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내리는 비였다.
모든 일을 제쳐두고 소리 없는 비를 느끼러 나가고 싶었다. 온라인 수업을 받고 있는 아들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신속하게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우산을 들고 나섰다. 비가 오는지 오지 않는지는 눈이 아닌 몸으로 느껴야 알 수 있을 고요한 비가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다. 그래, 이래야 봄 비지!
동네 한 바퀴를 걷고 저렴하지만 좋은 커피를 내려주는 동네 커피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해오는 루트를 마음속에 그렸다. 걷는 내내 주변의 소음도 비의 고요함에 묻혀 타박타박 내 발걸음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서늘한 공기의 청량함에 기분이 맑아진다.
한적한 거리에 마주 보며 걸어오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보통 키에 적당한 뱃살과 염색해서 넘긴 머리는 희끗 드러난 두피를 가릴 만큼의 숱이 있었고 무표정하지만 눈매는 다부져 보였다. 그도 나도 우산을 쓰고 있어 적당하게 몸을 피해 지나치려 하는 데 익숙한 얼굴인 듯했다.
'누구였더라...'
아파트 주민에서부터 주변 가게 사장님, 그리고 선거 벽보에 붙었던 인물인가 등등을 떠올리다가 한순간 '아! 불독!'하고 내뱉었다. 불독이었다. 그 순간 다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저만치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불독. 프렌치 독이라고 할 수 있고 견종 불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나의 학창 시절 불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다. 여고생이 되어 프랑스어를 처음 배운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었다. 로맨틱한 영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이슬 굴러가는 듯한 그 언어, 소피 마르소의 아름다운 미소 끝에 청순한 입술로 터뜨리는 그 '봉쥬르~'를 내가 배울 수 있다는 건 행운처럼 느껴졌다. 몇 마디라도 알차게 배워 꼭 멋지게 발음해 보리라 다짐했는데 그 기대는 '불독'과 함께 산산이 깨져 버렸다.
우리의 첫 불어 선생님은 낭만이라고는 볼 수 없었고, 프랑스와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을까의 의문만 수업시간 내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때는 더 작고 퉁퉁한 몸매에, 근심이 많은 듯한 표정이었다. 밤잠을 설치는 듯 항상 졸린 눈에 얼굴엔 프렌치 불독의 처진 주름이 깊이 패어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불어 수업이라는 게 큰 의미가 없는 수업임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는 분이었다. 수업은 거의 각자의 자습으로 이루어졌고 나의 불어에 대한 관심도 멀어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불독은 언제나 창밖의 허공에 시선을 둔 채 그의 은밀한 또 다른 숨겨진 삶을 고민하시는 것 같았다.
소문은 무성했다. 불독 선생님이 알고 보면 주식의 마이더스 손이라는 둥, 선생님은 간판 직업일 뿐 그의 수입의 대부분은 밤에 나온다는 둥, 선생님 월급은 그의 담배값이라는 둥... 소문에 대한 진실을 알아내지 못한 채, 우리는 불어와 담을 쌓은 채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젊고 다사다난한 우리의 청춘시절, 그는 우리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갔다. 그런 불독 선생님이 졸업한 지 이십 년이 지난 지금, 거리에서 스쳐가던 순간에 그의 이름도 아닌 별명이 내 입에서 자동 발음될 줄이야...
놀라운 일이었다. 불독이란 별명이 떠오른 이후로 그에 대한 나의 기억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어인지 불어인지 구분할 수 없었던 우물우물 내뱉던 그의 말소리이며, 한 번씩 '켁~'하며 쏟아내던 마른기침이며, 그리고 힘없이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그 시선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잠시 보았던 선생님의 모습도 이십 년 전의 모습 그대로, 오히려 더 젊어진 듯한 모습으로 보였으니 나 혼자 다른 세상을 여행하고 온 것 같은 착각마저 일게 했다.
여고시절 불독 선생님이 아빠 정도의 중년의 아저씨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선생님의 모습 역시 노년보다는 중년에 가까워 보인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십 년 전 생기발랄했던 그 여고생은 이렇게 다 큰 아들들을 키우는 중년 아줌마가 되어 있는데 선생님에게는 도대체 어떤 마법이 있었던 걸까. 다시 되짚어가서 공손히 인사드리고 그 비결을 묻고 싶어 진다.
여고 동창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연우야, 그 불독 선생님 기억나지? 불어 선생님 말이야... 그때 중년 나이 아니었어? 근데 지금 마주쳤는데 왜 그때 모습이랑 왜 똑같은 걸까? 진짜 신기하다. 설마 그때가 이십 대의 모습은 아니었겠지?"
"에이, 잘 못 본거 아냐? 아니면 아들인가? 아니면 노화 방지 시술을 받으신 건가?...'
우리의 추측과 상상력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우리의 여고시절을 떠올리며 행복해졌다. 그때는 불독 선생님의 무뚝뚝하고 무성의함도 시시덕거릴 이야깃거리였다. 나른하고도 안갯속 같았던 그 시절, 내 의지와 상황의 흐름이 엇박자처럼 비껴 나가던 그때의 기억들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비 오는 날의 커피는 진리다. 진하고 쌉싸름한 맛과 향이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다음번에 불독 선생님을 만나면 어떻게 한 번 인사를 해 볼까 혼자 상상한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여고 다녔던 학생이었어요... 그때 선생님께 불어 배웠었는데...(사실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저 대학도 불문과 진학했었어요...(그런데 대학 가서 심하게 고생하며 다시 알파벳부터 공부했었다...) 선생님 어떻게 그때랑 하나도 변한 게 없으세요... 너무 젊으셔서 깜짝 놀랐어요...(이건 진심이다. 이 상황에서 비결을 여쭙는 건 좀 그렇겠지?...) "
그러고 보니 마침 오늘이 스승의 날이었다. 불독 선생님을 생각하니 그 외에 나의 감자 선생님, 닭 선생님, 그리고 고돌 선생님이 마음에 떠오른다. 내 소중한 학창 시절을 따뜻한 기억으로 만들어 주신 분들이다. 다시 뵐 수 있다면 학창 시절의 선생님과의 기억이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다고 온 마음을 다해 말씀드리고 싶다.
"선생님, 잘 계신 거죠? 감사합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