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레이트 항공의 기장을 꿈꾸는 청년, 조형우
나이는 성숙의 수치가 아니라 성숙해질 수 있던 기회의 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타인에게 긍정적이거나 진취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저 자신을 흔들어 놓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2017년 6월 인천에서 우연한 기회로 한 대학생을 만났습니다. 영어 스피치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이었는데 처음에는 신변잡기의 이야기를 하다가 점차 전공과 대학에 대한 이야기를, 그다음에는 공부습관과 생활습관, 마지막으로 인생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이 학생에게 빠져들었습니다. 좀 더 자세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저는 이날 바로 다음 주에 인터뷰 요청을 하였습니다. 94년생의 젊은 청년, 조형우 씨의 이야기를 공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히 자기소개를 해주실 수 있는지요?
안녕하세요, 94년생 조형우라고 합니다. 육군에서 군 복무를 마친 후 인하공업전문대학교 항공기계학과를 지난 2월에 졸업했고 지금은 조종사의 꿈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형우 씨는 이제 곧 미국 대학에 편입하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네, University of North Dakota(노스다코타 주립대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전공은 Commercial Aviation - Fixed Wing(항공운항과 - 고정익 항공기)입니다.
항공기 기장이 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게 되는 과정을 오늘 자세히 들을 수 있겠군요.
이야기를 잘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웃음)
먼저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제 고등학교는 한 학년당 150명 정도의 작은 인문계 고등학교였습니다. 군(郡) 단위의 시골학교였죠. 저는 중학생 때까지는 나름 공부를 했었는데, 하필 중3 때부터 사춘기에 들어섰습니다. 고등학생이 된 후, 친구들과 방황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고등학교 1, 2학년 때까지 부모님께 반항하며 공부를 안 했어요. 아침 8시에 등교해서 밤 11시까지 자습을 해야 하는 환경도 싫었습니다. 당시에는 삶의 목표가 확실히 없었기 때문에 수업도 수동적인 자세에서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태도의 삶 때문에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칠 때까지 내신이 정말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를 삶의 전환점으로 이끌어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시죠?
저의 부모님과 집안 사정을 알고 계신 고등학교 화학 선생님이셨습니다. 어느 날, 그분은 제 화학 성적표를 보면서 제가 대학교에 갈 생각이 있긴 있냐고 여쭤보셨고, 저는 주변 애들이 다 가니까 “네, 갈 생각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죠. 그랬더니, “왜 대학교에 가려고 하느냐. 넌 대학을 갈 가치가 없는 사람인데. 네 성적으로는 그 어떤 대학을 가봤자 아무 잡스러운 대학일 것이고, 부모님의 등골이나 빼먹을 것이다. 네 화학 성적만 봐도 다른 과목들 성적은 뻔하다. 그냥 대학교 가지 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속으로 욱했죠. 굉장히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친구들 앞이라 무안하기도 했었습니다. “부모님의 등골을 빼먹는 놈”이라는 말을 기분 좋게 들을 사람은 없잖아요? 그래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무실로 그 선생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요청하니, “너는 상담할 가치가 없다. 그냥 가라.”라고 그러셨습니다.
어떤 의미로 굉장히 날카로우신 분처럼 들립니다.
원래 그런 방식으로 동기를 유발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스스로 분노하게 하고, 스스로 깨닫게 하는 스타일 있잖아요? 그리고 평소에도 제게 관심을 자주 보여주셨던 분이셨죠. 하지만 그날은 뭔가 마음에 품으시고 제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았습니다.
제가 상담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분께 여쭤보니 “상담을 받고 싶으면 수학을 최소한 2등급을 받아오라.”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제 수학 모의고사가 7~8등급이었고, 심지어 그때는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바닥을 치는 2년 치의 내신도 이미 나와 있으니 “대학을 가지 마라. 상담은 받을 가치도 없다.”라고 말씀하실 만도 했죠.
그래서 그날 이후, 수학만 죽어라 오기로 팠습니다. 1, 2학년에 못 따라간 범위를 저 혼자 다 따라잡아야 했으니까, 처음부터 다시 공부한 셈이었습니다. 내신은 이미 망했기에 저는 오로지 수능만 바라보고 공부했습니다. 사실 공부의 첫 동기는 대학이 목표가 아니라 그 선생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단지 부모님의 등골을 빨아먹는 존재일 뿐이다.”는 말에 화가 치밀었고, 전 그런 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영어를 포함한 다른 여러 과목도 문제가 많았지만, 반년 정도 오로지 수학만 공부하다 보니 고등학교 3학년 6월 모의 수능에서 수학이 2등급으로 나왔습니다. 그 수학 성적표라는 ‘상담 자격증’을 가지고 다시 그분을 찾아갔는데, 그 선생님은 전근을 가시고 안 계시더군요.
