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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리셋코치 Aug 15. 2020

엄마, 술 취하셨어요??

 라디오 사연에나 나올법한 이야기

 가끔 혼자 여행을 한다. 여수, 순천을 1박 2일로 간 적이 있었는데 꽤 좋았던 기억이 있다. 특히 순천만을 지나 올라갔던 용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그야말로 기가 막히다. 황홀한 일몰을 선사한다는 낙조 시간에 맞추면 더 좋았겠지만 차 없이 다니는 나 홀로 여행이 언제나 그렇듯 이곳저곳 다니려면 시간 안배가 중요하다. 원하는 시간에 내 맘대로 이동이 불가하니 시간과의 타협을 통해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때로는 예정했던 것에서 한 두 가지쯤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비록 낙조 시간은 아니었지만 용산 전망대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순천만 습지의 전경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훌륭했다. 혼자 여행의 가장 좋은 점은 사색의 시간을 준다는 점이고 가장 나쁜 점은 너무 좋은 풍경을 마주할 때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며 갖는 아쉬움이다. 다음에 엄마와 꼭 한번 같이 와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전망대를 내려왔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실제 엄마와 함께 다시 순천만을 찾았다. 순천역에 도착해 우선 무거운 짐을 코인 로커에 맡긴 후 애매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스낵 코너에서 대충 주전부리할 만한 무언가를 시켰다. 제대로 된 식사는 순천만 구경 후에 하기로 했다. 정확히 주문한 메뉴가 뭐였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굉장히 맛이 없었던 것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그러고 보면 때때로 미각이 기억하는 맛은 우리의 기억 저장고에 더 강하게 흔적을 남기나 보다. 엄마도 몇 젓가락 하다가 날 보며 영 아니라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주섬주섬 가방에서 여러 종류 알약들이 구분되어 담긴 휴대용 플라스틱 약통을 꺼내시더니 그중 흰색 알약 하나를 물과 함께 입에 넣고 삼켰다.  


“무슨 약이에요?”


“으음... 비타민...”


“아아...”


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대충 하루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작은 크로스백을 들고 일어섰다.


"엄마... 이제 택시 타러 가요”


여행 오기 전에 현지에서는 무조건 택시로 이동할 거니까 잔소리하지 마시라고 미리 못 박았었다. 그래야 짧은 시간 동안 더 많은 곳을 볼 수 있다고 나름의 논리적인 이유를 들어 밑밥도 깔아 놓았다. 말로 하는 설득은 나의 전문이니까.... 엄마도 여행 내내 여기에 대해 별말씀하지 않았다. 나오자마자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를 얼른 잡아타고 순천만으로 향했다.


택시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비수기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매표소로 가 입장권을 구매하고 입구로 들어섰다. 얼마간 도보로 이동한 후 드디어 순천만 갈대밭의 장관이 펼쳐지는 시작점에 다다랐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감탄사와 함께 여기저기 눈에 들어오는 놓치기 아까운 풍경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으며 일부러 천천히 발검음을 옮겼다. 드문드문 무리 지어 있는 철새들이 보였고 사이좋게 하늘을 나는 솔개들도 보였다. 드디어 용산 전망대 초입에 도착해 낮은 야산을 느린 걸음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칠순이 훨씬 넘은 연세에도 엄마는 여행지에서 늘 군소리 한번 없이 잘 따라다니신다. 여행 가이드 수준으로 여행을 좋아하는 언니는 거의 매년 해외 자유여행에 엄마를 모시고 간다. 엄마 무릎 관절이 그래도 괜찮을때 한 군데라도 더 구경시켜 드리고 싶은 딸로서의 마음이 가장 크겠지만 실제 여행코드도 엄마와 가장 잘 맞는다는 얘기를 했었다. 언제 올지 모를 해외 여행지이기에 하루 열 시간 도보의 강행군에도 엄마는 힘들다는 내색 한번 하시는 적이 없다. 오래전 유럽을 갔을 때도 우리 잠깐 마트 다녀올 테니 엄마는 호텔에서 쉬시라고 해도 해외까지 나와 호텔에서 시간 보내는 것만큼 무의미한 게 없다며 따라 나오셨던 분이다.


그런데 이 날 참 이상했다.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길이라고 해봤자 산책로에 가까운 30분 미만의 완만한 야산일 뿐인데 어느 순간 엄마의 말수가 확 줄어들었다. 좀 전까지 감탄사를 몇 분 간격으로 뱉으시던 분이 갑자기 조용하다. 곁눈으로 슬쩍 보니 힘든 안색이었다.  


"엄마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안 좋으세요?"

.........

"이상하네, 갑자기 몸이 휘지네..."

.........

"여기 이 정도면 경사 완만한 건데.... 계속 올라가실 수 있겠어요? 그리 오래는 안 걸리는데..."


