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토론토로 올 때에는 내가 이곳에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다. 공부하고 몇 년 일하다가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려던 계획이 급히 변경되어 미국과 인접한 캐나다로 오게 되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처음 토론토의 느낌은 썩 좋지 않았다. 미국에서 보던 풍경과 거의 다를 게 없는데 아주 춥고, 사람들은 더 쌀쌀맞게 느껴졌다. 한국 사람들이 처음 토론토에 오면 친절해서 놀란다고 하는데 나는 정 반대였다. 미국에서 지냈던 따뜻한 캘리포니아와 플로리다 같은 서부, 남부는 토론토 같은 추운 캐나다의 동부와는 문화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따뜻한 곳의 사람들은 유독 밝고 친절한 성향을 지닌다. 토론토는 미국 동부 쪽에 붙어 있으니 굳이 비교하면 시카고나 뉴욕 사람들이랑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미국과 캐나다가 같은 북미여도 당연히 캐나다만의 문화가 있고, 특히 토론토는 이민자가 모여사는 도시라 이곳만의 독특한 문화가 짙어서 사실 토론토만 두고 "캐나다는 이렇다"라고 말하는 건 주의해야 한다.
하여간 나는 토론토 거주 3~4년 차가 될 때 까지도 그다지 토론토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겨울에 눈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주변을 관광하거나 여유를 즐길 새 없이 원체 늘 쫓기듯 살았던 탓도 있다. 지금은 어느 순간부터 이곳에 정이 붙고 이래저래 정착도 해서 살고 있지만, 여자 혼자 이민 1세대로 낯선 나라에 완전히 정착하기까지는 "여자"라서 극복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졸업도 하고 취업도 하고 정부의 각종 복잡한 서류들까지 통과했지만 미처 예상하지 못한 또 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는데, 다름 아닌 같은 한국인들이 만들어내는 편견에서 기죽지 않고 살아남는 일이다. 환경에 따른 사람들의 성향 차이는 통계적이고 과학적이라지만 한국인 이민자들 사이에선 그 비슷한 핑계로 묘하게 스며들어 있는 편견이 있다.
많은 한국인 이민자 부모들은 캐나다에 혼자 와 지내는 한국인 여성을 달갑게 보지 않는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음을 미리 밝힌다). 그러니 캐나다에서 키우고 자란 본인 아들이 한국에서 혼자 온 유학생 여자애를 만난다고 하면 촉을 곤두세운다. 어학연수나 워킹 홀리데이, 관광비자 같은 단기 체류 신분으로 지내는 여자는 특히, 유독 기피하라고 아들을 주의시킨다. 혼자 온 여자애들은 여러 남자들을 만나며 문란하게 살고, 생활비 아낀다는 명목으로 동거도 하고, 비도덕/불법적인 일도 많이 하고.. 뭐 이유야 많다.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매서운 부모의 감시를 피하기가 힘든 한국 문화를 생각하면 혼자 해외에 나왔을 때 그 해방감이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성인인데 자유의지로 무슨 일이든 못할까 말이다. 그러니 가설은 꽤나 그럴듯하다. 많은 수의 여성이 해외에서 그렇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혼자 온 남성들을 두고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걸까. 남자들은 해외 나오면 고상하게 공부랑 일만 하다가 돌아가는 모양이다. 여하튼 그런 여자애가 내 순진하고 귀한 아들을 꼬셔서 결혼하고 신분까지 해결하고 여기 눌러앉는다면, 음, 한국인 시어머니는 아마 머리에 수건을 싸매고 앓아누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인 이민 사회에서 이런 사례는 늘 가십거리로 종종 들려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편견이 용납되는 건 아니다. 그렇게 치면 당신네 아들이 신분 해결해 준다는 빌미로 순진한 한국 여자애를 꼬드겼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실제로 그런 사례도 많다). 큰 의미가 없다. 이러나저러나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별 일 없이 잘 지내면 아무 말도 안 나오지만 무슨 일을 당했다 생각하면 "한국에서 혼자 온 여자"였다는 게 문제가 된다.