ㅋㅋㅋㅋㅋㅋ
(웃음) 그래도 저는 그분을 찾았습니다. 저를 증명하기 위해서요. 수학 2등급 성적표를 가져왔는데 어디에 계시느냐고 따지면서 전화를 드렸죠. 그분께서 제 성적표를 보시고는 “너는 이제 대학교에 갈 자격이 있다. 11월 수능을 보고 정시로 네가 원하는 대학을 가라. 수학이 가장 중요한 과목이다.”라고 끝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화학 선생님이면서도 말이죠. 그렇게 모의고사에서 수학 점수가 잘 나오더니 11월 수능에서도 2등급이 나왔습니다. 영어를 못했지만, 수학 덕분에 농어촌 특별전형으로 인하공전 항공기계학과로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일 이후로, “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대단한 집념입니다. 사교육을 받은 적은 있나요?
없어요. 독학으로 했습니다. 저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었고, 야간 자율학습은 밤 11시까지였습니다. 새벽 1시부터 6시까지 자면 많이 잔 거였어요. 고2 겨울방학부터 고등학교 3학년 6월 모의고사까지 오로지 수학만 공부했습니다. 숨 쉬는 시간 빼고는 거의 수학만 한 것 같아요. 당시는 고3으로 올라가는 시점이었고, 고1 수학 과정을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마음을 잡기가 쉽지는 않았었죠. 굉장히 독하게 했어요.
유전인가요? 가족이 원래 이렇게 뚝심이 있나요?
가정환경의 영향은 있었겠지만, 유전적인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저 저 자신을 증명하고 바꾸고 싶은 의지가 더 컸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사춘기 때는 부모님의 고생을 알고도 무시했던 건가요?
무시했었기보다는 성숙하지 못해 인지하지 못했었던 것 같네요. 어렸을 때 제 가정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부모님이 힘든 건 인식하고 있었지만, 사춘기에 들어서며 저는 집안의 고된 일을 하고 싶지 않았고, 저의 그러한 가정환경을 회피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화학 선생님의 말씀을 계기로 가정의 모든 상황이 다시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 때문에 부모님이 젊음과 건강을 바치며 고생하고 계신다는 사실이요. 그리고 제가 부모님의 등골을 빼먹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었고 그게 저에게 동기부여로 작용했습니다.
제 어머니께서 아프신 것도 눈에 밟히기 시작했습니다. 오로지 자식만을 위해 희생하셨던 부모님께서 아프시니 뭔가 큰일이 벌어지면 어떡하나 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전 아직 부모님을 위해 아무것도 못 하고, 부담만 되고 있었던 겁니다. 이대로라면 내가 나중에 너무나도 후회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말이죠.
거친 방식이었지만, 선생님께서 각성시켜주신 거네요.
그분은 재미있게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는 걸 좋아하셨어요. 또한, 진정으로 학생을 위한 말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셨죠. 당시에는 그저 수업을 잘하시고, 재미있는 선생님이셨을 뿐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감사하죠. 수학 2등급 성적표를 보여드린 날, 그 화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의 역할이 큰 건 아니었다. 넌 내 말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반응했을 뿐이다. 나는 똑같은 말을 여럿에게 던지지만, 받아들이는 학생이 있고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는 학생이 있다. 그리고 넌 받아들인 학생 중 한 명이었을 뿐이었고. 그러니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 이제 넌 대학에 갈 자격이 있다.”
그 선생님을 다시 찾아뵈었나요?
네, 그분께서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로 다시 배정받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찾아뵙고, 군대 휴가를 나와서도 찾아뵙고 그랬습니다. 저는 인연을 소중히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심지어 제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과 아직도 연락합니다. 제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분들에게 보답하는 방법은 제 소식을 꾸준히 알리고 인사를 전하는 것이라 저는 생각해요. 선물이나 물질적 보상을 드리기보다는 보은(報恩)을 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가르침은 어머니께서 어릴 적부터 지도해주셨던 부분입니다.
그래도 10대에 그렇게 깨우친 게 정말로 대견스럽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께서는 농사를 지으셨었고, 지금은 축산업에 종사하고 계세요. 가정적 환경상, 땀 흘리며 부모님과 함께 일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었죠. 저는 개인적으로, 부모의 직업적 환경을 같이 겪는 자녀가 그렇게 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런 이유로 고등학교 시절의 자극이 저한테 더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수능이 끝난 후, 대학은 어디로 지원했나요?
인하공업전문대학교 항공기계학과입니다. 인천에 있는 학교예요. 그래서 상경했습니다.