언제 또 올까 싶어 슬쩍 말끝을 흐렸다. 몸은 힘들지만 엄마도 올라가 보자 해서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엄마 팔을 꽉 붙들고 나한테 최대한 기댈 수 있게 자세를 잡은 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올라갈수록 내 몸에 느껴지는 엄마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얼마큼 올랐을까... 눈 앞에 벤치가 하나 보였다. 도저히 안 되겠다며 엄마가 벤치로 곧장 가더니 바로 누워 버렸다. 공공장소에서의 예의를 중요시하는 분이 사람들이 다니는 산책로 벤치에 바로 누웠다는 건 그만큼 상태가 심각하다는 거다. 나도 벤치 끝 자리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엄마를 쳐다봤다.    


비수기에 와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몇몇 아주머니들이 궁금증 어린 시선으로 우리를 흘끗 쳐다보며 지나갔다. 가끔 날아와 주변을 서성이는 까치와 참새들 말고는 이제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적을 깨고 엄마가 몸을 움직이더니 일어나 앉았다.


"아우, 진짜 이상하네... 멀쩡하다가 왜 갑자기..."


"엄마 지금 좀 괜찮아요?"


"살짝 나아진 것도 같고... 잘 모르겠네... 일단 올라가자"


"얼마 안 남긴 했어요... 5분쯤 올라가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진짜 괜찮겠어요?"


"일단 올라가..."


다시 엄마를 부축하고 산을 올랐다. 엄마가 기댄 오른쪽 어깨가 뻐근하고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엄마는 밀밭에만 가도 취한다는 딱 그 유형이다. 가끔 막걸리 한 모금에도 알딸딸하다며 소파에 누워 계신다. 그런 엄마가 갈지자로 휘청거리며 걷는 모습이 흡사 만취한 사람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만취한 사람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 같은 상황에 나의 어깨 근육이 힘들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정상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순천만 풍경을 눈에 담는 대신 엄마는 돌계단 같은 곳으로 바로 가서 얼른 앉았다. 나도 전망대에서 휴대폰 카메라에 풍경을 담다가 이내 엄마 옆에 걸터앉았다. 사실 맥이 좀 빠지기도 했다. 별 것 아닌 풍경에도 늘 감탄사를 내뱉으며 나에게 "저기 좀 봐봐... 넌 이게 안 좋니?" 하며 이해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시곤 했던 분이다. 그럼 나는 "나도 똑같이 느껴... 다만 엄마나 언니보다 감흥을 느끼는 시간이 짧을 뿐이에요"하고 받아쳤었다. 그랬던 양반이 정말 보기 드문 풍경을 앞에 두고 맥없이 앉아만 있다. 어떤 증상인지 여쭤보니 숙취 후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났을 때 딱 그 상황인 듯하다. 30대 중반까지도 분기별로 나에게 한 번씩 찾아왔던 너무나도 익숙하고도 괴로운 그 느낌....


십분 쯤 지났나? 엄마는 이제 정말 좀 괜찮아진 것 같다며 그제야 일어나 전망대 주변을 돌며 펼쳐진 풍경을 감상했다. 그렇게 10분 정도 구경하다 우리는 다시 왔던 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엄마 상태도 한결 나아졌고 내리막이라 아까보다 훨씬 수월했다. 용산대 입구까지 내려와 다시 갈대밭을 지나 그렇게 천천히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 얼굴에도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엄마가 가방을 뒤져 다시 휴대용 플라스틱 약통을 꺼내 들었다.


"그건 왜요? 두통약 드시려고?"


물음에 대답하진 않고 칸 별로 구분되어 있는 알약들을 유심히 살피시더니 갑자기 알 수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보다 길게... 나중에는 얼굴까지 벌게지며 눈물까지 흘리시는 거다.


"엄마 갑자기 또 왜 그래? 진짜 취하기라도 한 거예요?"


어리둥절해하며 물어도 엄마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더니 웃음을 삼키고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비타민이... 비타민이... 푸흡.."


"비타민이 뭐? 왜요?"


엄마 웃음보가 다시 터졌다. 도통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난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아까 먹은 비타민이... 비타민이 아니고 수면제였어... 어쩜 모양도 크기도 똑같이 생겼지 뭐니"


이번엔 내 차려다. 듣다가 너무 기가 막혀 나도 모르게 뿜어버렸다. 모녀가 갑자기 오랜 시간 웃어대니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 했을 거다. 그날 하루 종일... 정확히 말하면 자기 직전까지 서로 몇 번을 웃었는지 모른다. 정말 라디오 사연 소개에나 나올 법한 상황이었으니까...


어처구니없던 그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수시로 기억에서 꺼내는 좋은 추억이 됐다. 아직도 엄마와 얘기하다 가끔 이 얘기를 기억의 서랍장에서 꺼내곤 한다. 과정은 너무나 당황스러웠지만 끝이 코미디로 끝나 오히려 다행인 순간이었다. 밀밭에만 가도 취하는 엄마의 만취상태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를 봤으니 말이다. 그것도 술 한잔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의 슬랩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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