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어렸을 때 빼고는 사춘기 이후 울었던 적이 몇 안됐던 것 같아요. 감정이 메말라서였다라기 보다는 내 감정을 스스로 절제하고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무언의 압박 내지는 강요를 받아와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 살면서 가족 앞에서 울뻔한 적이 몇 번 있었네요.
나는 또래에 비해 군대를 다소 빠르게 다녀왔어요. 여느 대학교 1학년 학생처럼 큰 목표의식 없이 놀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다가,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고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친한 고등학생 친구와 함께 동반입대를 하기로 결정했어요. 동반입대를 하면 그 친구와 같은 부대에 배치가 된다는 이점 이외에도 입대날을 우리가 직접 고를 수 있는 이점도 있었죠. 친구와 함께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로 입대날을 잡았습니다.
사실, 입대 전날까지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입대 전날 나는 집에 홀로 있으면서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손편지를 일일이 썼습니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평생 군대에 있을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슬픈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지 몰랐어요. 실제 눈물이 나지는 않았지만, 가슴속에 매우 뜨겁고 강렬한 무언가 목을 너머 코끝까지 찡하게 올라오고 있었어요.
학창 시절 큰 말썽을 부리거나 부모님을 힘들게 한 아들은 아니었지만, 그간 잘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많이 남았어요. 그렇게 입대 전 나의 귀중한 하루는 내 마음도 모른 채 속절없이 흘러갔습니다.
아빠는 입대날에도 어김없이 동행해 주었어요. 아빠도 군생활을 해 보았고, 시대적으로 훨씬 힘든 군 생활을 해 본 장본인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마음이 굉장히 아팠을 것 같아요. 시대는 달라지고 군 문화와 시설은 눈에 띄게 좋아졌지만, 그래도 군대는 군대니 까요.
평소 유머러스한 아빠도 그날만큼은 얼굴에 어두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어요.
입대날에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7-8명 정도 동행해 주었어요. 훈련소 앞에서 식사를 간단히 하는데, 밥맛이 있을 리가 없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눈만 말똥말똥 뜨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거예요.
모든 채비를 마치고 위병소에 도착했고, 머지않아 입대할 장병들은 마중 나온 가족, 지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연병장 가운데로 집합하라고 방송이 울려 퍼졌어요.
이때 실감이 나더라고요.
'내가 군대를 가는구나.'
'철부지 이 어린아이가 벌써 커서 군대를 가서 나라를 지키는구나.'
방송이 계속 울려 퍼지고 많은 입대 장병들이 이미 도열을 하고 있어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어요.
나는 아빠, 엄마와 차례로 진한 포옹을 나눴습니다.
아마 이때 내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주체하지 못했다면 그 자리서 펑펑 울었을 거예요. 이미 주위에는 곡소리가 나기 시작한 부모님도 꽤 많이 있었어요. 그 울음소리가 내 마음을 더욱 슬프게 했어요.
아빠와 포옹을 한 뒤, 스치듯 얼굴을 보는데 아빠도 눈시울이 약간 붉어져있더라고요. 나는 더 이상 아빠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어요. 동반입대하는 친구와 씩씩하게 연병장 대열로 들어가면서, 나는 단 한 번도 뒤를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뒤에서 보고 있을 아빠, 엄마와 내 친구들 얼굴을 보면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요.
성인이라고는 하지만 갓 20살 넘은, 여전히 부모님 울타리 아래 있을 어린 청년이 부모님과 처음 떨어져 보는 순간이자,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불특정 다수들과 관계를 맺으며 2년간 살아야 하는 군대이기 때문에 군대가 내 인생에 주는 의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어요.
훈련소에 배치가 되자, 가족들의 편지를 받아볼 수 있었어요. 훈련 조교가 말했어요.
"1번 훈련병, 편지 왔다. 앞으로"
편지를 받아보니 아빠가 어떻게 알고 인터넷에 편지를 써서 군부대로 보낸 편지였어요. 군생활 중 내가 받아본 첫 편지였어요. 짧은 한 문단의 편지글이었지만, 아빠의 위트, 배려, 사랑, 온기가 모두 드러나는 편지였어요.
군대 일기장에 스크랩 해 둔 아빠의 편지, 군대에서 받은 1호 편지
편지를 받고 나는 깊은 안도를 했어요. 아빠가 나를 항상 응원해 주고 있구나를 다시 한번 느꼈어요.