인하공전을 선택한 이유는 그 대학의 항공 관련학과가 뛰어났기에 그런 건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한국 고등학교에는 내신과 수능이라는 게 있잖아요? 제가 고등학교 1, 2학년 때 공부를 안 해서 내신은 완전히 망했었기 때문에, 수능에 최대한 많은 비중을 두는 전략으로 대학을 가기로 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당시 수능 성적으로는 인하공전(항공기계과)을 가는 게 최선이었고요. 그때, 공부에 더 신경을 썼더라면 인하공전보다 더 좋은 학교의 항공정비학과로 갈 수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를 지원할 당시에 항공정비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항공 기계학과가 좋아서가 아니라, 단지 항공 분야가 싫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항공정비학과를 선택한 이유가 단지 싫지 않았기 때문이라고요?
네, 단지 항공 분야가 싫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하였었습니다. 기계공학과나 전기공학과 등이 좀 더 실용적인 분야이고 취업률도 높다는 인식이 있었죠. 그런데 저는 무조건 취업만을 위한 길을 가고 싶지 않았어요. 항공 쪽은 좀 더 특수한 분야니까 왠지 모르게 끌리더군요. 사실 해양 분야와 항공 분야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다가, 항공 분야를 선택했습니다. 비행기가 배보다 더 멋있는 것 같아서요. (웃음)
저는 성향이 남들이 가는 길은 안 가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보고 싶은 욕구가 강합니다. 진취적이고. 취업 잘되는 그런 길은 뭔가 남들을 따라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제 성향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스타크래프트에서 치트키를 쓰는 느낌이에요. 그냥 안전한 길을 가고 싶지 않았어요. 재미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단순히 어떤 특정한 과가 취업이 잘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제가 그 과를 선택할 이유로 부족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대한민국의 대부분 고등학생은 대학의 학과를 고를 때 그 학과 이름만 보고 고르는 경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선택한 그 학과가 무슨 진로로 빠지는지, 그 학과에서 어떠한 과목을 배우는지 알고 진학하는 학생은 드물 것 같고,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때문에 해당 학과를 고른 사람은 더 극소수일 것으로 생각해요.
고등학교 선생님 이외에 형우 씨의 삶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 또 있나요?
네, 물론이죠. 이제 대학교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스무 살에 대학교를 입학하고 나서 영어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공부하려고 했어요. 아니요, 정확히는 군대를 제대한 후 복학하고 나서 스물두 살부터였습니다. 실리적인 목적에서 시작했기보다는 영어로 대화를 해보고 싶었어요. 저는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원어민 선생님이 진행하는 수업을 들었습니다. 헬렌(Hellen Kim)이라는 호주인 교수님이셨습니다. 아름답고 심성이 고우신 분이셨어요.
그분께서는 수업 후에도 영어로 대화를 시도해보려는 저의 의도를 파악하시고 말도 직접 걸어주셨지만, 당시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영어가 거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던 영어를 조각조각 써가며 방과 후에 배드민턴을 치러가자고 그분께 제안했습니다. 교수님께서 배드민턴의 규칙을 알려달라고 하셨는데, 영어가 잘 안되니 손짓 발짓으로 했죠.
그렇게 4개월 후에 1학년 1학기가 끝났어요. 저는 곧 군대를 가야 했고, 그분은 호주로 귀국하게 되셨죠. ‘영어를 잘했더라면 그분과 더 친밀해질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너무나 컸습니다. 헬렌 교수님을 찾아가서 이야기했죠. 앞으로도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친해지고 싶다고. 사제가 아닌 친구로서. 그랬더니 이메일로 편지를 주고받자고 그러셨어요.
군대에서 영어 이메일을 서로 주고받으며 영어의 필요함을 더욱 절실히 느꼈습니다. 대화를 위해서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군대에서는 영어를 아직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한 건 아니었으나, 이메일을 쓰기 위해 네이버 영어사전을 검색해가며 제가 필요한 표현을 찾았습니다.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사용한 영어 표현을 제 것으로 만들려 노력했고, 예문을 통째로 복사해서 단어만 바꾸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영어공부의 동기는 결국 커뮤니케이션이었네요.
네, 언어는 사람과의 대화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영어공부라는 게 영어 실력 향상이라는 목적도 있지만, 사람과 가까이하는 데에 주목적이 있는 거죠. 단순히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만 누군가랑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그 관계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외국인과 만나는 목적이 물론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영어를 목적의 수단으로 쓰는 게 아니라, 대화의 수단으로 써야 하는 거죠. 사람과 사람으로 대화해야지, 영어 파트너로만 생각하면 관계가 오래가기도 전에, 대화도 오래가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말도 있잖아요. “영어는 과목이 아니라, 대화의 수단이다. (English is a method of communication, not a subject)” 사실 헬렌 교수님과 이메일 교류를 하기 전에 펜팔로도 영어회화를 시도했었습니다. 펜팔을 시작한 건 2013년 5월이었고, 군대에 입대한 건 그해 10월이었으니까요.
