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열한 시가 넘어 들어온 고3 큰 아이가 아빠에게 짜파게티를 끓여달라고 했다. 남편은 자신이 짜파게티를 가장 잘 끓인다고 늘 큰소리를 쳐왔기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열두 시에 냄비에 물을 채우고 있었다. 반려묘 달이는 연신 코를 킁킁대며 왔다 갔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미안, 달아. 이건 형아 간식..."
큰 아이는 짜파게티를 먹으며 코로나가 이젠 너무 지겹다고 투덜거린다. 이제 그만 마스크를 벗고 살고 싶다는 말에 우리 모두 동감했다. 올초 2월 마스크를 착용하기 시작했을 때 코로나라는 바이러스가 이렇게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힐 줄 몰랐다. 길어도 2,3개월이면 다시 일상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남편은 짜파게티를 끓이며 코로나가 해결되어도 인간에게 닥칠 앞으로의 고난들이 얼마나 험난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많은 과학자들이 더 성질이 나쁜 바이러스 출현을 예고하기도 했고 기후변화와 넘쳐나는 쓰레기 더미, 그리고 원자력 발전소 폐기물 처리 등등 우리 앞에 놓인 심각한 이야기들이 이제 가까운 미래의 재앙으로 닥쳐올 것을 실감하게 된다.
무심히 들으며 먹던 아들이 심각하게 말했다.
"엄마, 우리 이 씨의 대는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아."
"뭐라고?"
"내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어. 그냥 내가 아이를 낳지 않고 우리 대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어... 정말? 너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얼마나 이쁘고 좋을 텐데 정말 아이 안 낳을 거야?"
아들은 단호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지구의 환경이 더 좋아지기는 힘들 것 같다고 했다. 반박할 수가 없었지만 마음은 씁쓸했다.
토요일 오전, 커피 한 봉지를 사기 위해 나섰다. 아직은 선선한 아침 바람이 살랑거린다. 놀이터에선 마스크를 낀 개구쟁이들이 신이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파트 출구 즈음 다다랐을 때 길 건너편에 한 할머니와 초등학교 3,4학년쯤 되어 보이는 손녀가 다정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게 보였다. 할머니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손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내가 그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할머니는 이런 말을 손녀에게 하고 있었다.
"혜주야, **이는 혜주 친구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친구의 친구이기도 해..."
그 말만 듣고도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마도 혜주는 자신이 친하고자 한 친구가 다른 친구와 더 친하게 지내는 상황이 싫었나 보았다. 자신의 친구이기만 하고 싶은 마음, 나 역시 어릴 적 단짝 친구에게서 느꼈던 마음이라 그때를 생각하며 미소 지어졌다. 혜주는 할머니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 할머니는 친구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에 대해 손녀에게 가장 이해되기 쉬운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조용히 손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긋한 목소리로 이런 지혜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할머니, 자신의 속마음을 할머니에게 털어놓고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는 혜주. 그 상황의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서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뜨겁고 물컹한 기운이 몰려왔다. 이 그림 같은 장면을 그들의 목소리와 함께 저장해 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 속에 있는지를 모르는 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당사자들인 그들은 모를 혼자의 감동을 또박또박 되새기며 걸었다. 나도 입만 열면 지혜와 용기가 술술술 입에서 그리고 몸으로 흘러내리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 몸 세포 하나하나에 온갖 따뜻하고 소중한 경험의 기억들이 박혀 있어서 손녀가 어떤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그 마음을 잘 읽을 수 있으며 흘러넘치는 지혜의 말을 과하지 않게 아주 조금씩 조용히 건넬 수 있는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와 혜주 사이에 오고 가는 보이지 않는 공감의 소통과 사랑이 내 눈에 선명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 할머니가 나라면 어떻게 혜주와 이야기했을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아! 갑자기 이 씨의 대를 여기서 끊겠다고 했던 아들의 선언이 떠올랐다. 이러면 나는 그런 할머니가 될 수 없는 게 아닌가. 혼자 김치 국물을 마시고 있었던 거다.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은 갈수록 더 열악해지는 상황은 맞지만 그 때문에 오늘의 할머니와 혜주처럼 귀한 감정의 교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인간은 환경을 파괴하고 환경은 다시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없게 복수를 가한다. 우리에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족, 친구가 존재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얼마나 살만해지는가에 대해 큰아이에게 이야기하지 못한 어젯밤이 후회가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아직 지혜가 한참 모자란가 보다. 나의 진심을 모아 힘든 환경에서도 잘 살아나갈 수 있는 우리의 따뜻한 세상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진다. 물론 결혼 안 하겠다는 놈이 제일 먼저 결혼하듯 아이 낳지 않겠다고 말하는 아들 말도 그리 신뢰가 가는 건 아니다.
**다른 이야기
글쓰기 동지가 멋진 할머니 스티커를 선물해줬다.
나는 한순간에 그 그림들에 반해버렸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할머니, 담배 피울 때 눈치 보지 않으며, 용감하게 브라를 벗고 선탠 할 줄 아는 할머니, 그리고 달콤한 아이스크림도 맛나게 먹는 할머니... 이 할머니에게 사랑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아... 세상엔 왜 이렇게 멋진 할머니가 많은 것인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나다워질 나의 모습이 기대가 된다. 아! 나이 들어가는 것에 이런 원대한 목표가 생길지 미처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