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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리셋코치 Aug 16. 2020

그녀가 또 눈알을 굴리고 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A는 그날도 나에게 하고 싶은 얘기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나도 인내심을 갖고 열심히 들어줬다. 나의 장점 중 하나인 경청과 공감.... 하지만 장점도 진정성이 아닌 의도함이 될 때 슬슬 피로가 누적되기 시작한다. 끝을 알 수 없는 그녀의 얘기에 잠깐 딴 쪽으로 새어나가려는 집중력을 다시금 힘들게 부여잡고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중간중간 추임새는 여자들끼리의 기본 예의니까 적절히 반응도 해가면서.... 저녁 시간 압구정 펍은 그날따라 유난히 시끄러웠다.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소음이 합쳐져 귓가에서 웅웅 거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A의 긴 스토리 하나가 막을 내렸다. 마지막 인내심을 쥐어 짜내며 벙어리처럼 듣기만 하던 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리 긴 얘기도 아니었다. 그런데 촉이 지나치게 빠른 나의 레이다에 A의 흔들리는 눈빛이 포착됐다. 분명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지만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닌 눈빛.... 눈은 나를 향하고 있지만 동공까지 나에게 맞춰진 건 아니었다. A의 머릿속은 뭔지 모르지만 굉장히 분주하고 바빴다.  

눈치가 빠른 난 얘기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고 일부러 대충 끊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대게는 이런 상황에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가 일반적인 반응이다. 나의 얘기가 귀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멈췄으니까.... 역시나 이때다 싶어 바로 치고 들어오는 A..... 흔들리던 눈빛은 사라지고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런. 데.... 정확히 아까 본인이 했던 얘기에 바로 이어지는 스토리다. 나의 이야기에 대한 반응이 아닌....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태어나서 이런 종류의 사람을 난 그때 처음 경험했다. 물론 자기 얘기만 하는 정신없이 수다스러운 사람은 이 세상에 많다. 하지만 상대방 얘기를 듣는 순간에도 자신이 다음에 할 얘기를 생각하느라 눈알을 굴리는 사람은 드물다. 남들 얘기할 때만 정신이 안드로메다에 가 있는 사람....


A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에게 매우 친절했었다. 동갑이라 반가운 마음도 있었을 거다. 누군가 나에게 호의를 갖는다는 건 고마운 일이라 나도 금방 마음을 열었다. 처음 만나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던 초반에도 낌새는 있었지만 나의 지나친 예민함이라 생각했었다. '에이, 설마' 싶어 솔직히 나의 촉이 틀렸기를 바랐다. 그래서 몇 번 간을 봤지만 내 생각이 단지 촉이 아닌 팩트라는 재확인만 했을 뿐이었다.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A가 나에게 잘해주려고 했던 건 나도 잘 안다. 그건 진심이었을 거다. 나도 허점 투성이인 인간이기에 누군가의 한 가지 단점만 가지고 상대방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쌍방향이어야 하는 인간관계에서 대화와 소통의 일방향은 내가 용인하는 단점의 범주를 벗어난다. 관계에서는 너무나 치명적이다. 


A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다행히 관계 초반이었기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갈등이나 불협화음이 있었던 건 물론 아니다. 일상적 관계는 유지하되 더 곁을 내어주지 않았을 뿐이다. 관계에는 단계가 있다. 조직이라는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하고는 더욱 그렇다. 이직으로 인해 끊어질 관계인지.... 공간과 관계없이 계속 이어질 관계인지.... A와는 전자였다. 난 남았고 그녀는 이직과 함께 떠났다. 우리의 마지막 연결고리였던 공간의 지속성이 사라지니 관계도 자연스럽게 끝을 맺었다. 그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다.


A의 소식은 잘 모른다. 다만 아주 가끔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낼 타이밍을 노리며 흔들리던 눈빛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당시에는 ‘이건 뭐지’ 하는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그냥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런 성향은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 인간의 심리 형성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이제 이해 가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래?’가 아니라 ‘왜 이런 성향을 가지게 되었을까?’하는 궁금증이 더 앞선다. 지금의 나라면 과거 그녀에게 다른 반응을 했을 거다. “A 씨, 지금 정신 가출한 것 같은데... 무슨 생각해요?"라고 농담과 진담을 5:5의 비율로 적절히 섞어서.... 그녀에 대한 나쁜 감정 따위는 전혀 남아있지 않다. 그럴만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A가 적어도 지금은 상대방의 얘기에 진정성을 담아 집중하는 사람이 되었기를 바란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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