덕은 인간의 것과 다르다. 

    서로 국경을 맞대고 각자의 영토에서 주권을 누리며 살아갈 수는 있지만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공하는 순간 평화는 깨진다. 그전에는 한 영토 안에서 어울려 사는 것이 아닌, 즉 한 사회에서 공존하는 것이 아닌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며 세계라는 큰 틀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선을 넘는 순간, 불가침의 영역을 건드리는 순간 투쟁에 들어간다. 

    우리는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삶의 방식을 존중하여 서로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가? 그러나 본질적으로 인간과 코뿔소의 언어는 다르기 때문에, 만일 두 종이 하나의 사회를 이루어 함께 삶을 영위해 나가고자 한다면 결코 조화로 나아갈 수 없고 끔찍한 혼종이 될 뿐일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본질적으로 둘은 다른 종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는 이해하는 것이 아닌, 이해할 수 없음에도 존중해 주며 각자의 영역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세상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다. 세상은 항상 결과만을 보여줄 뿐이며, 그 결과를 만들어 가는 것은 다름 아닌 나, 한낱 티끌, 먼지에 불과한 나라는 한 명의 인간이다. 당신은 인간인가? 인간으로서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인간적인 것을 추구해라!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삶을 살아라. 


연대를 통한 현실에의 참여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인간다움은 타인에 대한 나의 태도로 규정되기 때문에, 그 숭고한 휴머니즘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연대 의식을 가지고 마땅히 그 가치를 지켜내고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하다면 그 결과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그 결과로 인해 피해자가 될지라도, 참여하지 않는 이상 현실에 순응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한다. 시대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 그저 물 흘러가는 대로 살던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시대정신을 비판하여 잊혀서는 안 될 것들을 호소하던가. 


    그리고 작가는 작품 내내 독자들에게 후자를 택할 것을 주문한다. 시대정신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반항해야 한다. 그 반항의 결과가 또 다른 시대정신을 낳는다면, 그것도 다시 극복되어야 한다. 이렇듯 끊임없는 변화를 통한 계승이 반항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반항을 포기하고, 극복을 멈춘 채 현실에 안주한다는 것은 곧 획일화된다는 것, 통일된다는 것,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 고정관념이 생기는 것, 차이가 없어지는 것 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선론적인 역사관을 가지게 해 주며 모든 것을 이 시대정신에 얼마나 부합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부여되고 평가된다. 이제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되고, 특정 집단에 좌우된다. 그러면 코뿔소가 되는 것이다. 


    코뿔소들은 무엇을 주장하려 하는가? 그들은 실천보다 이론, 즉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실천이 이론에 따라오게 만든다. 그렇다면 그것은 주체적인 행동으로서의 실천이 아닌, 차라리 복종과 굴욕적 패배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실천은 그것이 이론에 앞설 때만 유의미한 것이다. 탁상공론과 온갖 이해관계에 얽힌 계산적인 행동이 아닌, 진정으로 가치를 수호하려는 숭고한 행동으로서의 실천 말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숭고한 것은 죽음을 불사하고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한, 마땅히 실천하기를 선택한 베랑제이다. 


    그러나 비극적이지만, 여기서 베랑제의 반항이 성공하여 다시 코뿔소를 몰아내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하다. 결국 친구도, 동료도, 애인도 전부 떠나가고 그야말로 홀로 남은 상황에서 그 거대한 코뿔소 무리에 맞서서 연약하기 짝이 없는 한 명의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베랑제는 결국 항복하지 않기를 선택하지만, 이는 인간과 코뿔소의 정체성 가운데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 내린 결론이다. 우리는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정부를 상대로 화려한 승리를 거두는 것을 기대하고 작품을 읽어나가지만, 결국 그토록 신뢰했던 오브라이언에게 숱한 고문을 당하며 패배하고, 작품은 그 유명한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

    현실 속 대부분의 경우 거대한 이데올로기 앞에 숱한 개인들은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린 것은 다름 아닌 또 다른 이데올로기이다. 집단은 집단으로 진압된다. 그리고 그 집단 다시 또 다른 집단에 의해 진압될 것이다. 이처럼 세상은 끝나지 않는 무한 투쟁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 집단이 우세하지 않고,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며 서로 대립을 유지하고 있을 때,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전세가 역전되는 그러한 상황에서 세상은 발전해 나간다.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반항아인 베랑제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각자로 있을 때는 모두 초라하기 짝이 없는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모여 하나의 집단을 이루면 반인륜적인 저 코뿔소 무리를 몰아낼 만큼의 인간 무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 속에서 베랑제가 언급하고 있는 아담과 하와의 이미지로부터 우리는 작품이 주장하는 바를 알 수 있다. 당시 시대상을 비춰 볼 때, 이오네스코는 나치로부터 맞서 싸울 것을, 저 확실한 악을 제거하기 위해 연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의 그 유명한 문장을 조금 바꾸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휴머니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인간이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만국의 인간들이여, 단결하라!


마무리

    때로는 착하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한 이들조차 코뿔소가 되곤 한다. 개인의 인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만큼 집단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일종의 알 권리를 주어야 한다. 현실이 무엇이고 가능한 대안에는 무엇이 있으며, 그로 인한 결과와 대가는 무엇이 따라오는지에 대한 제시를 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작품 「코뿔소」는 현실을 직시하며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고, 가장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며 반항하는 베랑제와, 그와는 정반대인 다른 인물들을 통해 나름의 제시를 한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베랑제의 모습이 광인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진실을 찾으려 하는, 거만에 떨며 문화인을 자처하면서 정작 자신이 향유하는 문화의 내용은 알지도 못하는 장의 모습보다 더욱 겸손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코뿔소가 되어가는 것을 보고 자신 또한 코뿔소가 되지는 않을지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걱정해하며, 자신의 겉모습이나 목소리 등이 동물의 것과 닮지는 않았는지 뒤다르에게 계속해서 물어본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코뿔소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출처: https://homoscience.kr/3545/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 즉 현실과 거짓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 제시한다. 작품에 대입해 보자면, 현실을 자각하게 해주는 빨간 알약은 인간으로 남아서 모두가 코뿔소로 변한 사회를 직시하면서 끝까지 반항하는 길이며, 원래 살아왔던 세계로 다시 돌아가게 주는 파란 알약은 코뿔소로 변해서 무엇이 현실인지도 모른 채 천천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죽어가는 길이다. 

    작가 외젠 이오네스코는 작품을 통해 현대의 독자들에게 묻는다.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코뿔소로 변할 것인가? 마땅히 인간이라면, 인간다운 삶을 살길 원한다면 우리는 빨간 알약을 집어삼켜야 한다. 인간이라면 인간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 그랬을 때만 우리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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