사실 일단 다 제쳐두고 성인이 된 자녀의 인간관계에 부모가 간섭한다는 것부터가 유독 한국 부모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발상인데, 비단 문제가 이것뿐이겠는가. 북미에 헬리콥터 맘(부모) 비율이 동양인 가정에서 월등히 높다는 사실은 편견이 아닌 통계다. 설령 자녀가 진짜로 그런 사람 때문에 상처를 입을지언정, 문제라면 사람 볼 줄 몰랐던 본인 자식이 문제요 (물론 상처를 입힌 사람도 잘못이지만), 원망을 한다면 그렇게 기르지 못한 부모 본인을 탓할 일이지 편견으로 예방하려 들어선 안 된다. 편견은 가장 쉬운 방어이지만 가장 비겁한 공격이기도 하니까.
내가 유학생시절 만났던 한국인 남자친구는 소위 말하는 "마마보이" 였는데, 정말 하루종일 엄마에게 끊임없이 연락이 왔다. 20대 후반이 되어서도 엄마가 무서워 쩔쩔맸는데, 엄마 때문에 나와의 약속에 늦는 게 부지기수였고 심지어 데이트를 하던 중에도 엄마 심부름을 하러 갔다. 아들이 데이트를 한다고 하면 그 아줌마는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불안해 미쳐가는 게 내가 다 느껴져서 너무 무섭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그가 심각하게 미성숙한 마마보이라는 것을 깨닫고 헤어졌지만(감사합니다), 연애기간 동안 내게 넘어서는 안 될 선을 한참이나 넘었던 그 아줌마 때문에 한동안 후유증이 있었다 (얘기하자면 끝도 없다...).
다행(?)이라면 굳이 나한테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나 이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한테도 각종 이상한 짓은 다 했던 모양이었다. 아들이 데이트하는데 미행을 한다든지, 각종 수단과 방법을 통해 여자애 뒷조사를 한다든지, 상상을 초월하는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그 아줌마는 "한국에서 혼자 온 출처도 모르는" 여자애가 본인 아들을 만나는 게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푹 안심하시고 사셔도 될 것 같다. 그 아드님께선 외계에서 온 암컷 한 마리랑도 제대로 연애하긴 힘들 것 같으니.
이전 직장에 있던 한국인 아줌마는 어느 날 또래 아줌마들끼리 골프를 치러 갔는데, 아들을 둔 한 아줌마가 자기네 아들 여자친구가 운전을 못해서 아들이 자주 데리러 간다며 무슨 여자애가 여태 운전도 할 줄 모르냐고 흉을 봤단다. 그러면서 나더러 "여기 어른들은 그런 여자애 싫어하니 너도 어서 운전을 연습하라"라고 했다. 물론 그분은 캐나다에선 그만큼 운전할 일이 많다 보니 하루라도 빨리 운전에 익숙해지라는 조언을 하고 싶으셨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그냥 예, 하고 말았지만), 사실 난 그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엄마를 둔 아들은 만나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했다.
운전을 못하거나 안 하는 데에는 무수히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그냥 자기 아들이 여자친구 데리러 가는 것부터 꼴사납게 여겨지면 큰 문제 아닌가 (아들 연애가 그 정도로 불만이라니!). 여기서 부모와 자란 애들이야 성인이 되기도 전에 부모가 가족용 차라도 탈 수 있게 해 주고 운전도 익숙해지도록 교육시키지만, 그게 아니면 어디 여기 문화대로 딱딱 때맞춰 차를 구입하고 운전도 하고, 그러기가 쉬우냔 말이다. 그런 편견을 가진 엄마에게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아들의 사상은 괜찮을지도 모르겠고, 그런 엄마라면 다른 것들도 못 미덥게 볼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성급한 일반화인가? (그럼 퉁을 쳐야 하나?)
같은 여성으로서, 동료가 아들 여자친구 흉을 볼 때 순순히 편견에 고개를 끄덕이기보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요, 아들이 예쁘게 연애를 하나 봐요'라고 얘기해 줄 수 있는 어른이고 싶다. 참고로 나는 면허도 있고 운전도 할 줄 알지만 아직 차는 없다. 오래전부터 고민했지만 집부터 샀고, 또 아직까지도 자동차가 절박하게 필요한 일이 없어서 구태여 과도한 소비를 하지 않았다. 출퇴근 때도 회사에서 버스비를 커버해 주니 버스를 타는 게 훨씬 경제적이다. 물론 머지않아 차도 사고 운전도 할 계획이지만, 그건 내가 생활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지 남자친구 엄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