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한 주를 보냈다. 나의 마지막 숙제, 둘째 아이의 대입 수시 원서 접수 기간이었다. 처음도 아니니 이번엔 좀 더 대범한 마음으로 소신, 적정, 안정의 적절한 분배로 지원서를 한 방에 쑥 접수시키겠다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제 긴 학부모의 시간에서 나를 좀 놓아주고 싶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공부는 자신들이 했는데 엄마가 뭐 한 것이 있다고 이렇게 유난을 떠냐고 억울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고3 엄마라는 타이틀 만으로도 날아가고 싶은 내 몸과 마음에 긴 줄 하나가 아이 방 문고리에 턱 걸려, 집 반경 수십 킬로를 벗어나지 못한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큰 아이는 재수 끝에 작년에 대학을 들어가고, 이번 해엔 둘째가 고3이니 만 3년째 대학 입학처 홈피를 기웃거리고 접수일을 메모하며 내 건망증을 두려워하면서 뭔가 놓친 게 없나 불안해했다. 작은 아이가 지원하는 대학들은 대부분 자소서를 필요로 했다. 아이는 여름 방학 때부터 자소서를 쓴다며 노트북을 열어두고 뭔가를 꽁알대고 있었는데 원서 접수 기간이 임박해서도 초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때 글 쓰는 엄마라고 어깨에 힘을 주며 아이에게 엄마의 능력을 화려하게 보여줬어야 하는데 나는 아이의 자소서 앞에서 두 눈만 끔뻑거리고 있다. 책 보고 글 쓰는 흉내를 내던 엄마의 무능력이 한 번에 처절하게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도대체 자소서는 무엇인지, 아이의 글을 어떻게 다듬어 줘야 할지 막막했다.
아이의 자소서는 자신의 학업역량, 학업 외 역량, 기타 지원 동기나 자신의 꿈에 대한 이야기, 이렇게 세분야로 나누어 쓰는 포맷이었다. 학교생활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지 않는 작은 아이의 학교생활이 한 장의 자소서에 날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아이의 일기장을 훔쳐 읽어보듯이 아이의 고등 3년의 이야기를 읽었다. 볼품없고 거친 문장 속에 아이의 학교생활이 듬성듬성 보인다. 매 실패투성이다. 어떤 공부를 해 보고 싶어 이렇게 해 봤는데 그게 잘 안돼서 이렇게 되었고.... 동아리 활동에서 무엇 무엇을 시도했는데 뭐가 잘 안 돼서 이렇게 되고... 그래서 이런 걸 배우게 되고... 이쯤 되면 실패 경험 자소서인데 꿈은 다시 창대하게 마무리되어 있다. 재밌기도 하고 또 힘들었을 학교생활이 눈앞에 아른거려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작은 아이는 이걸 쓰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이가 뜻대로 잘 안 되는 공부가 답답할 때, 동아리 팀원들 간에 협업이 잘 안돼 고민을 할 때, 그러면서 하고 싶은 건 많아 늘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엄마인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이가 쓴 초안을 가지고 나름 주어와 서술어가 상응하는 문장으로 바꾸고 어색한 단어를 다른 단어로 바꾸고 등등의 작업을 하는데 꼬박 일주일의 시간이 걸렸다. 입학처에서 원하는 글자 수에 도달하는 신공까지 보이려면 읽고 또 읽어야 했다. 그렇게 다듬은 문장을 다시 아들에게 보여주고 검사를 받아야 한다. 아들은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도와 다르다며 다시 수정하고, 이 표현은 과하다고 과감히 삭제당하고, 또 자신이 주장하는 어색한 표현을 끝까지 고집했다. 처음 초안을 읽었을 때의 감동은 사라진 채, 문장 수정 작업에 각을 세우며 서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이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했기에 어색한 문장만 교정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엄마의 문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몇 번의 수정 문서가 오고 가다 서로 타협하며 완성본을 만드는데 고난의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 몸과 마음은 지쳐가고 노트북은 꼴도 보기 싫어진다. 일기도 쓰지 않았다.
아이는 무사히 원서를 제출했다. 아이 방 문턱에 걸어두었던 긴 줄이 조금 느슨해지길 바랐는데 나는 하루 종일 아이의 자소서 삶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다. 자소서 뒤에 숨겨진 아이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내 마음에서 계속 맴돈다. 대학에 들어가려고 입학 사정관에게 보이기 위한 글을 썼는데 어쩌자고 엄마인 내가 아들의 일기 같은 글에 마음이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일까. 긴 파노라마 같은 아이의 학창 시절을 자소서 하나로 설명될 수는 없겠지만 쓰는 내내 우리는 그 시절을 계속 맴돌며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을 모두 모아 그것을 가슴속에서 한 번씩 토닥토닥 정리하고 적당한 모양으로 다듬어 낸 것 같다. 다 마무리된 지금, 아이는 후련하다고 했다.
아들의 자소서 주간 끝에 나는 왜 글을 쓰는가를 다시 생각한다. 나는 그저 내 생활을 기록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나의 사적인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했었다. 행복한 순간에 남기고 싶었던 글, 좋은 책을 읽고 오래 기억하고 싶어 쓴 글, 그리고 슬퍼서 마음 정리가 필요해서 쓴 글들이 블로그에 차곡차곡 쌓아갔지만 그 글이 나에게 혹은 읽어주는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길 은근히 바라고 있었나 보다.
글을 쓰면서 나는 늘 작가 박완서 선생님을 생각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있자면 혼란스러웠던 그 난리 통의 세월에 자신을 지키며, 아이들을 키우며, 글을 썼던 선생님의 강인함이 느껴진다. 선생님에게 글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저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선생님이 나이가 들어 투병하기 전까지 왕성하게 글을 쓰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마음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글을 쓰는 의미를 묻는 것은 우문일지 모른다. 그저 좋으니 쓴다고 하면 그만이다. 좋아서 하는 일에 이유가 무슨 대수인가.
자소서 사건 이후 덮어둔 노트북이 다시 빛을 발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자소서의 악몽이 희미해지고 작은 아이의 마음에서 다시 내 마음으로 전환될 때 아무 일도 아닌 척 노트북을 열게 되지 않을까. 잠시 기다리며 쓰고 싶은 마음을 기다리려고 한다. 그 마음이 차곡차곡 차오르면 나는 의미는 개나 물어가라지의 심정으로 노트북 앞에 앉을 것이다. 그 순간이 반드시 온다는 걸 나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