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뒷계단」
[출판사 '김영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저자는 철학이라는 학문은 신적 특성에 대한 설명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신화의 힘이 차츰 약해지기 시작하던 시기에, 철학은 근원적인 것과 신적인 것에 대한 명료한 질문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신화에 포함되어 있던 지식을 보존하려고 한 것이다.
「철학의 뒷계단」21p.
다시 말해 고대 그리스의 시대정신이었던 신화를 어떻게 설명하고 포장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최초의 철학의 모습이었다. 이는 그들이 온 세상 삼라만상의 바탕 혹은 근원을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과학과 수학의 지위를 당시에는 그야말로 순수한 의미에서의 신학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철학은 신화로부터 온전히 그 내용을 넘겨받을 수 없었다.
철학은 종교의 표상들이 의심스러워지면서 인간이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간에 시작되었다. 그러면서도 철학은 신화와 종교의 지식 안에서 본래 참된 것이라 여겨지던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철학은, 현실의 모든 것이 앞면만 지닌 것이 아니라 배후의 더욱 깊은 것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전해 내려오는 참임을 발견했다.
「철학의 뒷계단」22p.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이 흘러 겉으로 보이는 모든 대상이 변하더라도 그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으며, 외부 대상들의 모든 변화를 주관하는 바탕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다시 말해 세계의 깊이, 본질에 관심을 두었다. 이 본질은 필연적으로 절대적이고 완전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동시에 신적 특성은 가장 현실적인 특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자연의 모든 것은 제 안에 신적인 요소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의 초기 목적은 서양에서 꽤나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제논 - 스토아학파도, 플라타노스도 신적인 것을 상정하고 추구하였다. 신적인 무언가가 세계를 지배하고, 혹은 세계 그 자체이고, 세계의 근원이고 바탕이고 본질이며 힘이다. 오직 에피쿠로스만이 세계로부터 신을 끌어내리고 격하시켰다. 물론 그들 각각이 주장한 세계와 그 메커니즘은 다르지만.
그러나 신적인 것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다고 상정되었기 때문에 감히 인간의 차원에서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고 인식되었다. 단지 절대성의 표상이 믿음과 계시로 주어졌고 인간은 단지 절대성을 추구하는 방향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때로는 신비적인 자기 체험이 이러한 철학적 신학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철학에서 신 중심의 경향성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특히 데카르트에 의해 조금씩 뒤집히기 시작했다. 데카르트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의심, 전통으로부터의 반항이 근대적인 철학의 시작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의 존재가 확실함을 학문의 제1 원리로 두면서 철학의 중심 논의를 신에서 인간으로 옮겼다.
그리고 볼테르는 광신주의적, 권위적 행보를 보이던 당시의 교회를 강하게 비판하고, 오직 계시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보인다는 기독교의 신을 거부한다.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알 수 있는, 감정과 자연적인 논리로부터 도출되는 신을 믿고 사랑하며 주장한다. 예컨대 뉴턴이 밝혀낸 자연법칙과 같은 발견들로부터 그 입법자를 그럴싸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식이다.
볼테르가 믿는 신은 보응의 신이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악을 징벌하는 공정무결한 신이다. 그러나 오로지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이러한 신이 필요하다는 대담한 발언을 한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신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러한 볼테르의 결론의 배경에는 신정론이 숨어져 있다. 인간적인 고통과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볼 때 신은 그 본질로부터 선하다고 말하는 저 기독교의 외침이 과연 옳은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런 근본적인 세상의 부조리와 필멸자의 신분인 인간적 삶의 무의미 앞에서 볼테르는 허무주의와 회의주의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끝없는 심연에 빠지는 편이 아닌, 그저 철학하기를 종용한다.