그 이후, 외박, 면회, 백일 휴가 및 정기휴가를 나갈 때면 아빠는 나를 최선을 다해 보살 펴 주었어요. 서로 같이 있을 때는 몰랐던 것이, 물리적으로 따로 떨어져 보니 서로에 대한 소중함과 애틋함을 더욱 크게 느끼는 것 같아요.
아빠, 엄마는 내가 휴가가 나오는 날이면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식사자리를 가득 채워주었어요. 휴가 때 가족끼리 근교 냇가를 놀러 가서 추억을 쌓은 기억도 아직 생생하게 기억나네요.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무너질 뻔하다.
미국 유학을 떠나는 날이었어요.
나는 모든 준비를 마친 채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마찬가지로 미국 유학길에도 어김없이 부모님과 친구들이 함께 동행해 주었어요. 인천공항에 미리 도착하여, 발권 수속을 마치고 환전을 조금 해 두었어요.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 의자에 앉아 대기를 하는데, 그 시간이 매우 느리게 갔어요. 엄마는 벌써 조금씩 흐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국을 홀로 떠난다고 하니 부모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걱정도 되고 마음이 울적할 수밖에 없죠.
나는 일부러 이별의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지금 출국하면, 유학생활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기껏해야 1년에 한 번 부모님을 볼까 말까일 텐데, 아마 부모님도 같은 생각을 했겠죠. 비행기 탑승까지 남은 시간 동안 나는 아빠, 엄마 옆에 앉아 슬프고 우울한 티를 내지 않으려 많이 애썼습니다.
미국 유학 출국날, 필자와 아빠
이제 출국장 게이트로 들어갈 시간이 되었어요. 아빠, 엄마와 포옹을 하는데 이때는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이때 못 참으면 모두 눈물바다가 된다라고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눈을 질끔 감고 마지막 인사를 나눴어요.
군대야 어쨌든 떨어져 지내지만, 같은 한국 영토 내 있고 정해진 기간이 있는 반면에, 미국 유학이라는 게 사실 언제 끝날지 가 봐야 아는 일이었고, 지구 반대편에 있으니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는 게 우리들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엄마는 이미 눈물바다가 되었고, 아빠와 포옹을 하고 작별인사를 하는데 몇 마디 말은 없었지만 아빠는 왠지 나에게
"아들아, 여태까지 잘해주었듯 미국 가서도 지금처럼만 해내 주거라"
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부모님이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홀로 먼 땅 미국까지 유학을 보내기로 결정을 했겠지요.
훌쩍이는 엄마와 단념한 아빠, 그리고 잘 다녀오라고 소리치는 친구들을 뒤로 한채, 나는 뒤 한번 쳐다보지 않고 최대한 씩씩한 걸음으로 출국장을 빠져나갔습니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1~2년에 한 번 정도 한국에 와서 잠시 머물렀는데, 항상 한국에 입국할 때마다 아빠가 마중 나와 있었어요. 입국장을 빠져나가면 아빠는 두 팔 벌려 나를 안아주었고, 고생이 많다며 손수 운전해서 집까지 바래다주었어요. 나는 속으로,
'내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미국 유학을 가도 이렇게 매번 공항에 마중 나올 수 있을까?'
라고 생각했어요. 여간 까다롭거나 힘든 일이 아니거든요.
아빠는 그렇게 내가 오고 가는 길 배웅뿐만 아니라 한국에 오면 꼭 먹고 싶은 아빠 음식 리스트를 미리 보내라고 해서, 특급 요리를 준비해 주었어요.
한국에서 와서 먹고 싶었던 아빠, 엄마 집밥을 먹을 때면 이처럼 행복할 때가 없었을 겁니다.
아빠는 나의 크고 작은 삶의 이벤트와 발자취에 항상 동행했어요. 재산이 많아 수백, 수천억을 물려주는 재벌 아빠보다, 내 크고 작은 삶의 화두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와 같이 호흡하는 아빠가 훨씬 좋았어요. 두 아들의 아빠이자 학부형이 된 지금, 아빠가 나에게 해주었던 관심과 사랑만큼 내 자식들에게 할 수 있느냐 물으신다면, 실은 자신이 많이 없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 가끔 앨범을 뒤져보면 아빠와의 추억이 가득해요. 아마 아빠도 생업으로 힘들고, 고단하고 지쳤을지라도 내 아들 운동회만큼은, 내 아들 졸업식만큼은 꼭 찾아가서 참여하고 축하해주고 같이 호흡해 주는 것이, 당신만의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느꼈을 거예요. 그리고 오늘날 나도 아빠가 나에게 했듯, 우리 아이들에게 앞으로 펼쳐질 삶의 발자취에 똑같이 동행하기로 약속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