펜팔로 공부하기는 어떻게 생각하신 건가요?
제가 20살 때 대학교에 좀 늦게 입학한 26살 형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서로 영어 공부법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가 본인은 펜팔을 이용한다고 그러더군요. 펜팔은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부담도 없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으로 시작했었죠. 영어를 사용하기도 쉽지 않지만, 영어로 누군가에게 대화를 시도해볼 장소를 찾기도 쉽지 않잖습니까? 펜팔은 진입장벽이 낮고, 상호교류적이어서 연습을 하기에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대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영어를 접할 기회가 적었던 저에게 영어를 쓰는 기회를 더 늘려보려고 한 거죠.
그런데 펜팔의 한계가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펜팔의 단점은 관계가 깊어지기 힘들다는 겁니다. 그렇게 대화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면 결국 이야기 소재도 금방 바닥나게 되었죠. 이메일 답장을 보내는 사람의 성의가 떨어질 땐 그냥 인사 몇 마디나 문장 2~3개만 답장으로 올 때도 있었고요. 그래서 앱챗이라는 서비스도 활용해보려 했습니다. 펜팔은 읽기와 쓰기밖에 할 수 없었지만, 앱챗은 더 편리하게 자주 대화할 수 있었고, 읽기, 쓰기를 포함해 듣기와 말하기도 같이 연습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펜팔과 앱챗에서 기억나는 사람이나 사건은 있나요?
두 명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필리핀 펜팔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굉장히 성실한 이메일 답장을 보내주더군요. 그 친구는 한국어를 공부하길 원했고, 저는 영어를 공부하고 싶어 하는 입장이었어요. 한동안 같이 에세이 주제를 정해서 영어로 작문 연습을 했었습니다. 저는 필리핀 친구의 에세이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보내주었고, 그 친구는 제 에세이에 오류가 있으면 점검해서 다시 보내주었었죠. 두 번째로, 앱챗에서는 한 여자분이 기억나요. 미국 유치원 교사였는데 약 한 달 정도 매일 20분간 통화하면서 이야기했었어요. 그분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저는 말동무가 되어주었던 거죠. 타국인들끼리 펜팔이나 앱챗을 통해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거나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얼마든지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체계적으로 영어를 공부한 건 언제부터였나요?
제가 이걸 보여드릴게요. ‘How I Have Studied English’라는 제목으로 제가 그동안 영어를 어떻게 공부했는지 정리한 도표예요. 제가 영어를 공부해온 과정을 기록한 거죠. 여기 이 표는 연도, 월, 나이를 기록한 거고, 이건 제가 무엇을 공부했는지 적어놓은 거예요. 2013년 5월부터 펜팔을 시작했고, 2013년 10월에 입대한 뒤로는 핸드폰을 못 쓰니까 이때부터는 헬렌 교수님과 이메일을 주고받았습니다. 복무 시에는 펜팔은 하루에 2번 정도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제대 후에는 영어 채팅앱을 거의 매일 사용하려고 노력했었습니다. 헬렌 교수님과는 한 달에 1, 2번씩 이메일을 주고받았었죠.
그렇게 2015년 7월에 전역하고 복학했습니다. 이번에는 제 영어수업시간에 미국 델라웨어(Delaware)에서 온 채드(Chad Poszgay)라는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40대 정도이셨는데, 학생을 잘 배려하시는 분이셨어요. 또한, 사람 대 사람으로서 배울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여 수업이 끝난 뒤에도 대화를 시도해보고, 개인적인 고민도 영어로 미리 준비해서 상담받기도 했습니다. 이분과는 2015년 1학기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에 2, 3시간씩 이야기를 나눴어요. 아직 독신이셔서 저를 위해 주말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제가 여쭈어보니 저를 도와주신 가장 큰 이유는 제가 배우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이야기하고 점심 먹고 헤어지고, 그게 저와 교수님의 토요일 오전 스케줄이었어요. 저녁에는 또 앱챗으로 영어 대화를 연습했습니다.
2, 3시간이면 꽤 긴 시간인데 대화를 어떻게 채웠나요?
제가 하나의 주제를 던지면 그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제가 당시에는 말하기가 유창하지 않아, 대화의 80%는 교수님이 이끄시고 20%는 제가 가끔 대답하는 정도였죠. 그렇다고 듣기가 뛰어난 것도 아니었어요. 대화 내용의 반도 이해 못했었습니다. 모르는 단어나 표현이 워낙 많았어야 말이죠. 그래도 모르는 단어나 표현 10개 중의 2, 3개는 받아 적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렇게 토요일을 활용해 채드 교수님과 영어 연습을 꾸준히 하다가 대학에서 진행하는 EOP(English Only People)라는 프로그램도 듣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20분간 원어민 교수님과 영어로 대화하는 수업이었습니다. 교수 한 명당 학생 4~6명 규모의 강좌였는데 그곳에서 로빈(Robin Shaw)이라는 캐나다인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토요일마다 채드 교수님과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음에도 아직 충분한 말하기를 구사할 수 없었던 저는 로빈 교수님 수업에서 이야기해볼 화제를 매번 미리 준비해 수업에 참석했습니다.