이 지점에서 루소는 볼테르가 지적한 모든 현상의 책임을 신이 아닌 인간 세계와 사회로 돌린다. 루소에 의하면 본질적으로 선하게 태어난 인간은 사회화가 되면서 자유인의 신분이 박탈되고 온갖 사슬에 묶이게 살게 된다. 때문에 인간은 선을 행할 가능성을 가진 동시에 악을 행할 가능성 또한 가지게 된 모순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연 모습 그대로 돌아갈 필요가 있으며 그때 누리게 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밝히고, 국가라면 마땅히 이러한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지성이 아닌 감정에 의해서 가능하며, 구체적으로는 양심이다. 그가 말한 진정한 자유는 제멋대로 구는 방종이 아니라 스스로의 원칙에 자신을 사슬 채우며 법에 복종시키는 실천적 개념이다. 이런 일반의지를 바탕으로 모두가 동의할만한 원칙에 자신을 내맡기는 국민주권으로 국가가 세워져야 함을 루소는 주장하고, 이는 후에 혁명의 기폭제가 된다.
이렇듯 계몽주의 사조에 의해 찬양받던 이성은 흄에 의해 의심받고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흄은 현존재, 신의 존재와 같은 개념을 참으로 전제하는 합리주의에서 벗어나서 이러한 형이상학적 토의를 집어던지고 분명하게 참으로 다가오는 감각적 경험만을 통해 철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의 이성이 관여할 수 있는 영역만을 탐구하여 일체의 기만을 철학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관심은 신으로 돌아간다. 독일 관념론이 칸트와 피히테에 의해 구색을 갖추기 시작하고 셸링과 헤겔에 이르면서, 철학을 절대성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인식된다. 이들에게 절대성이란 신적 특성인데, 이때의 신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아니다. 그저 유한한 인간과 현실의 근원이 되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특성이라는 뜻에서 신이다.
헤겔은 이러한 절대성을 정신이라고 이해하는데, 만물의 근원이 되고 그 안에서 살아 있는 신적 특성은 다름 아닌 정신이며, 따라서 인간의 정신에서야말로 신적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말한다. 이때 신 그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정신은 그 자체로는 완성된 것이 아니며, 변증법적 원칙에 따라 스스로를 생성 중에 있다고 말한다. 즉 인간의 자기의식을 포함하여 세계와 신 그 자신 또한 하나의 역사를 가지는데, 자기를 인식함과 동시에 찢겨 나가 다시 하나로 합치되는 과정에 있는 역사다. 이때 신은 인간에게서 스스로의 의식을 완성하는 단계에 이르기 때문에 인간과 현실 자체가 신적 정신의 가장 완전한 현현이라고 헤겔은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헤겔의 시도는 세계에는 끊임없는 무의미와 카오스가 신적 특성에 저항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다.
절대성과 무한성을 추구하던 근대적 형이상학은 포어이바흐, 마르크스를 통해 무신론과 유물론으로 방향을 틀며 니체의 니힐리즘으로 나아간다. 또한 세계대전 이후 실존주의가 인기를 얻으면서 이제 철학의 대상은 인간에게로 옮겨졌다.
이렇듯 철학의 주제는 시대가 바뀜에 따라 계속해서 바뀌어왔고, 오늘날 과학이라는 이름의 합리적 유물론이 그 자리를 대부분 꿰차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날 이성적이고 냉철한 이미지인 철학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이성적이고 열성적인 이미지인 종교, 즉 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발판 위에 서서 세상을 바라본다. 사람에 따라 튼튼하기도, 연약하기도 한 이 발판은 종교, 이성, 신, 물질, 정신, 감정, 자유, 절대성, 의지, 실존 등의 이름으로 불려 왔다. 어쩌면 <철학하기>란 다름 아닌 이 발판에 이름 붙이고, 견고하게 만들며, 유지 보수를 하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하나의 역동적 사건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철학의 뒷계단」에서 소개된 모든 철학자는 이 작업에 자신의 온 생애를 걸었다. 뒷계단을 통해 이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면서, 나는 과연 내 온 힘을 다하여서 <철학하고> 있는지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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