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 산책하며 든 생각
새벽부터 핸드폰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한파주의보를 알리는 건조한 메시지이다. 역대급 한파가 예상되니 가능한 외출을 자제하고 도로 결빙을 조심하라는 안내 문자가 몇 통 연달아서 오고 있었다. 얼마나 추운 걸까. 외출을 자제하라는 메시지에 오히려 호기심이 일어 창문을 열어본다. 싸하고 날카로운 바람이 집안으로 휙 몰려들었다. '아, 그래 이게 겨울바람이지.' 괜스레 기분이 상쾌해진다.
벌써 이십 년이 넘은 이야기이지만 잠시 캐나다에 머무를 때가 있었다. 캐나다 중부의 서스캐처원이라는 곳으로 지역 이름만 특이할 뿐 아무 특이 사항이 없는 작고 평화로운 작은 도시였다. 봄, 여름, 가을의 평화로움과는 달리 그곳의 겨울은 혹독했다. 겨울 내내 눈이 녹지 않은 채 기본 십 센티 이상은 쌓여 있었고, 주민들은 매일 아침 눈을 쓸어내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처음 캐나다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을 때 캐나다 가족들은 내게 오븐 장갑같이 생긴, 아니 오히려 그 두배쯤 되는 두께의 투박하고 질긴 장갑을 내게 선물했었다. 그 장갑을 끼고서는 그저 눈사람의 포즈 외엔 손의 구실을 전혀 할 수 없게 만드는 장갑이었는데 그들은 그게 바로 캐나다의 겨울이라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였다.
그런 혹독한 추위의 긴 겨울에도 각자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이 있었다. 햇살이 있는 낮동안 모든 일과를 처리하고 어두워지기 전에 관공서나 상점들은 서둘러 문을 닫고 긴 밤을 준비했다. 밤은 세상의 모든 스위치를 내려버린 것처럼 고요하고 춥고 쓸쓸하고 길었다고 기억한다. 다행히 대학의 건물들은 긴 복도 같은 통로로 건물 사이를 연결되어 있어 낮시간 동안 활동을 할 때에는 가벼운 재킷만으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이른 아침 캐나다 가족들은 뜨거운 차와 시끄러운 티브이 뉴스로 시작했는데 뉴스에서 빠질 수 없는 건 바로 날씨에 대한 호들갑스러운 안내 멘트였다. 추운 날씨가 어제, 오늘의 새로운 이야기는 아닐텐데 기상캐스터는 오늘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눈이 또 얼마나 내릴 것인가에 대해 처음 일어난 큰 재해처럼 급박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경고했다. 티브이 화면 아래 자막에는 외출할 때 털모자를 쓰고 나가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이 무심하게 떠다녔다. 온도가 급강하하면 사람의 머리가 터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가장 두툼한 패딩점퍼를 입고 털모자와 장갑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역시 어제와는 다른 날카로운 공기가 피부를 자극한다. 오늘따라 바다 색깔은 더 짙고 고요하다. 씩씩하게 찬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고를 하며 내 몸 가장 깊숙한 곳까지 찬바람을 불어넣었다. 온몸의 세포가 겨울을 체감한다. 바다는 한적했다. 평소보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개를 산책시키기 위해 나온 몇몇의 사람들뿐이었다.
넓은 광장에 이르렀을 때 삽살 개과의 부슬부슬한 개가 열심히 비둘기를 쫒고 있었다. 비둘기들도 그리 겁먹은 건 아닌 듯했고 개의 위협에 잠시 놀란 척 날아올랐다 다시 내려오고 또 도망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개의 얼굴이 털에 파묻혀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동작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놀이에 빠져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주위엔 추운 바람을 맞으며 그의 행동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개 주인이 있었다.
사람의 본성은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바라보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가 반려동물을 키우면서 그들의 행복을 위해 수고스러움을 자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일 수 있다는 소중한 가치를 알려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주인의 행복을 위해 온 몸을 비비거나 기쁨을 표현하는 동물들의 마음 또한 나는 믿는다. 이 한파를 뚫고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을 나온 주인들과 서로 우위를 가릴 수 없는 깊은 사랑의 나눔일 것이다.
추운 날씨로 청명해진 하늘과 개들의 신난 움직임들을 구경하며 바닷가 한 바퀴를 걸었더니 몸이 다시 훈훈해진다. 내 몸속의 기운들이 차가운 겨울바람으로 정화가 느낌이다. 한파에 냉수욕을 마치고 온 사람처럼 기세 등등하게 집으로 들어섰다. 이른 아침 춥다고 생각했던 집안 공기가 덥게 느껴진다. 볕이 제일 따뜻하게 들어오는 방구석에서 가장 길게 몸을 늘려 뻗은 체 만세 포즈로 잠자고 있는 반려묘 달이가 눈을 괴슴츠레 뜬다. 추운 세상을 알지 못하는 세상 마음 편한 고양이이다.
'그래.. 네가 행복하니 나도 행복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