한 일화로는 제가 “전지전능한(omnipotent) 신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주제를 정해 그분께 던지니까 “어디서 이런 요상한 단어를 배우는 거냐”며 웃으면서 물어보셨고, 저는 프렌즈(Friends) 같은 시트콤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말했죠. 그분은 저의 남다른 공부법과 적극성에 흥미를 보이셨고 제가 영어를 어떻게 공부하는지 여쭤보셨습니다. 그래서 헬렌 교수님과 영어 이메일을 주고받은 이야기, 채드 교수님과 매주 토요일 오전을 함께 보낸 이야기를 했더니, 본인이 헬렌 교수님도 알고, 채드 교수님과도 가까운 동료 교수라고 말씀하셨어요.
놀라운 이야기네요.
저도 감회가 새롭네요. 로빈 교수님께서 훗날 말씀해주신 거지만 채드 교수님께서 제 이야기를 로빈 교수님께 종종 들려주셨다고 해요. 하지만 제 얼굴을 모르시니 그게 저였던 건지 그날까지 모르셨던 거죠. 저도 로빈 교수님이 채드 교수님과 무슨 관계인지 모르고, 그분도 제가 채드 교수님과 무슨 관계인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본인의 강의 시간에 웬 어린 한국인 학생이 외국인 교수와 함께하는 주말 영어 수업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니, 제 이름을 묻고 들으시고는 “그게 너였냐? (Was it you?)” 이런 반응을 보이셨죠.
그분께서도 헬렌 교수님과 채드 교수님처럼 저를 도와주고 싶다고 그러셨습니다. 저에게 “내 조교를 해볼 생각이 있냐?”며 일자리도 제안해주셨고 저의 영어공부도 도와주겠다고 제의하셨습니다. 제가 영어를 상당히 못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너무나 과분한 제안이라 생각해 거절했지만, 그분은 저의 영어 실력과 숙련도는 상관없다고 하셨어요. 오히려, 저에 대한 신뢰성과 시간 엄수에 더 중점을 두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며칠 후부터 캐나다 교수님의 조교로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 공부와 일자리를 동시에 제안해주시다니.
제가 비록 로빈 교수님의 조교를 하게 되었지만, 저는 그분을 위해 충분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그분이 추가로 저를 가르쳐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월급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나는 그 대가를 받고 있으니 돈은 주지 않으셔도 된다.”라고 말씀드렸으나, 그분께서 “공과 사는 확실히 해야 한다.”며 “내가 너의 영어공부를 도와주는 건 도와주는 거고, 네가 일하는 건 일하는 거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월급도 받으며 영어 공부에 도움을 받으니 정말 좋았습니다. 언제는 영어 동영상 300개 정도를 주시고는 받아쓰기를 해오라는 과제를 내신 적이 있어요. 받아쓰기를 해오면 그분이 검사해주는 식으로 계속 공부했었습니다. 받아쓰기를 계속하다 보니 점점 듣기 실력도 늘어나고, 교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나니 말하기 실력도 조금씩 향상되었죠.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어느 날부터 제게 간단한 통역이나 번역 업무를 맡기시더군요. 이런 방식으로 제 수준에 맞는 과업을 차근차근 주셨고, 제 영어 실력이 조금씩 늘어나니 이후에는 더욱 난이도가 있는 업무를 맡기셨습니다. 덕분에 빠르게 제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수업에 수많은 학생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그분의 눈에 들었나요?
저도 궁금했어요. 나중에 좀 더 사이가 가까워진 다음에 물어봤죠. “저보다 영어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이 많았는데 왜 저를 뽑으신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로빈 교수님은 두 가지 이유를 드셨어요. 첫 번째, 제가 영어를 진정으로 공부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시험을 위한 가짜 공부가 아닌 진정한 언어 공부를 했다고 인정하셨습니다. 두 번째, 인성적인 부분이 마음에 들었답니다. 일의 대가로 돈을 바라지 않았었고, 교육에 가치를 두고 있다는 부분들이요. 또, 본인의 친구인 채드 교수님과 저의 관계가 저의 성품을 간접적으로 증명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채드 교수님께서 한국에서 방을 구할 때 제가 비록 영어가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서툰 영어로라도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고, 필요한 물건을 구매할 때도 통역을 해드리려 했습니다. 그렇게 저와 채드 교수님은 도움을 주고받는 친구였습니다. 로빈 교수님께서도 친구의 친구인 저에게 도움을 많이 주시려 했어요.
