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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나] 오십은 그렇게 갑자기 진짜로 왔다

회복을 위한 자각, 나를 찾아가는 여정 시작

by 코지모

“서른이면 멋질 줄 알았는데, 꽝이었고,
마흔은 어떻게 살지?

오십은 살아 뭐 하나 죽어야지 그랬는데,

오십? 똑같아. 오십은 그렇게 갑자기 진짜로 와.

난 열세 살 때 잠깐 낮잠 자고 딱 눈뜬 것 같아.”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정영주 배우의 대사처럼 오십은 그렇게 갑자기 진짜로 왔다.


40대 중후반, 어느 날부터 노안이 찾아오고, 어느 날부터인가 몸 안의 열이 오르내리는 갱년기 증상을 겪으면서도, 나는 50대의 삶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앞자리가 3에서 4로 바뀌던 때처럼, 50대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40대의 삶은 너무 바빠서 그런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30대와 다를 바 없이 여전히 세상의 시선과 타인의 기대에 얽매여 살았고, 주 5일 직장에 다니며 365일 아이의 생활에 내 삶을 끼워 맞췄다.

많은 이들이 외치던 '워라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시댁과 각종 사회적 관계 속에서 온갖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 일곱 가지 감정을 매일같이 겪으며 살아냈다.


하지만 50대는 달랐다.

앞자리 숫자가 5로 바뀐 순간,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삶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큰 변화들이 찾아왔다.


무엇보다, 내 삶의 중심이었고 매일같이 품에 안고 살던 아들이 해외 대학으로 떠났다. 그동안 편안해했던 내 손길을 거부하며 독립을 선언했다. 물론 경제적 독립은… 아직 언급조차 없다.

텅 빈 둥지를 지키는 어미새의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양가 부모님의 잦은 병치레에 더해, 내 몸 역시 하나둘씩 이상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직장에서는 지원 부서 특유의 한계에 부딪히고, MZ세대가 절반 이상인 조직 속에서 '뒷방 노인'이 되지 않으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발버둥 치고 있다. 어느새 내려가는 길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박수받으며 퇴장할 수는 없더라도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물러날 ‘적절한 시점’이 언제일지 고민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말로만 들었던 중년의 위기(?)인가, 한순간에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리고 나는 비껴갈 수 있을 거라 자만했던 중년의 위기.


인생의 절반 즈음에서,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이루었는가'라는 자괴감, ‘도대체 누구를 위해 살아왔는가'라는 허무함, 그리고 ‘이제 남은 반백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무기력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혼돈의 일상을 보냈다.


불행히도, 중년의 위기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혼돈은 곧 가족의 혼란이기도 했다. 어느 날은 나를 이해했고 어느 날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며 나의 혼란과 변화는 ‘증상’이 아닌 ‘성격’으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증상은 지나가지만, 성격은 계속되니까—그들에게는 아마도 암담했을 것이다.


나만 겪는 위기가 아닐 터인데, 나만 겪는 것 같았다. 혼란의 일상을 보내는 내 불안하고 모자란 모습들이 그저 넋두리처럼 비칠 것아 가족 외 주변과 터놓고 말하기도 불편했다. 덧없이 늙어가는 내가 창피했다. 중년이라고 만천하에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을지 막막했고, 어디에 어떻게 기대야 할지조차 몰랐다.

인터넷에는 2030 여성을 위한 정보와 프로그램이 넘쳐나지만, 50 여성을 위한 실질적인 공간과 목소리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내가 중년의 위기를 미리 준비했더라면 잘 넘어갔을까?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50대 여성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터놓고 나누고, 도움이 되고, 다시 꿈을 꾸는 삶을 응원해 주는 커뮤니티가 있었다면 이 혼란의 시기를 잘 넘겼을까?


혼자서 막막한 시간을 아주 오랫동안 버텨낸 끝에—아니, 아직도 그 시간은 진행 중이지만— 남은 인생의 절반을 잘 살아내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아직은 서툴고 더디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제야 비로소, 지난 삶을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젊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늙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이 나이.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만 살아온 인생에서 이제는 조금씩 벗어나, ‘온전히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천천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 시간이 없어서 못 했다며 미뤄두었던, 그러나 마음 한켠에 간직하고 있었던 일들— 그 일들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어보기로 했다.


영화 ’ 아멜리에‘의 한 대사처럼, 내 인생은 실패가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원고일 뿐이다. 나는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이 미완성의 원고를 조금 더 정성스럽고 솔직하게 써 내려가고 싶다.

인생의 후반전, 이제는 ‘온전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담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시작해보려 한다.



사진: 데이비드 호크니 'Pictures at an exhibition (2018)' @ 구하우스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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