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리카 Jul 17. 2020

나의 달콤 쌉싸름했던 싱가포르 연애 시장 신고식

이제 어느 정도 일도 손에 익고, 싱가포르 생활에도 익숙해지니 금세 또 일상의 반복이란 느낌이 들었다. 사실 싱가포르는 도시국가로 규모도 작은 데다 (약 721.5 km², 서울보다 조금 큰 정도다) 일 년 내내 여름이다 보니 스스로 계속해서 여행을 가거나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처럼 새로운 자극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금세 지루해지기 쉬운 곳이다. 특히 날씨의 변화가 없다는 것이 의외로 큰 복병인데, 여름을 좋아하는 나 또한 오랫동안 싱가포르에 살면서 이 점 때문에 힘들었던 고비가 몇 번 있었을 정도다.  


당시 함께 살고 있던 룸메이트는 공항에서 3교대 근무를 하고 있어서 오프가 불규칙했는데, 가끔 나와 휴일이 맞을 때면 같이 놀러 나가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우리는 공항에 가까운 탐피네즈(Tampines)라는 동네에 살고 있어 가끔 함께 마리나 베이 샌즈, 클락키 등이 있는 싱가포르의 중심부로 나가려면 30분 정도 걸리곤 했는데 서울에선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리이지만, 싱가포르에서는 엄청나게 멀게 느껴졌다. 그래도 룸메와 함께 2층 버스의 2층 제일 앞 좌석에 앉아 재잘재잘 수다를 떨다 보면 어느샌가 화려한 불빛이 반짝이는 싱가포르의 중심부에 도착해 있었다.


그 날은 룸메와 드디어 우리도 처음으로 함께 불금을 불태워보자며 클락키에 갔던 날이었다.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각자 메이크업을 정성 들여하고, 평소에는 입을 일이 없던 예쁜 원피스도 꺼내서 이게 나은지 저게 나은지 서로 골라주며 즐겁게 외출 준비를 했다. (여자들은 이때가 제일 신나는 시간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아마 클락키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셀카를 20장 정도는 찍지 않았을까. (웃음) 이 모든 과정 자체가 우리에겐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클락키에 들어서면 보이는 풍경 © 에리카

클락키(Clarke Quay)는 싱가포르 강을 따라서 분위기 좋은 펍, 레스토랑이 가득한 지역으로 밤이 되면 더욱더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데이트를 하는 커플, 친구들끼리 즐기러 나온 무리, 마지막 밤을 즐기러 나온 여행객들 등 제각각 이유는 다르지만 다들 들뜬 마음으로 찾는 곳이 바로 클락키. 유명한 클럽인 쥬크 Zouk를 포함해 다양한 장르의 클럽이 모여 있어 불금을 즐기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다만 여행객의 비율이 높아 관광지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에 현지인들이나 싱가포르에 오래 산 외국인들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잘 찾지 않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 주위로 펍, 레스토랑이 가득하다 ©에리카

이때만 해도 아직까지 여행객의 기분으로 싱가포르를 경험하던 우리는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싱가포르 강가를 걸으며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는데, 대체 뭔가 싶어 둘이서 그 소리를 따라가 보니 리버스 번지라는 놀이기구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이었다. 리버스 번지는 동그란 기구 안에 탑승하면 아래로 쭈욱 당겨졌다가 상공으로 한 순간에 팍! 하고 튕겨 올라가는 말 그대로 ‘역 번지’를 경험하는 놀이기구인데 클락키에서 기분 좋게 한 잔 하고 난 후 친구들과 호기롭게 탑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룸메는 “대박! 언니~언니~, 우리도 저거 타자~! 진짜 재밌겠다!”라고 신나서 조르기 시작했는데 나는 어린이 바이킹도 무서워서 못 타는 수준이라 절대 안 된다고 버티면서 일단 구경이나 하자고 시간을 끌었다. 그렇게 둘이서 놀이기구 앞에서 한참을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깔깔 웃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Excuse me, are you guys waiting for this? 저기, 두 사람 이거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묻는 게 아닌가. 그래서 아니라고 대답을 하려고 뒤를 돌아보니 말끔하게 셔츠를 차려입은 백인 남자가 싱긋 웃으며 서 있었다.