로빈 교수님은 실질적인 도움을 주시려고 했군요.
그분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만 도우라. (Help people who only deserve it)”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순 없다.”라고 말씀하시며 말이죠. 로빈 교수님은 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분입니다. 영어와 관련된 부분뿐만 아니라 삶에 관련된 조언도 정말 많이 해주셨죠.
미국 대학 편입 시험을 치르기 위해 토플 성적이 필요했었으나, 로빈 교수님은 저에게 토플을 위한 시험영어를 준비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일반적인 에세이 작문과 일상 대화 등 근본적인 영어공부를 통해 저의 영어 실력이 향상되도록 도움을 주셨습니다. 제가 글을 쓰면 로빈 교수님이 교정을 해주셨죠. 그렇게 토플 시험공부를 하지 않고 토플 시험에서 73/120점을 받았습니다. University of North Datkoa(노스다코다 주립대학교) 항공운항과가 요구하는 토플 점수가 최소 71점이었고요.
제 토플 점수를 보면 제 공부 생활이 보여요. 쓰기를 제일 즐겼고, 말하기, 듣기, 읽기 이 순서로 토플 성적이 나왔어요. (웃음) 펜팔로 시작해, 헬렌 교수님이랑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쓰기를 가장 먼저 시작하고, 그다음에는 채드 교수님과 로빈 교수님을 통해 이야기하며 말하기와 듣기를 숙달하게 된 거죠.
로빈 교수님은 항상 저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움을 주셨어요. 어느 날은, “너한테 딱 맞는 곳이 있다. (This is just for you)”며 저를 데리고 가신 곳이 있었어요. Toastmasters(토스트마스터즈)라는 비영리 리더십과 영어 스피치 모임 단체였는데 로빈 교수님이 저를 위해 이런 모임을 직접 찾으셨던 겁니다. 그렇게 인천 토스트마스터즈는 2016년 8월부터 참여했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영어를 잘 못 했었지만 그분이 “이곳에서 살아남아봐라. 그게 너의 미션이다.”며 응원해주셨어요. 그 이후로 약 10달째, 이렇게 토스트마스터즈를 계속 다니고 있었습니다. 특히, 클럽 내에서 교육 부회장(Vice President of Education)을 담당할 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죠. 그리고 그분이 토스트마스터즈를 알려주셔서 준형 씨랑 제가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있는 거고요.
토익을 준비해 본 적은 있나요?
아니요, 토익을 위해 영어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토익이 국내 회사 지원 시에 필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토익을 준비해 본 적은 없네요. 하지만 한 번 본적은 있습니다. 2013년도 스무 살 때, 대학교에 갓 들어와서 교내에서 실시하는 모의 토익에 응시한 적은 있었지만 당시 영어실력때문에 400점대를 받았습니다. (토익 400-495 = 토플 40-56)
조종사가 되려는 계기가 뭐였나요?
항공분야를 선택한 최초의 동기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 분야가 싫지 않았기 때문이며 비행기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항공산업에서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는 몰랐습니다. 그렇게 2013년 10월, 군대에 가기 전에 아버지께 제가 여쭤보았습니다.
“제가 군대에 가기 전 혹시 바라시는 게 있으신가요?”
“언제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 그게 아버지인 내가 바라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바라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네가 어떤 것을 하더라도 나는 지원을 해줄 것이고, 돈이 부족하다면 빚을 내서라도 지원해줄 것이다. 돈은 걱정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 내가 너에게 굳이 바라는 게 있다면, 한 분야의 장(長)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전까지 저는 그냥 항공정비사 정도를 제 목표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을 계기로 저는 항공분야의 장이 되기로 했고, 항공분야의 장(長)은 기장이라는 생각에 기장이 되기로 했습니다.
구체적인 꿈이 정해진 시기가 군대였다면, 그전엔 뭐가 되고 싶었나요?
초등학생 때는 마술사가 되고 싶었고, 중학생 때는 선생님, 고등학생 때는 경찰이 되고 싶었어요. 단순하게 직업의 표면적인 면만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죠. 대학교에서는 항공정비과를 선택해서 그냥 항공정비사가 되려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그렇게 큰 의지는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한 분야의 장(長)이 되어라.’는 말씀을 듣고 확실히 기장으로 정한 거죠.
아버지께서 평소에도 조언을 많이 해주시나요?
평소 농담은 자주 하시지만, 감정을 잘 드러내시는 분은 아닙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 한번 안 하시는 아버지였습니다. 빈말은 절대 하지 않는 분이라서 평소 흘리듯이 말씀하시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신중하게 들으려고 합니다. 한 번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세 가지 약속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말 것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울 것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연애 때문에 판단이 흔들리지 말 것.
