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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록소록 Mar 24. 2023

시적인 삶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아침 산책을 나가니 단단하고 거친 땅에 봄기운이 올라온다. 여기저기서 여리고 순한 싹들이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고 그 생명들은 숲 전체에 봄의 생기를 가득하게 한다. 기후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여기저기서 위태로운 개발 허가 소식이 들려오면 가슴이 철렁해지지만 자연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정화하며 버티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하다. 언제까지 화사한 봄기운을 받을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에 두 팔을 활짝 열고 가슴을 열어 그 기운을 느껴본다.



 오랜만에 담비 선생님을 찾아갔었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올해로 구 년째다. 작은 아이가 학교생활을 힘들어하면서 함께 상담을 받으러 다녔었다. 선생님이 키우던 개가 담비인데 아이는 담비를 아주 예뻐하며 담비 선생님 집 가기를 좋아했었다. 나의 내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눈 선생님이기에 상담 기간이 끝나고도 나는 선생님이 그리웠다. 점심을 함께 먹고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쉼 없이 떠들었다. 선생님은 내게 보여 줄 것이 있다고 했다. 선생님을 따라나선 길은 큰길을 벗어나 좁은 비포장도로로 이어졌다.



 짐작 대로였다. 환경 운동도 열심히 하는 선생님답게 근처 텃밭을 산 것이다.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멀리 도로가 보이지만 도시의 정취보단 산세 풍경이 좋은 곳이었다. 아직 정리가 덜 된 밭에는 아직 어린 대추나무도 보이고, 감자를 심겠다며 고랑을 파놓은 걸 보니 적지 않은 노동이 있었구나 싶었다. 텃밭 테두리에 먼저 심어둔 수선화를 보니 선생님이 감성이 느껴져 웃음이 터졌다. 텃밭인지 꽃밭인지 모호한 땅에 주저앉아 봄기운과 함께 커피를 마셨다. 옆 땅에는 적목련이 봉오리를 맺고 있었고 밭 노동을 하고 계시는 어르신도 보였다. 건강한 땅에서 무언가 꿈틀대는 생명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선생님의 얼굴이 텃밭에서 환하게 빛나 보였다. 땅이 주는 건강함이다.



 담비 선생님은 땅을 돌보면서 주변 이웃들과 함께 사는 마을 공동체를 꿈꾼다고 했다. 함께 노동하고 나누며 환경의 소중함을 함께 지켜나가는 공동체를 실천하고 싶다는 선생님의 계획은 소박하게 시작해서 점차 원대해지고 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모여 기후 위기에 대해 공부하고 직접 땅에 무언가를 심어가며 나누는 일을 그 시작으로 하겠다고 했다. 땅이 소중하고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결국은 우리가 잘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계신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얼마 전에 읽은 김해자 시인의 책이 생각났다. 땅과 이웃, 시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라는 시인의 산문집이다. 김해자 시인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 책만으로 시인의 따뜻한 감성이 느껴져서 한번 읽고 마음에 새기며 또 읽게 되었다. 김해자 시인은 시를 쓰지 않을 뿐 삶 자체가 시인인 이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적인 삶과 태도로 이웃과 세상을 만나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이 아니겠냐는 시인의 글이 가슴에 남았다. 글로 책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일거리가 많으면 서로 돕고 먹을 것이 생기면 나눠 먹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살아가는 시골의 삶이 무엇 하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삶으로 느껴졌다. 죽을 때까지 함께 하자는 이웃들의 속삭임이 어느 재력가의 청혼보다 더 든든한 힘이 될 것 같아 책을 읽는 내내 시인의 삶에 빠져들었다.



 도시인들이 막연히 귀촌을 꿈꾸긴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잠깐 나들이가 아닌 시골에서 마음을 붙이고 살아가는 일은 짐작하지 못할 많은 문제들이 있을 거라 혼자 생각했었다. 시인의 글은 단순한 귀촌이 아닌 우리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도시인들이 귀촌을 두려워하는 것은 현재의 삶의 방식을 내려놓지 않은 채 함께 사는 시골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제라도 경쟁 대신 우정과 나눔과 환대라는 친구를 불러들여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면 지옥이라 할지라도 춤추며 기꺼이 그 순간을 견딜 수 있지 않을까요."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김해자>



 시인이 말하는 시골의 삶과 담비 선생님이 꿈꾸는 공동체 삶을 나 역시 상상하게 된다. 두터운 벽, 무관심, 외로움, 경쟁의 삶이 답이 아니라면 우리가 살아갈 방향은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노동과 시가 크게 다르지 않듯이 다양한 사람들의 경계가 모호해져서 서로 연대하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습관적인 삶에서 좀 더 인간다운 삶에 대해 질문해 보고 꿈꾼다면 우리에게도 작은 변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순수하게 자신을 지키며 있는 그대로 내어주려는 자연과 조금 더 가까워지는 삶은 함께 어울려 시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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