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는 밥만 먹여주지 않는다

당신이 Strong Independent Woman이 되어야 하는 이유

by 에리카 Erika


한국에서 나고 자라며 여자들은 숱하게 "남자 잘 만나 편하게 사는 삶"의 판타지를 듣는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이렇게나 자연스럽고 세월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우리 부모님 세대는 "여자는 남자 잘 만나는 게 최고다" 란 이야길 한다. 대다수 부모님 세대의 삶만 보자면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우리 부모님은 유독 진보적이고 개방적이셔서 어려운 형편에도 막내딸을 혼자 유학길에 보내셨고, 네가 원치 않으면 결혼도 하지 말고 애도 낳지 마라 하시는 분들이지만, 동시에 당신 딸이 "돈 잘 버는 남자"를 만나 편하게 살기를 바라는 분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놓고 그리 말하시지는 않지만)


한 50대 한국 아주머니는 내게 "여자는 잘 버는 남자 그늘 밑에서 편하게 살아야지, 왜 여자가 애도 낳고 키우고 일까지 하느냐"라고 말했다. 캐나다로 이민 온 지 거진 20년이 되신 분이었다. 웃으며 넘기긴 했지만, 아직도 몇 한국 여성들에겐 "애도 낳고 키우고 일까지 하는 여자"가 멋지기보단 불쌍하게 보이는 듯싶었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길러내는 고되고 힘든 일을 하는 대단한 존재이지만, 그 모든 의무가 여자에게 가중되는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일을 하지 않는 여자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만 국한되는 이야기다. 캐네디언 유아교사가 전업주부(homemaker/housewife)라는 단어를 한국 부모/아이로부터 처음 들었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그다지 놀랍지 않다. 물론 이러한 인식이 생긴 데에는 한국만의 역사/문화적인 이유가 있으니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될 일이지만, 서양에선 반대로 일을 하지 않는 여자를 불쌍하거나 무능하게 보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인지 이곳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로 잠깐 일을 쉬거나 줄이긴 해도 금세 다시 일을 한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남성의 전폭적인 육아와 가사 참여, 사회 제도 등 환경적인 서포트가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젠더평등이나 문화/사회적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성은 왜 일해야 하는가.


결혼을 했든 안 했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다.


적합한 비교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굳이 따지자면 난 개인적으로 전업주부의 일이 돈을 버는 일보다 고되다고(정신적으로 특히) 믿는다. 수입원을 전적으로 한 사람에게만 의존했을 때 가정 내 "힘의 불균형"이 생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아무리 다른 한 사람이 가정 내 다른 많은 부분을 전담하고 있다한들 수입원의 눈치를 보게 되는 건 차라리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고마움엔 눈치가 따른다) 하지만 잔인한 현실은 결혼 생활 내내 전업주부로써 출산과 육아, 가정을 가꾸는 일에 사명을 가졌던 여성이라 할지라도 이혼/사별 등 혼자가 되는 순간, 사회적으로는 그저 오랜 백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억울하지만 "내조" 같은 개념은 캐나다 같은 나라에서는 증명하기가 어려운 관념이라 육아하고 살림하느라 결혼 생활 동안 경제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서양 사회에선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어떤 이유로든 수입원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일을 손에서 놓은 지 수년이 흘렀어도 당장 밥벌이를 하러 나가야 한다. 수년간 쳐다본 적 없는 이력서를 고치고 인터뷰를 연습해야 한다는 소리다. 어린아이라도 있다면 그나마 캐나다 정부 보조금으로 당장은 밥은 굶지 않겠지만 취업할 때까지 정부의 끊임없는 취업 압박에 시달리며 자존감은 바닥을 헤맨다. 지어내는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한인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한국 여성이 거의 매일 익명으로 이런 고민을 털어놓고 도움을 구한다. 당장 먹고살 길이 없다는 이유로 폭력적인 남편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들도 많다.


그래서, 헤어질 것 대비해서 미리 살 길 찾아두며 살라고?


사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나에겐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믿던 일들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예고 없이 벼락처럼 찾아오기 때문이다. 나는 법조계에 있지만 직접적으로 가정법을 다루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21세기에 이게 가능한 소리인가 싶은 가정사들을 자주 보고 듣는다. 그리고 많은 한국 여성들의 '내가 돈을 벌고 있었더라면... 일을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 섞인 통탄을 늘 접한다.


내가 지금 매우 행복한 가정에 있다 하더라도 직업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어딘가에 반드시 고용이 되어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랑하는 배우자의 든든한 백업(Back-up)이 되어주고 또 내 배우자가 나의 백업이 되어준다는 든든함은 결혼 생활의 질을 높인다. 특히 고용 유연성이 유달리 높은 북미에선 어느 날 아침 실직자가 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건강한 직업정신은 내 가정과 남편, 그리고 나를 지킬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은 결국 인간의 자존감을 지키는 최소한의 바탕이 된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옳은가 하는 것까지는 각자가 생각할 몫이겠으나, 현실적으로 사람이 궁지에 몰렸을 때 모아둔 돈(내 맘대로 쓸 수 있는)이 있거나 돈을 벌 수단이 있으면 살아갈 근간은 마련하게 되고, 고난을 극복할 "최소한"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돈이 가진 힘이다.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건 내가 독립적인 주체로써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이고, 수입과 커리어가 쌓일수록(그것이 얼마든) 성장하는 자존감은 행복의 밑바탕이 된다. 많이 벌건 적게 벌건, 물질적인 버팀목이 가진 힘은 엄청나다.


이외에도 우리는 직업이 "돈을 버는 일"을 넘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주고 남긴다는 것 정도는 익히 안다. 직업활동은 톱니바퀴처럼 얽힌 사회 전체를 배워나가는 평생의 경험이고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나와 다름을 마주하고 인정해야 하고, 억울한 일을 겪고 좌절하는 경험도 반드시 수반하며, 또 인정받고 보상받으며 성취하는 기쁨도 있다. 직업인으로서 건강한 자아는 가정 내에서도 건강한 인격체로 작용하는데 도움이 된다.


임신과 출산, 육아에 일까지. 현대 여성에게 주어진 업무량은 다소 잔인하게까지 느껴진다. 이러한 많은 데스크들 사이에서 밸런스를 유지하고 각 역할을 존중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역할마다 올바른 자아를 가지는 것이다. 내 역할이 존중받지 못하고 서포트받지 못한다면 당연히 도움을 청하고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밥벌이는 단순히 밥만 먹여주지 않는다. 인생의 열린 창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