3번 같은 경우,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아, 이것도 보여드릴게요.
이게 뭐죠?
군 생활 21개월 동안, 아버지가 내주었던 한 가지 과제입니다. 10년 동안의 미래를 계획해보는 인생계획서인데 당시 보험회사 미래에셋에서 진행한 ‘행복미래설계 공모전’에 지원해본 겁니다. 제 삶에 목표와 계획을 세울 겸 진지한 태도로 써봤습니다. 이렇게 네 가지 목차가 있는데 첫 번째는 개인·가족 이야기, 두 번째는 재무설계, 세 번째는 장래 설계, 네 번째는 저만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인 장래 설계를 작성하기 위해 저는 대한항공의 기장이 되는 방법을 조사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공모전에 지원한 것이지만,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게 아닌 제 미래를 설계하는 태도로 작성한 계획서입니다. 조종사가 되기 위한 심사내용과 선발 과정을 분석 및 조사하면서 대한항공의 APP(Airline Pilot Program)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APP가 뭔가요?
대한항공에서 조종사를 직접 양성하는 3년짜리 프로그램인데 조종사 1명이 배출되기 위해서는 약 1억 7천만 원이 들어간다고 해요. 학사 자격과 영어 성적만 있으면 지원할 수 있고, 매 분기 대한항공 비행훈련원에서 선발하는 과정입니다. APP를 알게 된 후, APP에 대해 상세하게 조사하고 분석하여 계획서를 만들었었습니다. 이 계획이 가장 빠르게 조종사가 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마침 당시에 제가 인하공전에서 대한항공 인턴과정에 선발되어, 대한항공의 인턴 정비사로 근무하며 현직 조종사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종사의 길을 걸어온 분들로부터 조종사가 되기 위한 제 계획서를 보여드리고 조언을 얻기로 했었죠.
현직 조종사를 꼭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나요?
제가 걷고자 하는 길에 대한 최고의 조언은 그 길을 먼저 걸어본 사람에게 얻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단지 제가 걷고자 하는 길을 먼저 걸어본 분을 만나서 조언을 구하려 한 것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세웠던 APP 계획서를 보여드리고 얻은 조종사분의 답변은 “APP 과정을 통한 것만이 조종사가 되는 방법이 아니니,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길 바란다.”였습니다.
왜 그러셨죠?
APP가 대한항공에서 조종사를 육성하는 프로그램인 건 맞지만, 한 사기업의 내부 인재양성 프로그램에만 지원하기보다는 세상을 좀 더 넓게 보라고 조언하셨습니다. 그분이 비록 대한항공에서 일하시는 분이셨지만, 소신 있는 발언을 하신 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시 제 위치에서 가장 빠르게 조종사가 되는 방법은 대한항공의 APP 조종사 양성 프로그램을 통한 것이라고 한 번 더 피력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조종사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가장 빠른 길이 아닌 가장 바른 길을 가라. (Don’t go to the fastest way, go to the best way)”고요.
현직 기장님 조언의 결론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공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제가 가서 공부할 대학을 로빈 교수님과 찾아보기 시작했고, 당시 인턴을 하며 만났던 조종사분들과는 단체 카톡방을 만들었습니다. 아직도 제가 질문을 여쭤보면 항상 친절히 답변해주시며 제가 접하지 못했던 정보와 조언을 주고 계십니다. 너무나도 감사하죠.
형우 씨는 꿈을 성취해가는 단계가 굉장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군요.
아버지의 사업적인 특성상, 집에 사람들이 자주 방문했었습니다.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대하는 게 자연스레 몸에 밴 것 같습니다. 원래 성격 자체도 외향적입니다. 학창 시절 때부터 7년간 해온 태권도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창 시절에 반장이나 임원 같은 것도 많이 했습니다. 초등학생 때는 전교 부회장, 중학생 때는 반장, 고등학생 때는 부반장. 어릴 땐 도시에서 살아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어쩌면 시골에서 자라서 좀 더 개방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도중 개인적으로 또 놀란 것은 형우 씨의 꼼꼼하고 치밀한 메모와 계획표였습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책을 읽고, 아무리 좋은 추억을 쌓아도 시간이 지나면 그 기억이 무뎌지죠. 저는 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 배운 것, 생각한 것을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훗날 기록한 것을 다시 읽으며 또 다른 깨우침을 얻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메모하고 계획을 세우고, 그 과정을 기록합니다.