나는 속으로 ‘거 참, 훈훈한 청년이구만. 허허.’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무서워서 탈 생각이 없고 내 친구는 타고 싶어 한다고 하니 그는 자기 뒤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는 무리를 가리키며 자기 친구들이 타려고 하는데 한 자리가 남으니 같이 타지 않겠냐고 물었다. 룸메는 바로 “콜!”을 외치며 함께 그 번지를 타게 됐고, 나에게 말을 건 그 남자는 자기도 이런 건 별로라며 내 옆에 서서 구경이나 하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한 핑계였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 속은 그 사람만이 알겠지.


그렇게 각자의 친구들이 꺄-꺄-비명을 지르며 클락키 상공을 가르고 있는 동안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알고 보니 그는 프랑스 사람이었고, 싱가포르에 산 지 이미 9년이나 되는 베테랑(?)이었다. (편의상 B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날 이후로 왓츠앱으로 대화를 하며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는데, B는 한국문화도 꽤 잘 알고 있는 듯했고 심지어 카카오톡도 안다고 했다. 이때만 해도 이런 부류(곧 알게 될...)의 외국인은 잘 몰랐던 터라 너무 신기했고 반가웠다.


그러다 얼마 안 있어 저녁 데이트 신청을 받았고, 퇴근 후 분위기 좋은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멀리서부터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나를 반기는 모습에 나도 마치 오래된 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 날 저녁 우리는 맛있는 식사를 하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대화를 나눴는데, 지금 생각하면 남녀의 첫 데이트에서 흔히 하는 이야기들이었지만 그때 당시에는 로맨틱한 레스토랑의 분위기와 싱가포르에서의 첫 데이트라는 시너지 효과 덕분이었는지 마치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남자를 만난듯한 환상에 빠진 날이었다.


그 날 이후로 우리는 꾸준히 연락을 하면서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함께 있으면 한없이 자상하고 이야기가 잘 통하는 그였지만 왠지 모르게 가끔 싸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갑자기 연락이 한동안 없다가 일이 너무 바빴다며,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며 찾아오는 패턴이 그랬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황당한 에피소드는 주말에는 당연히 만나자고 하겠지라는 은근한 기대를 하고 있는 나에게 “이번 주말에 뭐해?”라고 묻기에 “, 특별한 계획은 없는데 B?”라고 하자 “그렇구나. 나는 친구들하고 축구하러  거야! :-)” (저 웃는 얼굴이 더 얄밉다) 라고 하던 해맑은 답장그때 그 답장을 보고 참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던 기억이 난다. (이건 그 이후로 우리끼리의 농담이 되었다)룸메에게 그 답장을 보여주자 이 사람 이상하다며 당장 연락 끊으라고 했었는데...그랬어야 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 시기에 친해진 R이라는 일본인 여자 친구가 있었다. R은 화려한 외모와 쾌활한 성격 덕분에 무척 발이 넓었는데, 지인의 소개로 한 모임에서 알게 된 이후로 우리 둘은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하루는 R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요즘 만나고 있는 B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프랑스 사람이고, 이런 일을 하고, 안 지는 얼마나 됐고, 어떤 점이 좋은지, 그리고 어떤 점이 마음에 걸리는지 – 여자 친구들끼리 흔히 하는 그런 연애상담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던 R이 점점 표정이 오묘해지더니 “설마 이름이 B야?”라고 묻는 게 아닌가. 놀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자신의 다른 일본인 여자 친구와도 만난 적이 있다며 함께 찍은 사진까지 보여주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사진을 들여다보니 B가 나와 만날 때 입고 나왔던 셔츠를 입고 R과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활짝 웃으며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B는 싱가포르의 연애 시장에서 꽤나 유명인사였다.


한국인, 일본인 여성을 좋아하는 확고한 취향이라고. 각종 데이트 어플에서도 활약(!)한다고 했다. 카카오톡과 한국문화를 잘 알고 있는 이유는 그전에도 한국인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었다. 처음 나를 만났을 때도 바로 한국인이냐고 알아보며 물었던 것도 기억났다.


역시 왠지 모를 싸한 느낌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날 바로 B를 차단했고, 똑순이 룸메는 자기 말이 맞았다며, 이제부터 언니는 내 허락받고 데이트를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마치 갑자기 버블이 팡 터지며 땅으로 털썩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었다. 싱가포르의 연애 시장이 얼마나 난이도가 높은 곳인지를.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연애란 노력만으론 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배우게 될 것이라는 것도.


그렇게 나의 달콤 쌉싸름한 싱가포르 연애 시장 신고식이 끝났다. 에휴.

이전 11화 M상의 메이드 그녀는 구세주일까, 여자의 적일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