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래플스 호텔
1년 내내 여행객으로 붐비는 싱가포르. 그만큼 부티크 호텔에서부터 최상급 호텔까지 각양각색의 호텔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여행객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인근 이웃 국가로 여행을 자주 가기도 하고, 일상에서도 스테이케이션을 즐기다 보니 호텔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것도 사실.
그렇게 쟁쟁한 호텔들 사이에서도 당당히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호텔이라고 소개하는 이 곳은 꽤 특별하다. 찰리 채플린, 마이클 잭슨, 엘리자베스 여왕, 영국의 작가 윌리엄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 등 각계 유명인들이 싱가포르를 방문할 때 머무는 VIP를 위한 호텔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무려 전 객실이 스위트룸으로 1박에 한화로 8~90만 원이 넘는 초럭셔리 호텔이다.
싱가포르에서는 건국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토마스 스탬퍼드 래플스 경의 이름을 따, 고급, 최고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싶을 때 이름에 ‘래플스 Raffles’를 붙인다. 래플스 병원, 래플스 플레이스(비즈니스 중심가), 래플스 학교, 래플스 호텔처럼.
래플스 호텔의 시작은 1930년대 초반 해안가에 위치한 개인 소유의 주택이었다. 처음엔 찰스 에머슨 박사가 오픈한 ‘에머슨 호텔(Emerson’s Hotel)’로 사용되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학교인 래플스 학원의 기숙사 건물로 사용되었다. 에머슨 박사의 임대계약이 끝나고 난 후, 아르메니아 출신의 사키스 형제는 이 건물을 하이엔드 호텔로 사용하기 위해 인수했고, 1887년 10개의 방으로 래플스 호텔이 오픈했다.
래플스 호텔이 위치한 주소는 비치 로드(beach road)인데 예전엔 이 길이 앞쪽의 해안으로 이어지는 도로였기 때문. 매립사업이 완료된 후에는 싱가포르의 교통 요지,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해안가가 가까운 위치와 함께 수준급의 서비스와 숙박 시설로 당시 부유한 고객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금세 고급 호텔로서의 입지를 세우게 된다.
래플스 호텔은 1987년 싱가포르의 국가 기념물(National Monument)로 지정되면서 그 역사와 건축적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노후된 시설을 위해 1989년 대대적인 공사를 거쳤는데 건물의 구조는 그대로 유지하되 전체를 복원하는 까다로운 공사 과정을 맡겠다고 나서는 건설사가 없었다. 그때 국내의 쌍용건설이 수주를 맡아 2년 만에 성공적으로 공사를 진행하며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대중적으로 쌍용건설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2007년에는 마리나 베이 샌즈 수주에도 성공했다)
1989년, 2017년 두 번에 걸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치긴 했지만 래플스 호텔의 시그니처인 식민지 양식(colonial style)*의 건축은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식민지 양식이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지어진 건물들로 1930년 이전부터 1930년대까지 지어진 수많은 흑백의 대조가 돋보이는 대저택들과 국회 의사당, 싱가포르 박물관과 같은 공공건물이 포함된다.
래플스 호텔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 사무소인 Swan & MacLaren의 영국인 건축가 버드웰(R. A. J. Bidwell)이 최초로 설계했는데 전형적인 네오 르네상스 건축 양식에 높은 천장, 넓은 베란다와 같은 열대 지방에 어울리는 특징이 추가되었다. 대리석 바닥, 전기 조명과 전동 천장 팬이 설치되어있는 식당은 이 지역 호텔 중에서는 최초였다고.
2020년에 두 번째 레노베이션을 마치고 재 오픈한 래플스 호텔은 이전보다 한층 더 화려해진 모습으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기존의 고급스러움은 유지하되 좀 더 모던한 내부 디자인과 태블릿으로 실내 시설을 조작하는 새로운 시스템부터 예전 저명한 작가들이 래플스 호텔에서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던 것에서 모티브를 따 오마주 한 ‘라이터스 바 Writers Bar’까지 다양한 재미가 더해졌다.
래플스 호텔은 전 객실이 스위트룸으로 객실마다 전담 집사가 배정되는데, 집사는 고객이 호텔에서 머무르는 동안 원하는 요구사항에 맞춰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객실에 비치된 태블릿으로는 거의 모든 내부 시설의 조작이 가능하며 도움이 필요할 땐 집사를 호출하는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래플스 호텔에서 머무르는 투숙객이 아니라도 이 유명한 롱바 에 들르기 위해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을 찾곤 한다. 바로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칵테일, 싱가포르 슬링 Singapore Sling을 최초로 만든 바가 바로 이 롱 바 Long Bar. 여성이 밖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터부시 되던 시기에 이 바의 바텐더가 진과 체리브랜디, 레몬주스 등을 섞어 붉은빛의 과일 주스처럼 만들어 여성고객들에게 제공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레노베이션을 거치며 세련된 내부로 변신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옛날식 얼음 기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얼음을 갈아내고, 천장에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날로그식 부채가 천천히 움직이며 바람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여행객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주는 곳이다. 또한 땅콩 껍질을 바닥에 그대로 버리는 것 또한 옛날 방식 그대로. 규칙이 엄격한 싱가포르에서 묘한 쾌감을 느끼게 하는 소소한 재미다.
새 단장을 한 로비는 ‘그랜드 로비 Grand Lobby’로 이름을 바꾸고 싱가포르 여행에서 많은 이들이 기대하는 영국식 애프터눈 티를 서빙한다. 화려한 샹들리에, 고급 은식기와 함께 감미로운 하프 연주를 배경으로 즐기는 애프터눈 티는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 투숙객에게만 오픈되는 로비이지만 그랜드 로비에서 식사나 티 타임을 즐긴다면 아름다운 로비를 감상할 수 있어 인기가 많다.
싱가포르의 역사를 함께 하고 있는 국보 호텔, 래플스 호텔.
시대의 변화에 따라 현대적으로 진화하면서도 본질은 지켜나가는 모습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글 디자인 프레스 해외통신원 에리카
협조 래플스 호텔 http://www.rafflessingapore.com/