로빈 교수님이 제 목표를 물어보신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전 조종사라고 대답했고, 제 APP 계획서를 보여드렸어요. 비록 그분이 한국어를 읽지 못하셨지만, 제 APP 계획서를 보시고는 “이렇게까지 자신의 진로를 완벽히 미리 준비하는 학생은 보지 못했었다. (I have never ever seen a student who fully pre-prepared his own path)”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원래 메모를 자주 하시나요?
고등학생 때부터, 제 감정을 기록하기 위해 일기를 종종 썼었고, 군대에서도 제가 실수를 하면 그 속에서 깨달은 교훈을 기록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습니다. 이렇게 차근차근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고 군대에서 인생계획서를 작성하면서 이러한 습관이 확실히 몸에 배게 했습니다.
독서는 좋아하나요?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고등학생 때까지 읽은 책이 다섯 권 이하일 거예요. 수능 당시에 수리영역은 2등급이었지만, 언어영역이 5등급이었어요. 오히려 군대에서 책을 더 많이 읽었습니다. 열 권 정도요. 비록 열 권 정도밖에 읽지 않았더라도 책의 좋은 단어와 표현은 제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책을 한 권 읽으면 반드시 독후감을 써서 기록했고, 인상 깊었던 표현들은 흡수해서 응용하려고 했죠. 하지만 독서의 절대적 양이 부족했던 건 변함없었습니다. 토플을 볼 때도 읽기가 제일 약했어요. 함축적 의미(implication)나 완곡적 표현(euphemism)을 파악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독서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Grit>을 원문으로 읽으며 독후감을 써봤습니다.
글쓰기는 인풋이 많아야 아웃풋이 좋은데, 인풋을 어디서 얻었나요?
저는 사람에게서 인풋을 얻었습니다. 책 대신 사람을 많이 만났고, 대화하고, 그들에게서 배웠습니다. 스스로 변명을 해보자면 저는 책을 읽는 것은 배움을 얻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었고, 책을 읽는 대신에 사람을 만나 그 배움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읽어야 할 줄 안다면요. 그래도 지금은 책을 좀 많이 읽어둘 걸 하고 약간 후회하긴 합니다.
인생에 영향을 끼친 분들의 순위를 정할 수 있나요?
순위를 정할 수 없습니다. 비교할 수 없어요. 모두 다 제게 소중한 분입니다. 고등학교 선생님의 독설 아닌 독설이 없었다면 전 대학에 갈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헬렌 교수님은 간접적으로 영어공부의 동기를 부여해주셨죠. 그분과 만남이 없었다면 전 아마 영어를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영어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제가 영어를 통해 얻은 기회들과 만난 분들도 없었을 것이고, 그런 분들이 없었다면 미국에 갈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미국에 갈 생각이 없었으면 지금 이러한 만남이 없었을지도 모르죠.
오늘 언급된 분들 이외에도 정말 많은 도움을 주시고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배움을 주신 분들이 몇 분 계십니다. 언젠가는 그분들로부터 배운 가르침을 제 목소리로 이 세상에 전달하는 것이 제가 가진 목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제가 처음부터 어떤 목표를 이루기까지의 거리가 1부터 10이라고 한다면, 제 열정은 항상 10에 있었으나 저의 끈기는 항상 그 열정의 절반인 5까지도 미치지 못했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그 나머지는 다른 이들과의 인연으로 채워졌기 때문에 제가 현재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주변 사람들께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배울 줄 안다면 사람들이 가장 좋은 스승이고, 읽을 줄 안다면 사람들이 가장 좋은 책이며, 유지할 줄 안다면 사람들이 가장 큰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목표는 뭔가요?
올가을 University of North Dakota(노스다코타 주립대학교)에 입학한 후, 조종사 최고자격증(ATPL = Airline Transport Pilot License)까지 취득하는 것이 1차 목표입니다. 2차 목표는 저에게 주어진 최선의 조건으로 항공사에 입사하는 것이며, 입사를 위한 전략은 미국 현지에서 사전조사하고 준비하려고 합니다. 또한, 제가 추구하는 길을 걸어본 사람을 찾아가 만나서 다시 한번 새롭게 앞으로 나아갈 계획을 세워야죠.
제 목표는 항상 최고를 향하는 것입니다. 훗날에 세계 최고 항공사인 에미레이트의 기장이 되고 싶습니다. 한국에만 있었을 때는 대한항공의 기장이 되는 게 가장 큰 목표였는데, 이제는 더 큰 욕심이 생겼어요. 저는 목표가 아예 없는 것보다는 추상적인 목표가 하나라도 항상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시위를 당겨 활을 쐈을 때, 목표가 있다면 명중은 아니더라도 목표의 주변에 맞을테니까요.
오늘 좋은 이야기 고맙습니다.
저의 영어공부 과정을 부분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해 본 적은 여러 번 있지만, 이렇게 일대기 형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처음입니다. 어떤 글이 될지 기대가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공유할 좋은 기회를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