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ulitzer Prize Photographs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라고 주장했고, 인류는 많은 순간에 그의 명제를 반증하며 성장해 왔다. 창발(Emergence)이 그러하고, 무한집합과 프랙탈이 그러하다.
논리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항상 옳다. 그러나, 때로는 거센 비바람보다 따스한 한 줄기 햇빛이 나그네의 외투를 풀어헤치기 마련이다. 당위와 의무보다, 합리적인 설득보다, 논리적 귀결보다 한 마디의 따듯한 말 한마디가 사람들의 마음을 열듯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사진'이란 매체야말로 가히 전체보다 큰 부분이라 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사진은 맥락이 없다. 어떠한 전후상황도, 부연설명도, 논리적인 완결성도 없다. 그저 쏜살같이 달려가는 시간의 화살을 멈춰 세워 순간의 모습을 간직할 뿐이다.
원자 하나부터 거대한 은하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도 완벽하게 정지할 수 없는 현실 세계 속에서, 우리는 사진에서만큼은 정지된 현실을 볼 수 있다. 사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잠시 멈추어서 자신을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어쩌면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지구 반대편의 일들을 렌즈라는 사진작가들의 눈을 빌려서 마주함으로써 우리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을 것만 같던 소중한 것들에 시선을 둘 수 있게 된다.
나에게는 퓰리처상 사진전을 관람한 일이 그러한 계기였다.
신념과 신뢰는 무엇이 다를까.
사회는 신뢰로 이루어져 있다.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정말로 커피 한 잔인지 어떻게 아는가? 원두가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그것이 추출되고 제조되는 모든 과정을 직접 눈으로 지켜본 것도 아닌데, 하다못해 화학 조성을 분석해서 커피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내게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다른 어떤 물질도 아닌 커피라고 믿을 수 있는 걸까?
사회는 신뢰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이 공간이 커피 따위와 같은 음료를 판매하는 공간임을 신뢰하고 있고, 그 공간에서 각 음료에 책정된 가치만큼의 재화를 카페에 지불하면 그 음료를 받아먹을 수 있으리라 신뢰하고 있고, 그 음료가 정상적인 재료와 조리 과정을 통해 제조될 것을 신뢰하고 있다. 만약 신뢰가 없다면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 없고 모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인생은 너무나 피곤한 인생이지 않을까.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신뢰해야 한다. 아니,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사회 그 자신이다. 신뢰할 수 없는 사회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바벨탑이다. 그리고 신뢰의 대상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신념(信念),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굳게 믿으며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이다. 신뢰보다는 온갖 신념이 자리 잡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1958년 퓰리처상 수상작 「신념과 신뢰」(「Faith And Confidence」)는 여전히 그 가치가 유효하다. 이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우리 사회에 신념보다 신뢰가 가득해지기를, 수단이 목적이 되지 않기를, 본질이 흐려지지 않기를 그저 기도할 뿐이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사진들은 하나같이 보는 이로 하여금 온갖 윤리적인 딜레마와 도덕적 부담감, 도전을 던진다. 마치 당장이라도 무언가 올바른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시간이 흘러 일상 속에서 사진을 보고 있는 이들도 그러한데, 당시 현장에서 직접 그 장면들을 렌즈에 담은 사진작가들은 얼마나 큰 괴로움을 느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대다수의 퓰리처상 수상작들은 전쟁과 기근과 폭력을 담음으로 수상 받는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거대한 현실 앞에서 나라는 존재가 너무나 작게만 느껴질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니, 애초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조차 할 수 없는 복잡함과 모순, 딜레마에 놓여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진은 우리에게 반드시 즉시적인 행동만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나와는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지구 반대편에 눈을 돌리라고, 그저 주어진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닌 끊임없이 고민하고 부딪히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을 살라고, 요구한다. 한편으로는 참혹한 현실 앞에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파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라고, 그토록 딜레마에 빠져 고민하고 좌절했던 시간들이 밑거름이 되어 훗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고 격려한다.
다른 어떤 때보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가슴에 맺힌다. 그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윤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